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장 ‘몽클라르 장군’과 의무대장 줄 장루이 소령
-프랑스 참전비(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2)를 찾아 “2차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전쟁의 베테랑들이 주로 참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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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참전비는 경기도 수원시와 의왕시를 가르는 1번 국도상인 遲遲臺(지지대) 고개 정상에 위치해 있다. 조선 21대 正祖(정조)가 재임중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올 때마다 이 고갯마루에 서서 아버지의 묘소를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시간을 지체했다 하여 遲遲臺(지지대)란 이름이 붙었다. 고개 정상에 비석도 하나 세워졌고 수원 시내방향 7부 능선에는 ‘지지대고개 휴게소’란 이름의 쉼터도 있어 운전자들이 쉬어갈 수 있다.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는 1951년 11월29일 부산을 거쳐 派韓(파한)된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숙영지를 건설한 곳이 수원이라는 이유로 이곳에 세워졌다. 참전비 주변은 효행공원으로 불리고 인근 광교산 등산의 진입로이기도 하다.
  
  
  
  기자는 최근 프랑스군 참전비를 두 번 다녀왔다. 첫 방문은 3월 첫 일요일인 7일 오후였다. 첫 인상은 왜 이런 모양의 참전비인지 의아스러웠다. 커다란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놓은 듯한 기념물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탑도 없고 용감한 병사들의 조각도 없는 참전비였다. 게다가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었다. 할수없이 잔디가 심어진 언덕을 올라가 주전자로 치면 주둥이 부분을 밟아가며 50m 정도의 둘레를 돌아보았다.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프랑스군이 언제 한국에 도착해 어떻게 싸우다 귀환했는지 작은 글씨로 벽 둘레에 새겼고 뒷벽 흰 판에 사망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전부였다. 물빠진 수영장처럼 텅빈 바닥은 곳곳에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내 상상력과 아마추어용 카메라로는 이 참전비의 전경을 한 장에 담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뒤 며칠간 프랑스군의 한국전 참전 자료를 찾아보니 그 주전자 내부같이 보인 곳이 죽은 이들이 永眠(영면)하는 곳임을 알게 됐다. 참전 프랑스군의 부대편성에서 참전과정, 몇몇의 전투는 감동적이었다. 3월 중순 사진기자와 다시 한번 찾았지만 사진 전문가도 한 컷으로 이 기념탑을 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이 조형물이 아닐까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참전비 입구의 동판에 새긴 글씨를 읽어보았다.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바친 262명의 고귀한 이름 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 있으리라.”
  
  조형물 앞의 돌판에 참전비 건립 배경을 써놓았다. 1974년 우리 국방부가 건립한 추모비를 2001년 한국과 프랑스 문화를 접목한 추모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했다는 말인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접목시킨 것인지, 작가는 누구인지 아무 정보도 없다.
  
  프랑스는 6·25전쟁에 지상군과 해군을 파견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그들의 극동 함대 소속 구축함 1척을 1950년 7월 28일 한국 해역에 진출시켜 美극동 해군사령부의 작전 통제하에서 해상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프랑스 지상군은 한국전 파병을 위해 '유엔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 대대'(약칭, 프랑스 대대)가 새로이 편성되어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대대 제1중대는 주로 해병대 출신이었으며, 제2중대는 대부분 수도 방위 보병 부대 출신이었고, 제3중대는 낙하산병과 외인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중대별로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 대대는 약 2주간의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후, 12월 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다. 그해 7월 22일 유엔군 참여는 결정했지만 국내외 사정으로 10여명의 고위급 장교를 포함한 시찰단만을 구성했다. 기존부대를 파병할 여력은 없고 國力(국력)에 걸맞는 지원을 안하기도 어려워 고민하던 중 현역과 예비역을 망라해 지원병들로 특별부대를 만들어 파병하는 방안을 찾았다.
  
  프랑스군의 지휘관인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2차세계대전 당시 자유프랑스군의 장군으로 종군했고 終戰(종전) 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중령계급으로 현역복귀를 신청했고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유엔군사령부와 美8군 장병들은 그를 ‘몽클라르 장군’으로 불렀다. 프랑스군의 현역과 예비역 비율은 장교가 5:5, 부사관은 7:3, 사병은 1:9였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2차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이미 병역 의무를 수행한 베테랑이었다.
  
  
  
  “길은 피난민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서울 북쪽 한강에 도착했을 때 팔다리가 잘리고 새끼줄로 손이 묶인 채 총살당한 수백 구의 시체가 백 사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프랑스군 참전사(2004년)’ 에 실린 프랑스 군인(브뒤)의 수기 내용이다. 또다른 프랑스 군인(롤랑)의 수기에는 이런 장면이 보인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나는 내 곁에 길게 뻗어 있는 두 형체를 발견했다. 나는 ‘중대장님, 들어 보십시오. 아직 전투가…’라고 하면서 중대장을 흔들었다. 순간 내 손은 피범벅이 됐다. 중대장의 왼쪽에 있는 사람도 역시 죽어 있었다. 그의 머리는 떨어져 나가 등 뒤에 얹혀 있었다.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우리 소대의 방어구역 한 가운데로 적이 침투해 두 명의 보초를 살해했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병이었다.…적중에는 인간폭탄, 즉 전차에 몸을 던져 함께 폭파되는 자살 척탄병도 있었다.”(특무상사 킬레)
  
  
  
  프랑스군은 참전 32개월 동안 모두 3개 대대 약 8200여 명이 교대 참전하여 전사 280명, 부상 1350명, 실종 19명으로 16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냈는데, 참전 규모로 볼 때 全병력의 5분의 1 정도가 당한 셈이다. 그들은 백병전으로 원주 탈환에 전과를 올렸고, 지평리 전투,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의 격전에서 용맹을 떨쳐, 프랑스 국가 표창 6회, 미국 대통령 표창 3회, 한국 대통령 표창 2회 및 많은 훈장과 개인 표창을 받았다. 주요 戰歷(전력)은 다음과 같다.
  
  *원주 쌍터널 부근 전투(원주 서북쪽 25km, 1951. 1.31~2.2)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원주-양평 간 중앙선 철로상의 쌍터널 부근에서 중공군 제125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시 미 제23연대의 제1대대 및 제2대대 정찰대가 원주로부터 지평리로 정찰을 실시하던 중, 그 중간에 있는 쌍터널 부근에서 공산군의 공격에 포위를 당하게 되자,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함께 이 공산군을 격멸하고 정찰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1월 31일 교전지점으로 진출하였다. 프랑스 대대는 미군 대대와 협조하여 쌍터널 부근으로 진출하였으나 공산군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으므로 접촉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찰대를 구출한 뒤 야간전투에 대비하여 그곳에서 四周(사주)방어를 실시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중공군 제125사단 예하 2개 연대가 그곳을 공격하였다. 프랑스 대대는 이 전투에서 1개 중대진지가 돌파되고 대대본부까지도 위협을 받는 위기에 처하였으나, 선전분투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프랑스 대대는 이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많은 인명의 손실을 입혔으며 유엔군 공격제대의 진로를 개척하였다.
  
  *지평리 전투(경기도 양평 1951.2.13~15)
  이 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 당시에 프랑스 대대가 美제2사단 제23연대로 배속되어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 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대대는 연대와 더불어 쌍터널 전투를 마치고 2월3일 지평리로 이동한 후 지평리를 중심으로 편성된 前面(전면)방어진지의 서쪽을 방어하였다. 2월11일, 美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철수를 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斜面(사면) 포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형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진지고수 명령을 받게 된 美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철수를 하지 않고 고립된 상태에서 4일간에 걸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중공군은 2월16일 후방으로부터 美 제5기병연대가 지평리에 도착하자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제대로 된 勝戰(승전)을 거둔 전투였다.
   지평리 전투의 승인은 프랑스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의 탁월한 지휘와 전투경험이 많은 지원병들의 용기 덕이었다. 중공군이 진지 내로 들어와 근접전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용감하게 맞섰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겁먹은 중공군이 달아났다고 한다.
   국방부는 1957년 7월15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 전적비를 세워 미군과 프랑스 장병들의 헌신을 기렸다.
  
  *斷腸(단장)의 능선 전투(강원도 양구 북쪽 22km, 1951.9.13~10.13)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양구군 동면 사태리 일대에서 美제23연대, 네덜란드 대대와 함께 북한군(제6·12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개최되고 있었으나 공산군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측이 공산군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전투이다. 프랑스 대대는 사단의 지원하에 美제23연대와 함께 9월 13일부터 929고지(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0월5일부터는 사단의 全(전)부대가 투입되어 이 목표를 점령하였다. 이때, 단장의 능선 서쪽 문등리 계곡에서는 미 제38연대가 제72전차대대와 공격하였고,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능선의 동쪽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병·전차 합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제9연대는 문등리 계곡 서쪽에서 병행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프랑스 대대는 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렀으며 공산군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 9일 후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이 전투기간중 연합통신의 종군기자 스탠 카터가 美2사단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한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기자는 전투상황을 보도하면서 ‘斷腸(단장)의 능선’(Heart Break Ridge Line)이라고 보도하면서 929고지 일대가 단장의 능선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됐다.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 10. 6~10)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철원 서북방 281고지를 방어 중 중공군 제113사단 제338연대와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0월6일부터 10월9일까지 매일 야간에 대대·중대 규모의 부대를 파상적으로 투입하여 281고지를 공격하였으나, 프랑스 대대는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근접전투를 벌이며 진지를 고수하였다. 같은 기간에 우측 백마고지에서도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대는 많은 인명의 손실을 입으면서 이 고지를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의 의지를 꺾을 수 있었으며, 우측의 백마고지 방어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줄 장루이 소령 기념 동상(홍천군 두촌면 장남1리)
  줄 장루이 소령은 프랑스군 의무대장으로 참전하여 1951년 5월 8일 이곳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전투에서 한국군 부상병 두 명을 구출하고 자신은 지뢰를 밟아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사망했다. 한·불수교 100주년을 맞은 2008년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길이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강원도지사의 지원을 받아 그의 戰死地(전사지)에 동상을 건립했다.
  
  휴전 후, 프랑스군은 1953년 10월 23일부터 11월 6일간에 소규모 잔류부대만을 남긴 채 대부분의 부대가 철수하였다. 잔류부대는 1964년 6월에 철수하였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17, 16: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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