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當(당) 40'-'백병전의 터키' 신화를 만들다
터키군 참전비(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산 16번지)를 찾아…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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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 내비게이션에 터키군 참전비의 주소지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산 16번지’를 누르니 ‘고속도로상에 있다’는 안내문이 나왔다. 며칠 전 南阿共(남아공) 참전비를 찾느라 애를 먹은 기억이 있었지만 다시 한번 기계를 믿고 떠났다. 경부고속도로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방향으로 가다 용인 에버랜드 방향 고속도로로 우회전해 3분쯤 달리니 에버랜드 출구가 나왔고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그곳 출구로 나갔다. 요금을 내고 산을 하나 돌아 내려와 7km쯤 가니 다시 유턴을 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유턴을 해 내려왔던 산을 다시 올라가니 아까 나온 출구 반대편 입구(마성 톨게이트)로 안내한다.
  
  차를 세우고 톨게이트의 도로공사 사무실로 가 물어보니 강릉 방면 에버랜드 출구 바로 위쪽 30m 정도의 언덕에 참전비가 있다며 차량 내비게이션이 위치를 찾지 못해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 갓길에 차를 세우고 보니 인도로 건너갈 방법이 없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해 터키 참전비로 뛰어갔다. 때마침 교통경찰 차량이 지나가다 우리 일행을 보고 경고방송을 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방면으로 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하나는 마성터널을 지나는 길, 또 하나는 터널 위를 돌아서 에버랜드쪽 출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다. 두 길은 뒤에 다시 만난다. 터키 참전비를 가려면 에버랜드쪽 출구로 나간 뒤 3km쯤 고속도로를 달리면 에버랜드로 나가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곳으로 나가지 말고 30m쯤 언덕으로 올라가면 참전비가 나온다. 도로변에 10여 대의 차를 주차할 공간도 있다.
  
  터키군 참전비는 문구점에서 파는 커터 모양의 칼처럼 삐죽 솟아있다. 높이는 20m쯤이고 그 중간에 군인 세 명의 전투장면을 조각해 놓았다. 탑 상단에는 터키 국기에 들어있는 초승달과 별이 새겨졌다. 서울대 美大 학장을 지낸 최만린씨의 1974년 작품이다.
  
  
  
  
  碑文(비문)엔 “유엔의 기치를 들고 터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란 글이 쓰여 있다.
  
  
  
  참전비 일대는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다. 3월 초순의 추운 날씨임에도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주위를 들러보고 비문을 읽고 기념촬영도 했다.
  
  
  
  터키는 6·25 전쟁 기간 중 육군 1개 여단을 파견해 한국을 지원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육군을 여단급으로 파견한 나라는 터키와 캐나다뿐이었다. 터키군은 보병 외에 공병·수송·의무·병기·병과부대를 포괄하는 전투단을 구성함으로써 독립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편성을 유지했다. 주요 전투로 군우리 전투, 김량장 전투 등이 있으며 전사 741명, 부상 2068명, 실종 163명, 포로 244명의 피해를 입었다. 휴전 후, 터키 여단은 1개 중대를 제외한 전 부대가 1954년 여름에 철수하였다. 잔류부대인 1개 중대는 1966년 의장대 1개 분대만 남기고 철수하였으며, 의장대는 1971년 6월에 철수하였다.
  
  터키군의 인명손실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이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는 터키군 462명의 屍身(시신)이 묻혀 있다. 1959년 이곳에 터키정부가 戰歿(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놓은 기념비가 있다. 1973년엔 두 나라가 상대방 명칭을 딴 기념공원을 조성키로 합의해 한국 정부가 터키군의 격전지였던 경기 용인시에 터키군 참전비를 건립했고 터키 역시 수도인 앙카라에 한국공원을 조성해 한국전 참전 기념탑을 만들었다.
  
  터키군의 주요전투는 다음과 같다.
  
  *군우리 전투(평양 북쪽 80km, 1950. 11.26~12.1)
  이 전투는 터키 여단이 평안북도 개천군 군우리 부근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당시 청천강 線(선)에서 韓·滿(한·만) 국경선을 향하여 총공세를 펴던 한국군 및 유엔군이 11월 25일 중공군의 공세로 한국군 제2군단 작전지역인 덕천-영원線이 돌파될 위협을 받게 되자, 예비로 있던 터키 여단은 군우리로부터 덕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여단은 진격을 계속하던 중, 중공군의 공세에 부딪쳐 협곡에서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채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터키 여단은 이때(11월 28일)부터 2일간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13km의 협곡을 벗어나 군우리를 거쳐 12월 1일에 평양으로 철수하였다.
   터키 여단은 이 전투에서 총병력의 15%와 105mm곡사포를 포함한 중요장비의 70%를 손실하였다. 특히 장병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착검한 채 적진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이런 투지가 이후 수리산 전투와 김량장 전투에까지 이어져 항상 자신들의 사상자에 비해 敵(적)에게 10배 이상의 사상자를 내게 한 용맹한 군대였다. 어쨌든 이 여단이 군우리-덕천 계곡에서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3일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군우리 서쪽에 있던 유엔군 부대의 철수로가 조기에 차단당하는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김량장 및 151고지 전투(수원 동쪽 20km, 1951. 1. 25~27)
  이 전투는 터키 여단이 중공군 제50군 예하 제149사단 제447연대 및 150사단 제448연대와 치른 전투이다. 터키 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평택-제천線(선)에서 저지하고 재반격 작전을 실시할 때, 안성-송전線(선)에 전개하여 1월 25일부터 김량장(現 경기도 용인시) 및 151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실시하였다. 당시 중공군도 그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결전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터키 여단은 각종 지원화력과 근접 空(공)지원을 요청하여 중공군의 진지를 맹타한 후, 그들이 믿는 神(신)인 ‘알라’를 외치면서 돌격을 실시하여 김량장과 그 서쪽 151고지를 백병전으로 점령하고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병사 1명당 40명의 敵(적)을 무찔러 ‘백병전의 터키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3일간의 전투에서 확인한 중공군의 시체가 474명인데 전사자의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 터키군이 151고지에서 압승한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UPI 기자에 의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 전투는 군우리 전투에서 패배한 터키군의 명예를 회복한 전투였다.
  
  *네바다 前哨戰(전초전·고랑포 서북쪽 10km, 1953. 5. 28)
  이 전투는 터키 여단이 휴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중공군 제120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중공군은 터키 여단이 확보하고 있던 네바다 前哨(전초)를, 1953년 5월 28일 야간에 2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하였다.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여단은 다섯 번이나 베가스 고지를 점령당하였으나 역습으로 다섯 번 다 그곳을 되찾았다. 그러나 네바다 전초 중에서 카슨 전초는 상실하였으며 엘코 전초는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여단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격전을 치렀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사단이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네베다 고지에서의 철수를 승인함에 따라, 여단은 이 전초에서 철수하였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金永勳(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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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00명을 韓國戰에 파병한 터키
  
  
   10년간 여단 규모 유지. 백병전에 능하였고, 軍律이 엄격.
  趙甲濟
  
   터키는 19세기에 '유럽의 病者'로 불렸다. 투르크族이 세운 오스만 터키는 60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大제국을 건설, 운영하면서 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하였다. 터키군은 16, 17세기 두 차례 비엔나를 포위하였고, 지금의 헝가리, 불가리아, 발칸반도를 수백년 동안 지배하였다. 19세기부터는 과학 기술력에서 밀리고 특히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1차 대전 때는 독일과 연합군이 되었다가 敗戰國으로 전락, 제국은 해체되고 공화국으로 再탄생하였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케말 파샤(터키에선 아타투르크라고 부른다)였다. 그는 이슬람圈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본격적 개혁을 성공시켰다. 政敎분리를 핵심으로 하고 여성참정권 인정, 문자개혁을 통하여 근대화의 길을 갔다.
  
   2차 대전 때 터키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위협에 직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이때 6.25 남침 전쟁이 터졌다. 터키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면 나토 가입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터키는 1개 여단, 5450명을 보냈다.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이다. 721명이 戰死, 168명이 실종, 2111명이 부상당하였다. 터키는 휴전 뒤에도 1960년까지 1개 여단을 유지하였다. 근무기한은 1년이었으므로 이 10년간에 약5만5000명의 병사들이 한국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터키를 여행하면 한국인을 戰友라고 반기는 이들이 많은 이유이다. 수도인 앙카라 한복판에 한국전 참전비가 서 있다.
  
   한국戰 파병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터키는 나토에 가입, 냉전 시대에 소련의 남측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터키 군대는 한국전에서 미군, 영국군과 함께 잘 싸운 군대로 꼽힌다. 미군 25 사단에 배속되어 미군 작전통제하에서 전투를 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기습하였을 때 터키 군대는 군우리 부근에서 후퇴하는 유엔군을 엄호하였다. 터키 여단은 1.4 후퇴 때 김포를 방어하고 반격 때는 안성-용인 지역을 수복하고 중공군과는 백병전을 자주 벌이는 등 휴전 직전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 오스만 터키 帝國 군대의 전통을 실증하였다.
  
   터키 군대는 軍律이 매우 엄격하였다. 포로가 된 터키 군인들은 장교와 사병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공산군의 세뇌, 분열공작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생존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파병을 결정할 때 터키 수상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결단하였다. 터키는 19세기 이후 지는 전쟁에만 참여하였는데, 한국전에서 善戰한 것이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참전비
  
   위치 용인군 성면 동백리
   건립일자 1974. 9. 6
  
   건립취지문
  
   터키는 1950년 10월17일 1개 보병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여단은 참전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苦戰하였으나 금양장리 전투와 장승천 전투, 네바다 전투에서 善戰하였습니다. 국방부는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산화한 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 2010-03-16, 13: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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