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卒 트루먼의 위대한 生涯(생애)/어린 시절
트루먼은 소년시절 세 가지를 즐겨 하였다. 피아노 치기, 독서, 그리고 역사에 대한 흥미.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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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逆轉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逆境에 처하였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그의 부인도 진다고 생각하였던 1948년 대통령 선거를 大勝으로 이끈 그는 퇴임후에도 역전극을 벌였다. 그가 튀임할 때의 지지율은 22%로서 역대 最低였다. 한국전의 교착 상태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의 인기는 퇴임후부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냉전에서 서방세계가 승리한 후 트루먼은 이 승리의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평가되면서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 44명에 대한 전문가와 일반인의 평가를 종합한 최근 랭킹에 따르면 트루먼은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워싱턴,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이은 6위이다. 이런 분이 6.25남침을 계기로 하여 한국과 운명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한민족의 축복이었다.
  
  트루먼의 출생과 성장은 링컨과 매우 비슷하다. 그는 지난 120년간 등장한 미국 대통령중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세계최강국의 지도자가 되어 세계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단에 결단을 거듭하였다. 태평양전쟁을 끝낸 原爆 투하, 反共-反蘇노선을 선언한 트루먼 닥트린, 서유럽을 부흥시킨 마셜 플랜, 서방세계를 지켜낸 NATO 창설, 스탈린의 베를린 봉쇄에 맞선 空輸작전, 그리고 한국 파병 결정 등.
  
  1884년 5월8일 그는 미조리주 라마에서 農夫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농사와 畜産을 하는 집안에서 그는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트루먼은 소년시절 세 가지를 즐겨 하였다. 피아노 치기, 독서, 그리고 역사에 대한 흥미.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을 하고 週當 두 번씩 개인교습을 받았다. 어머니의 권유였다.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어머니 아래서 만들어진다는 공식이 트루먼에게도 적용된다. 트루먼은 정치를 시작한 뒤에도 어머니로부터 助言을 구할 정도였다.
  
  1945년 4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急死하고 부통령인 트루먼이 그 자리를 承繼하였을 때 기자들이 미조리주에 있던 어머니에게 논평을 구했다. 할머니가 다 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애통하게 돌아가시고 아들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기뻐할 수가 없군요. 아들이 선거에 이겨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면 저는 깃발을 들고 나가 기뻐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깃발을 흔들거나 기뻐할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만 해리는 잘 할 겁니다."
  
  이 논평이 실린 신문을 읽고 트루먼은 日記에 <최고의 홍보전문가가 써주어도 이보다 더 좋은 말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썼다. 그는 어머니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머니의 사랑, 음악, 독서, 그리고 역사에 대한 흥미. 이런 요소들이 아마도 트루먼의 人格을 형성한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學歷의 부족을 덮어주는 것이 이런 人文的 소양인데, 高卒의 트루먼은 기라성 같은 엘리트들을 상대하면서 한번도 열등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표현하는 말들은 일정하다. 서민적, 직설적, 낙관적, 그리고 겸손이다.
  
  그는 한국 나이로는 열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철도회사의 計時員으로 취직하였다. 그 뒤 5년 동안 여러 회사에서 주로 庶務를 보았다. 1906년 다시 그랜뷰의 自家 농장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11년간 농사를 지었다.
  
  1911년엔 미조리주 방위군에 입대하였다. 視力이 좋지 않았지만 시험지를 외워서 합격되었다고 한다. 1911년 그는 집안이 좋은 베스 월레스에게 請婚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 다시 청혼하겠다고 말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미국이 참전한 1917년 그는 33세의 늦은 나이에 自願하여 프랑스 戰線으로 갔다. 대위에 임관, 포병 중대장이 되었다. 그는 포병중대를 잘 지휘하여 한 명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전투경험은 그의 지도력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轉役한 그는 계속 주 방위군 소속이었다. 대령까지 올랐다. 트루먼은 1919년 군대 친구인 유태인 에드워드 재콥슨과 同業으로 잡화상을 캔사스 시티에 열었다. 그 직후 트루먼은 약속한대로 베스 월레스에 다시 청혼, 결혼하였다. 1921년 불경기 때 잡화상이 도산, 1934년까지 빚을 갚아야 하였다(계속).
[ 2010-03-13, 09: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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