맥아더를 李舜臣, 트루먼을 元均으로 오해하는 한국인들
트루먼의 위대한 결단이 없었더라면 인천상륙작전도 오늘의 한국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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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받고 동족을 치는 전면 남침을 해왔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휴가차 가 있었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이번 사태는 전면적인 대규모 군사행동이다"라고 보고하자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딘, 그 개자식들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합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트루먼은 미국의 첨전을 결정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결단으로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 4800만 명이 자유와 번영속에서 살고 있다.
   트루먼의 이런 결단은 그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 때 미국이 스탈린의 소련을 지원하고 있을 때도 그는 루스벨트나 국무부 고관들처럼 소련과 공산주의에 속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똑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스탈린도 히틀러나 알 카포네 같이 믿을 수 없는 자"라고 했다. 트루먼은 또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소련을 침략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으면 러시아를, 러시아가 이기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고 소령으로 전역한 뒤에도 주방위군에서 일하면서 예비역 대령까지 올랐던 트루먼은 소련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組暴(갱스터)국가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진 그였기에 스탈린이 2차대전의 여세를 몰아 세계赤化 전략을 추진할 때 단호하여 이를 저지하는 결의를 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냉전은 트루먼이 혼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이 유럽의 점령지를 공산화하고 세계 곳곳에서 정부전복 활동을 벌이자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하여 미국이 나서면서 냉전의 막이 올랐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 과정 때 미국의 지도자가 트루먼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구했다. 김일성 김정일에 비교하면 스탈린은 양반중에도 상양반이다. 그런 김정일에 대해 "저런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몰아내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신념의 지도자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될 때 국민들은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이고 북한동포들도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도덕적 결단은 역사를 움직인다.
   朴대통령은 여러번 일기와 연설에서 김일성을 '만고역적' '전쟁광' '미친 개'라고 저주했다. 그는 김일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도덕적 우월감이 김일성을 코너로 모는 원동력이었다. ==============================================================================
  
  트루먼 대통령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로록 넘겨주는 代價로 休戰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면서 '반공포로 불송환' 원칙을 固守, 수많은 미군을 희생시켰다.
  趙甲濟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제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을 읽다가 가슴을 치는 감동을 느낀 대목이 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한국전쟁의 休戰협상 중 가장 골치 아픈 案件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군 포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로 걱정이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끌고 간 미군 포로들이 非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증거와 보도가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赤十字社의 현지 시찰을 거부하더니 포로 명단을 제출하였는데, 실제 인원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1952년 1월1일, 우리는 휴전협상에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가장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선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제도이고, 따라서 정신이 바로 박힌 정부라면 자유롭게 살겠다는 포로를 억지로 이런 제도 하로 돌려보낼 순 없는 것이다. 우리 편에 서서 자유를 위하여 싸운 한국인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전쟁 포로들을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산당 지배 체체로 돌려보내려는 해결책을 거부하였다. 1952년 5월7일 내가 한 연설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하게 담은 구절이 하나 있었다.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도록 넘겨주는 代價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We will not buy an armistice by turning over human beings for slaughter or slavery.)
   나는 이 건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강제송환은 韓國戰에 참전한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도덕성의 근본과 인도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면 (그들에게)비참한 流血사태를 불러 미국과 유엔에 있어서 영원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받기를 요구함으로써 세계 앞에 그들이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알지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보낸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에서 休戰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바람에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 歷代 최저 지지율이었다. 보통 대통령이라면 ‘모든 포로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自國民 포로를 서둘러 데리고 오려 하였겠지만 트루먼은 反共포로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원칙을 固守하였다. 反共포로들의 다수는 북한군 포로였다. 즉, 외국인의 人權을 위하여(사실은 고매한 인도적 원칙을 위하여) 自國民(포로)을 희생시킨 셈이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선 反共 포로와 공산 포로 사이에서 殺戮(살륙)이 끊이지 않았고, 미군 포로 수용소 소장을 공산 포로가 납치해가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도 트루먼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休戰(휴전)협상이 難航(난항)하는 가운데 高地戰이 2년간 계속되어 쌍방 포로들보다 더 많은 수십 만 명이 戰死하였다. 스탈린이 죽자 공산측은 미국의 ‘자유의사 확인 후 송환’ 원칙에 동의하였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할하던 북한군 출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강제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중공군과 북한군은 항의하는 척하다가 그냥 넘어갔다. 북한정권이 한국군 포로 수만 명을 돌려보내지 않고 不法(불법) 억류한 것은 이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이란 說도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 전쟁중 네 번 위대한 인도적 결단을 하여 한국과 한국인을 살렸다. 南侵 보고를 받자마자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참전을 결단하였고,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밀려내려 오고 맥아더와 영국이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를 건의하였을 때도 “미국은 困境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고 선언하였다. 미군은 흥남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면서도 한국인 10만 명을 구출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반공포로를 보호하기 위한 결단!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미군이 한 士兵을 구출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보내 수십 명이 희생되는 줄거리이다. 미국이 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高貴(고귀)한 인도주의 원칙이었다. 한국전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은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하여 수많은 미군들을 희생시켰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지금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한국인들이 트루먼을 잊었다. 트루먼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 공원, 기념물이 없다. 임진각 공원의 한 귀퉁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트루먼 동상이 있을 뿐이다.
  
   트루먼 한 사람의 결단에 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은 김일성 南侵 전쟁 60주년을 맞아 ‘트루먼 대통령 기억하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트루먼 이야기를, 反共자유민주주의에 원한을 품고 이상한 판결들을 쏟아내는 좌경판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당신들이 만끽하는 그 깽판의 자유"를 주신 분이 트루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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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중 미군 戰死傷者가 45%!
  
   자유의지에 의한 포로 송환 원칙을 지키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趙甲濟
  
   1951년 여름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2년이 걸렸다. 휴전회담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 협정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미 국부부 간부들은 이 前例를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고 트루먼 在任기간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韓國戰에서 戰死 5만3000명을 포함, 14만 명의 死傷者를 냈다. 그 가운데 45%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입은 피해라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도 敵軍의 人權을 존중한다는 고귀한 원칙을 국가가 고수하는 데 얼마나 비싼 비용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發顯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李承晩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韓美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毛澤東, 金日成,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 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수년 전 ‘毛澤東 秘話’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著者는 러시아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당시 不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Alena Volokhova)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戰死한 중공군은 약40만 명이며 연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공식발표로는 戰死者가 15만2000명이지만 鄧小平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숫자가 40만이란 것이다.
  
   좌익들이 만든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휴전회담이 늦어진 것은 유엔군측이 무리하게 자유송환 원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란 투로 서술하였다. 공산군 입장에 서서 불평하는 꼴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 나쁜 자들보다 훨씬 많은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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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 "대통령은 호랑이 등에 탄 사람"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趙甲濟
  
   조갑제닷컴이 선정한 올해의 四字成語는 '騎虎之勢'이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르는 일과 같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대통령은 항상 사건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건이 그의 꼭대기에 앉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의 無限 책임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돌아오지 않는 책임은 없다. 대통령은 한시라도 자신이 대통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측근 참모나 가족들도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사람 속에는 그래도 惡보다 善이 더 많다는 믿음으로 대통령職을 수행했다. 善이 惡을 누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적 先例를 연구했다. 모든 문제는 과거에 그 뿌리가 있다. 나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했다. 내가 왜 역사를 읽고, 또 읽었느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직한 트루먼은 결단의 사나이였다. 원자폭탄 투하, 한국전 참전, 맥아더 해임 결단 등등. 그는 일단 결정을 하면 "이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자세를 취했다.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였지만 딘 에치슨 국무장관, 조지 마셜 국방장관과 같은 최고의 엘리트들을 부리고 존경을 받았다. 그의 힘은 성격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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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 대통령의 名言
  <어떤 초등학생의 事後분석도 가장 위대한 정치가의 事前예측보다 낫다>
  조갑제
  
   미국의 歷代 대통령 가운데 최초의 본격적인 회고록을 쓴 이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다. 그는 퇴임後 '시련과 희망의 시대'라는 제목의 두 券짜리 회고록을 썼는데 序文(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초등학생의 事後분석도 가장 위대한 정치가의 事前예측보다 낫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분석하기는 쉽지만 정치인은 혼돈상태에서 불충분한 정보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사실이 다 밝혀지고, 사건이 다 진행된 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事後평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엔 事後분석가들이 너무나 많다. 천박한 지식을 갖고 오만하게 남을 裁斷하는 이들이 많다. 분석과 논평이 역사를 만들지는 않는다. 참여, 생산, 건설, 행동이 역사를 만든다. 약점 많은 인간이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판단하는 데 오류가 없으면 그게 이상하다. 민주주의는 잘못이 발견되면 이를 시정할 수 있다. 독재는 잘못을 바로잡는 기능이 마비되어 있음으로 결국은 自充手로 自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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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이유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대학교를 안 나온 미조리의 촌사람이었다. 그는 결단의 사나이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原爆을 투하하기로 한 결단을 비롯하여 6.25 파병 결단, NATO 설립과 마셜 플랜의 결단, 그리고 맥아더 원수 해임의 결단. 당시 그의 결단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세월이 지나 역사적 평가는 아주 높아졌다. 트루먼과 레이건이 소련 帝國을 무너뜨리는 데 알파와 오메가의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농담을 잘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 데 대해서 질문을 받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맥아더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한 것이지 그가 바보 같은 자식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실은 맥아더는 그런 자였지만 바보스럽다는 것을 가지고 장군들을 처벌할 순 없다. 만약 그런 法이 있다면 절반에서 4분의 3 가량의 장군들은 감옥에 쳐 넣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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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는 이순신, 트루먼은 원균?
  
  
   인천상륙 58주년. 맥아더는 나라나 군대보다 자신의 명예를 앞세우고 '예스맨'으로 참모진을 구성했다.
  趙甲濟
  
   오늘은 1950년 9월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날이다. 미군과 한국군을 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맥아더는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背後를 차단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은 9월28일, 38선을 돌파하여 北進을 시작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神話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남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6.25 전쟁 하면 우선 맥아더를 연상한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北進통일을 하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그들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후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을 가졌고, 트루먼 대통령이 사방에서 오는 한국포기 압력을 견뎌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미군 장성들 중 가장 과대평가 된 인물이 맥아더인데, 한국인들은 과대평가된 그를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맥아더는 한국을 구한 면도 있지만 한국을 絶體絶命의 위기로 몰아간 책임도 있다. 맥아더의 ‘성공 뒤 실수’를 분석해보면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오만은 반드시 代價를 치른다는 교훈이 첫째이다.
  
  
   1. 맥아더는 정보판단에서 실패했다. 그는 유엔군이 北進해도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誤判했다. 중공군이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만주로 이동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원이 중공군과 섞여서 같이 걷기도 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15일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하여도 사상최대의 살육을 당할 것이다”고 보고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는 찰스 윌로비였다. 이 사람은 맥아더가 이미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정보, 즉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
  
   2. 맥아더는 정직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北進하는 국군을 쳤다. 수개 사단이 壞滅的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약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들어와 布陣하고 있었는데도 맥아더 사령부는 그 10분의 1 정도로 추정했다. 맥아더는 명백한 사실이 등장했는데도 자신의 誤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北進을 중단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야 했음에도 그는 한 달 뒤인 11월 하순 또 다시 무모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3.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11월 하순 중공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유엔군을 총력으로 기습했다. 맥아더는 뒤늦게 현실을 인정한다. 맥아더의 엉터리 정보판단과 부정직한 태도로 해서 수많은 유엔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의 기습을 당한 유엔군은 싸우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서울까지 총퇴각 명령을 내린다.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맥아더는 중공군의 한번 기습에 놀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한다. 행동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돌변한다.
  
   4. 변명만 했다. 유엔군이 평양~원산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南進을 저지했더라면 38선까지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접촉을 피하게 하곤 총퇴각을 명령하여, 서울을 싸우지도 않고 내어준 뒤 수원 이남까지 물러났다. 미군 역사상 가장 긴 후퇴였다. 맥아더는 이 사이 변명만 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誤判했던 점에 대해선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고, 유엔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은 만주 폭격을 트루먼 정부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을 향하여 증원군을 보내주지 못하겠으면 한국에서 철수시켜달라고 협박했다. 대만 군대를 중국본토에 상륙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당시 대만 군대는 軍律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엉터리들이었다. 이들이 중국본토에 상륙하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맥아더는 중국을 공격하자는 제안도 했다. 한국전선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중공군에게 땅을 넘겨주고 있으면서 중국과 정면대결하자고 한 것이다.
  
   5. 맥아더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작전 지휘를 분할했다. 서부전선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동부전선은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맡았다. 맥아더는 알몬드를 편애했다. 통합작전이 불가능해졌다. 韓美연합사가 해체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국군과 미군의 통합작전이 어렵게 될 것이다.
  
   6. 맥아더의 속셈은 중국을 수복하여 '아시아의 시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기회로 삼아 전선을 중국본토로 확대시키려 했다. 트루먼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런 擴戰을 뒷받침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맥아더는 극동만 보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자유세계 전체를 지켜야 했다. 그때 소련은 原爆실험에 성공한 상태였다. 미국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힘도 국가적 의지도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친다면 소련이 중국 편에서 개입할 것이고, 핵무기를 쓰는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보았다.
   트루먼이 擴戰을 결심했더라면 핵을 쓰는 3차 대전이 일어났든지 월남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美中 전쟁이 중국 본토에서 계속되었을 것이고 결국은 미국이 이기지 못했을 것이며, 미군철수 과정에서 한반도는 포기되었을 것이다. 트루먼이 승자도 敗者도 없는 제한전을 통하여 한국에서 확보한 것은 남한과 평화였다. 한국과 미국은 휴전 뒤 韓美동맹을 구축, 이 평화의 시기를 善用하여 북한군의 재남침을 저지하고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몰락을 불렀다.
  
   7.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한 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는 반격작전을 펴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 올렸다.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반격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전선으로 날아와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반격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하여 부하의 功을 가로채려 했다.
  
   8. 맥아더는 文民우위의 전통을 무시했다. 그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대통령의 발언중지 명령도 무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抗命한 그를 해임한 것은 당연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늦었다는 평을 받았다.
  
   9. 웅변 뒤의 몰락: 맥아더는 귀국하여 영웅 대우를 받고 미 의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이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공세였다. 그 직후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민주당 의원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는 거짓말 하는 장군, 무책임한 장군, 세계정세를 아주 좁게 보는 장군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피력했던 핵심적인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란 것이 폭로되었다. 맥아더는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청문회 이후 여론의 지지는 사라졌다. 1952년 선거에선 아이젠하워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맥아더의 副官이었다. 그는 맥아더보다 훨씬 원만하고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10. 맥아더의 정보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毛澤東은 당초 한반도로 出兵하는 중공군 사령관에 林彪를 임명하려 했다. 林彪는 稱病(칭병)하곤 이 제의를 거절했다. 모택동은 彭德懷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수개월 간 사령관이 林彪라고 오판했다. 자신이 상대하는 敵將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싸운 것이다. 요사이 韓國戰史를 쓰는 미국인들 중엔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 직후에 죽었더라면 영원한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랬더라면 한국은 통일되었거나 휴전선이 평양~원산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11. 맥아더의 실패는 거의가 명예를 추구하는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측근들을 ‘예스맨’으로 채웠다. 그들은 맥아더가 싫어하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황제나 다름없는 맥아더를 둘러싸고 안락한 도쿄에 앉아서 한반도 지도를 상대로 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嚴冬雪寒의 한국전선은 맥아더와 그 측근들에겐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하루도 한국에서 잔 적이 없다. 맥아더는 언론 타기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쇼맨십은 그의 무덤이 되었다.
  
   12. 워싱턴의 미 국방부, 合參도 맥아더의 실패에 책임이 있다. 미국 군부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들은 거의가 맥아더의 훨씬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기가 치솟은 맥아더를 견제하려 하지 않았다. 맥아더가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을 펴도 이를 방치했다.
  
  
   13.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맥아더의 그늘에 가려서 두 사람이 과소평가 받는다. 트루먼과 리지웨이이다.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중공군 개입 후에도 한국 포기 압력을 거부했던 트루먼이야말로 정말로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트루먼의 동상, 거리이름, 공원이름도 없다. 많은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이순신, 트루먼은 원균이다.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꼭 惡黨을 필요로 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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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 "국민은 맹수이다"
  
  
   트루먼은 金鍾泌에게 "한국전쟁 때 영국 때문에 통일을 시켜드리지 못한 점 미안하다"고 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맹수로 알아야 합니다. 사육사는 맹수가 더워하면 호스로 물을 뿌려주고, 고깃덩어리를 던져 먹여주며, 아플 때는 쓰다듬어주니까 맹수도 이 고마움을 알겠지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육사가 맹수의 발을 밟는다든지 하면, 즉 백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들고일어나 사육사를 잡아먹어버리는 것이 맹수인데 국민도 같습니다"
  
  
  趙甲濟
  
  
   생존 한국인중에서 맥아더와 트루먼 두 사람을 다 만났던 이는 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일 것이다. 그는 1951년과 1963년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1951년에는 육군장교로서 미국에서 유학중 성탄절에 여러사람들과 함께 백악관에 초대되었을 때였고, 1963년엔 공화당을 창당했다가 내분으로 밀려나 해외생활을 하던중이었다. 金총재는 미조리주에 있던 트루먼 기념도서관을 찾아가 퇴임후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트루먼을 만났다고 한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金총재를 안내하면서 종일 대화를 나눴다. 듣던대로 트루먼은 솔직담백한 인상이었다.
  
   그는 "내가 한국인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다. 일단 미군이 출병했으면 통일을 시키고 돌아와야 했었는데 이걸 이루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金鍾泌씨가 그 이유를 묻자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擴戰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미국은 1950년10월 北進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자 맥아더 사령관의 건의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하고 중공 본토를 공격해서라도 이를 저지하려고 했었다. 이때 영국정부가 미국을 만류하고 나섰다. 영국은 미국이 동양에서 발이 묶여버리면 유럽에서 소련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게 될 것임을 걱정했던 것이다.
  
   1962년 金鍾泌 당시 정보부장은 미국을 방문한 길에 뉴욕에 들러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은퇴 생활중이던 맥아더 장군을 만났다. 맥아더 장군은 80세를 넘겼는데도 아주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맥아더 장군도 金부장에게 "한국을 통일시켜 놓지 못한 데 대해서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6.25 전쟁 때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의 擴戰論에 제동을 걸었지만 두 사람이 다 은퇴한 뒤 회고하는 마당에서는 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이야기이다. 6.25 戰史學者들이 대체로 일치하는 대목은 그때 미국이 중공을 공격했더라도 소련의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하여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은 통일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金鍾泌씨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정치를 하려고 하는 후배에게 충고의 말씀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트루먼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는 젊은이들이 잘 하고 있는데 무슨 충고냐"고 사양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맹수로 알아야 합니다. 사육사는 맹수가 더워하면 호스로 물을 뿌려주고, 고깃덩어리를 던져 먹여주며, 아플 때는 쓰다듬어주니까 맹수도 이 고마움을 알겠지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육사가 맹수의 발을 밟는다든지 하면, 즉 백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들고일어나 사육사를 잡아먹어버리는 것이 맹수인데 국민도 같습니다"
  
   金鍾泌 전 총재는 "6.25가 났을 때 백악관에 트루먼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인의 다행이었다.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즉각 미군의 참전을 결심했을 것이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한국인의 은인이다"고 했다.
  
  
  
  
  
  
  
  
  
  
  
  
  
  
  
  
  
  
  
  
  
[ 2010-02-16, 11: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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