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을 읽으면 政治가 멋있게 보인다!
그는 정치가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성격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輕薄(경박)하였으며 결단에 따른 모든 책임을 스스로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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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결단으로 한국인을 살려준 트루먼 傳記를 읽어보면 링컨 傳記를 읽는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이 다 농촌 출신이고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으며 바닥부터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열등감이 없었으며 누구보다도 깊은 교양과 유머감각을 지녔다. 차이는 트루먼이 항상 쾌활 명랑 당당하였던 데 비하여 링컨은 고뇌에 찬, 과묵한 冥想型(명상형)이었다는 점이다. 트루먼은 南北전쟁 때 南軍으로 참전한 집안 출신이라 어릴 때는 링컨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트루먼 傳記를 읽으면 정치가 이처럼 멋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 자신이 정치가의 역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맥아더처럼 쇼맨십이 강한 사람을 생래적으로 싫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한국전의 방향을 놓고 갈등하다가 抗命한 맥아더 원수를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 데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맥아더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한 것이지 그가 바보 같은 자식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실은 맥아더는 그런 자였지만 바보스럽다는 것을 가지고 장군들을 처벌할 순 없다. 만약 그런 法이 있다면 절반에서 4분의 3 가량의 장군들은 감옥에 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는 성격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輕薄(경박)하였으며 결단에 따른 모든 책임을 스스로 졌다. 그는 歌手인 자신의 외동딸 마가렛이 워싱턴에서 공연한 다음 날 아침 워싱턴 포스트를 읽다가 음악 전문기자가 酷評을 한 데 화가 났다. 앉은 자리에서 백악관 편지용지에 몇 자 갈려 쓴 뒤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기자에게 전달된 편지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욕설이었다.
   ‘궤양 덩어리 같은 놈’ ‘다음에 만날 때는 코뼈를 부러뜨려 줄 터이니 새 코를 준비하고, 눈에 멍이 들 것이니 비프스테이크를 준비하라. 그리고 팔을 분질러 놓을 것이니 깁스할 준비도 하라’
  
   이런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은 기자는 자신의 신문엔 쓰지 않고 다른 기자에게 주어 공개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한국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공세로 미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 여론은 “우리 자식들은 戰線에서 죽어 가는데 당신 딸만 소중하냐”고 격분하였다. 트루먼의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다. 트루먼은 “나는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로서 그렇게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트루먼은 정치판에서도 욕을 먹어가면서 인간적 義理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1차 대전 때 포병장교로 참전하고 돌아와 결혼한 뒤 地域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미조리주 캔사스 시티의 정치는 톰 펜더가스트라는 민주당의 토착 보스가 좌지우지하였다. 이 사람이 트루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區의원에서 시작, 상원의원이 되도록 하였다.
   1922년 트루먼은 잭슨구 의회의 부의장에 뽑혔고, 4년 뒤엔 의장, 1933년 대공황중엔 미조리주의 재고용 담당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정치 후원자인 펜더가스트는 측근들이 출마를 꺼리자 할 수 없이 트루먼을 연방 상원 의원 후보로 밀었다. 상원의원에 당선된 트루먼은 워싱턴 정치판에서 苦戰하였다. 지방 土豪의 비호를 받아 상원의원이 되었다는 인상이 강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트루먼을 무시하였다. 트루먼이 백악관의 비서한테 전화를 해도 잘 받아주질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를 밀어주었던 펜더가스트가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갔다. 그래도 트루먼은 그에 대한 인간적 義理를 끊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꾼들은 1940년 선거에선 트루먼의 再選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트루먼은 이 선거에서 오랫동안 다져놓았던 조직 표를 딛고 逆轉勝하였다. 그는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逆轉勝하였다. 그야말로 不倒翁(부도옹)이고 싸움닭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가자 트루먼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독일이 이기려 하면 우리는 소련을 지원해야 한다. 만약 소련이 이길 것 같으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하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많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나는 히틀러가 勝者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히틀러나 소련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당시 민주당엔 좌파가 많아 소련에 동정적인 여론이 강하였지만 트루먼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反인륜적이란 점에서 같은 狂信徒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신념이 그로 하여금 과감한 反蘇정책과 6.25 참전 결단을 내리게 하였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미국이 거대한 군수공장으로 변하자 트루먼은 상원에 군수산업의 예산 낭비 사례 조사위원회를 설치, 그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트루먼 위원회’라고 불린 이 조직의 활동으로 150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트루먼은 타임지의 표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민주당 소속인 트루먼은 공화당 의원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는 밝은 인간성으로 하여 라이벌은 있지만 敵이 없는 사람이었다. 1944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측근들은 대통령이 그해 선거에서 4選에 성공하더라도 1년을 더 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부통령이던 헨리 월레스는 공산주의자와 가까운 좌파였다. 측근들이, 루스벨트가 죽었을 때 親共주의자가 대통령 자리를 承繼하는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통령 후보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선택당한 이가 트루먼이었다. 트루먼은 부통령 후보로 나설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사의 손이 운명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한국인을 위해서도.
  
  
  
  
  
[ 2010-03-29, 16: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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