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이틀 전까지 피흘리며 싸운 군대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1974.10.4 건립: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오산리 여주휴게소內)를 찾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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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는 참전21국 기념비 중 가장 찾아가기 쉬운 기념비 중 하나다. 영동고속도로 강릉 방면 여주휴게소(예전 가남휴게소) 구내인 경기도 용인시 가남면 오산리에 있다. 출구쪽 GS칼텍스 주유소 부근 언덕 계단에 참전비가 세워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45계단을 오르면 직사각형의 흰 돌판이 있고 윗부분에 ‘그리이스군 참전비’란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네모난 벽의 중앙에 월계수잎과 투구가 그려진 둥근 동판이 있고 돌판 옆과 위로 아테네 신전을 본딴 문양의 기둥과 板石(판석)이 놓여 그리스 군대란 짐작을 하게 한다.
  
  
  
  참전비 바로 뒤에 5-6층 높이의 물류회사 창고가 새로 지어져 참전비가 초라하게 보였다. 참전비에는 한글로 쓴 ‘참전약사’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리이스군(지상군 1개 대대, 수송기 9대)은 1950년 12월4일 정의의 십자군으로 파한되어 용전분투하다가 1955년 12월11일 본국으로 개선한 군대이다. 여기 두 나라의 국민과 후손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들의 이름을 새긴다”는 글 아래 주요 戰歷(전력)과 ‘초대 대령 요아니스 다스칼로플로스’를 위시한 역대 지휘관들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참전비 아래 입구쪽에 위치한 立式(입식) 안내판에 따르면 이 참전비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 영토보존을 위해 희생한 그리스 용사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1974년 10월 3일 대한민국 정부가 건립했다.
  
   아래쪽 제단 오른쪽에 금색 십자가가 있고 그 옆으로 여섯 장의 금색 동판에 ‘1951.9.27 대위 크우소우코스’ 등 전사자 186명(참전비 건립 당시의 통계)의 성명과 戰歿(전몰)일자가 적혀 있다.
  
  
  
  그리스군 참전비는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지나가는 여주 휴게소에 위치했지만 의외로 찾는 이들이 없었다. 휴게소 내 관광안내소에서는 전국 각지 자치단체들의 관광책자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지만 휴게소 내의 현충시설인 이곳에 대한 안내 팜플렛은 없었다.
  
  그리스는 6·25 전쟁 기간 중 851명의 육군 1개 대대, 공군 수송편대를 파견하여 1950년 12월 1일부터 6.25전쟁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리스는 1944년 2차세계대전 終戰(종전)으로 독일로부터 해방된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내란에 휩싸였다. 그리스는 1949년 미국의 지원으로 공산군을 몰아내고 6년 가까운 내전을 종식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한반도에서의 공산남침이 알려지자 그리스 의회는 6월29일 한국전 파병을 결정한다.
  
  지상군은 최초 3500여 명 규모의 여단급 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었으나, 파병 준비를 하던 중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한국전의 사태가 호전됨에 따라 규모가 1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이 대대는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대대는 미군 사단에 배속되어 전방 지역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51년 1월 25일 이천 지역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를 시작으로 각처에서 많은 격전을 치렀다. 총인원 5532명의 군인과 8명의 여성 간호장교들이 참전했다. 313고지 전투, 노리고지 전투, 북정령 전투 등을 치렀으며 휴전 직전까지 용감하게 싸워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다.
  
  그리스 공군은 C-47기 7대로 구성된 제13수송편대를 파병했다. 1950년 12월1일 일본에 도착한 이후 미 제21비행대대와 미 제 6461 수송대대에 배속돼 미 해병사단을 지원했다. 장진호 전투 등의 전 사상자를 후방으로 후송하는 업무를 맡았다.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고토리 비행장을 활주로로 썼는데 강풍과 눈보라가 심해 보급품 공수와 병력 후송에 큰 고생을 했다.
  
  그리스군은 참전기간 중 전사 192명, 부상 543명, 포로 3명(국방부 통계)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군의 주요 전투 전적을 소개한다.
  
  *이천 381高地 전투(1951. 1. 29~30)
  이 전투는 그리스 대대가 美 제1 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중공군 제112사단 제334연대와 치른 전투이며, 그리스 대대가 최초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1951년 1월 25일부터 실시된 반격 작전에서 이천을 점령하고 北上 도중인 1월29일 381고지 일대에서 야간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중공군은 이 대대 정면에서 381고지를 3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그리스 대대는 조명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포병 지원 사격으로 공격 부대를 제압하는 한편, 근접 전투를 전개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381고지를 방어하였다.
  
  *연천 313高地 전투(스카치 고지, 연천 북쪽 15km, 1951. 10. 3~5)
  이 전투는 그리스 대대가 연천 북쪽 313고지에서 중공군 제141사단 및 제140사단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당시 美 제1 기병사단에 배속되어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한 제한적인 공격 작전에 참가하여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313고지를 공격하였다. 이 대대는 10월 3일과 10월 4일의 2회에 걸친 공격에서 돌격 부대가 목표 지역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과 증원 부대의 지원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자 일단 철수한 후, 10월 5일 항공 폭격과 포격의 지원하에 재차 공격을 실시하여 313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전사 28명, 부상 77명의 피해를 입어 그리스군의 한국전 전투중 가장 피린내나는 전투로 기록된다.
  
  *북정령高地 전투(김화 동북쪽 10km, 1953. 7. 20~26)
  이 전투는 그리스 대대가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북정령 남쪽 승암고개의 주 저항선을 방어하고 있던 중 중공군 제130사단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7월 20일 이 곳 주 저항선 방어 임무를 인수한 이후, 중공군이 ‘7·13공세’의 여세를 몰아 휴전을 앞두고 그들의 영역을 넓히려는 의도로 7월 26일까지 계속된 마지막 공세를 끝까지 격퇴하고 7월 27일 휴전을 맞이하였다. 당시 미군 연대장은 휴전을 앞두고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하에 이 전투에 앞서 그 지역으로부터의 철수를 종용하였으나, 그리스 대대는 철수가 미칠 심각한 영향을 고려하여 추가적인 지원화력을 요청하면서 그 방어선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 결과 승암고개가 휴전선 남쪽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19명이 사망, 2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적군인 중공군은 150명이 죽고, 27명이 포로가 되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15, 19: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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