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民, 특히 한국인을 살린 '트루먼 독트린' 이야기
트루먼과 李承晩은 미국과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 중 공산주의에 대하여 가장 확고한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두 나라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보통 幸運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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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21일 애틀리 수상이 이끄는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에 긴급 통보를 했다. 금융위기를 맞아 그리스를 더 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는 3월31일자로 그리스에 파견한 4만5000명의 영국군을 철수하고 모든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영국군이 철수하면 그리스는 共産叛軍에 의하여 赤化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뿐이 아니었다. 소련은 터키를 압박하고 있었다. 黑海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터키 해협(보스프러스와 다다넬스 해협)에 소련군 기지를 설치하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그리스와 터키가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트루먼은 즉시 딘 에치슨 국무차관에게 대책 보고서를 써 올리도록 지시하였다. 사흘 뒤 마셜 국무장관, 에치슨, 트루먼 세 사람은 그리스와 터키를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계속되는 소련의 침략주의에 획을 그어야 한다는 데는 참모들도 동의하였다.
  
  2월27일 트루먼은 의회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 설명회를 가졌다. 마셜 장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소련의 지배력이 유럽, 중동, 아시아로 확대되는 것을 여기서 저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에치슨 차관이 덧붙였다.
  “이러 저리 생각하고 계산할 시간이 없다.”
  의회 지도자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議會에 나가서 긴급성을 호소하면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연설문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측근들은 이 연설이 트루먼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연설이 될 것이란 예감을 共有하였다. 트루먼도 “그리스에 경제지원을 하기로 한다는 것은 미국이 다시 유럽의 정치에 간여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소련의 침략의도에 맞서 유럽과 자유세계를 지키는 책임을 떠안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 및 일본과 싸우는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主敵으로 설정하는 전략상의 일대 변화이기도 하였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역사에 남은 이 연설은 1947년 3월1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18분 동안 이어졌다. 트루먼은 그리스와 터키를 도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세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兩者擇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나는 다수의 뜻에 따르는 체제로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제도, 代議정부, 자유선거, 개인의 자유, 언론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다른 하나는 소수가 다수에 强制한 삶의 양식인 바, 테러와 압제를 동원하여 신문과 라디오를 통제하고 선거를 조작하며 개인적 자유를 탄압한다. 나는 무장된 소수나 외부세력이 자유민들을 복속시키겠다고 달려들 때 이에 저항하는 그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자유민들을 도와서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소련이나 공산주의를 擧名하지 않았다. 그들을 指名하여 설명하지 않고 다수에 대한 소수의 독재를 자행하는 세력으로 일반적인 규정을 함으로써 연설의 보편성과 설득력을 높였다.
  
  뉴스위크는 트루먼의 연설을 ‘만약 말이 국가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이 연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 말대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뒤 신속하게 好戰的인 소련과 대결자세를 굳혀간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서유럽과 미국의 집단안보를 강화하고, 마셜 플랜으로 유럽의 戰後 복구를 돕는다. 2차 대전 때 敵國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민주화하여 경제를 부흥시키면서 이 두 나라가 서방 세계 편에 서도록 유도한다.
  
  트루먼 독트린은 해방 이후 左右대결이 극심하게 전개되던 남한 정세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스탈린은 1945년 북한을 점령한 직후 이곳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도록 지시하는데 남한을 통치하던 미 軍政당국은 소련의 이런 음모를 모른 채 한가하게 놀았다. 그들은 李承晩과 민족진영에 대하여 左右합작에 의한 정부수립을 强勸한다. 공산주의의 본질과 戰略 전술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李 박사는 스탈린과 북한공산정권의 지령을 받는 남한 내 좌익과 합작하는 것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 미 軍政의 건국노선에 반대한다. 하지 미군 사령관과 李承晩이 대치하는 가운데 트루먼이 對蘇 대결정책을 선언함으로써 李承晩의 입지가 강화되고 결국은 하지 사령관이 후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이 서게 되는 것이다.
  
  트루먼과 李承晩은 미국과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 중 공산주의에 대하여 가장 확고한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두 나라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보통 幸運이 아니다.
  
  트루먼 독트린에 의하여 위기를 면한 터키는 韓國戰에 1개 여단을 파견, 유엔군의 일원으로 잘 싸웠다. 그 덕분에 NATO에도 가입하여 소련이 중동과 지중해로 진출하는 길을 막았다.
  
  
  
[ 2010-03-16, 10: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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