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0만의 룩셈부르크, 1개 소대 파병
벨기에·룩셈부르크군 참전비(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리 130)를 찾아. 소요산 전철역 앞에 위치…인근 ‘자유수호평화박물관’도 볼거리.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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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1호선의 종점인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역에서 하차해 역을 나와 소요산 방면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30m 앞에 동두천 소망교회 간판이 보인다. 그 바로 뒤편 언덕으로 30계단을 오르면 벨기에·룩셈부르크군 참전비가 나온다. 차를 가져올 경우 교회 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소요산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참전비는 基壇(기단)이 1.5m, 碑(비)의 높이는 20m, 콘크리트 기둥 세 개를 하단으로부터 상층으로 모여드는 형태로 만들었다. 중앙에서 보면 전투기 모양의 이 흰색 기념탑이 날렵하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양이다. 왼쪽 측면에서 보면 삼각면이 보이고 우측 방면에서 보면 또다른 삼각면이 나온다.
  
  
  
  좌측은 룩셈부르크軍을, 우측은 벨기에軍의 참전을 의미하는 공간으로 구분했다. 1975년 9월25일 국방부에서 건립했다. 한국조각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지낸 崔起源(최기원) 홍익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참전비가 있는 境域(경역)은 2000평 규모로 조경이 잘되어 있다. 소요산을 등반하는 관광객들이 오가면서 많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참전비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엔 6·25남침전쟁 및 유엔참전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있어 年中(연중)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벨기에·룩셈부르크군 참전비의 碑文(비문)은 간결하다.
  
  
  
  '자유와 평화의 신념으로 공산군들과 싸우더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용사들! 고귀한 피를 흘린 448명의 전사상자들의 이름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계실것이요!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며 여기에 비를 세운다.'
  
  
  이곳엔 벨기에·룩셈부르크軍과 함께 싸웠던 한국의 戰友(전우)들이 2000년에 세운 동판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싸웠으나 살아남아 이 땅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한국 전우들이 오늘 여기 모여 전사한 옛 전우들의 명복을 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6·25전쟁에 지상군을 파견하였다. 이들 나라는 1950년 7월22일에 양국이 통합된 1개 보병 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벨기에는 8월25일부터 지원병을 모집하여 1개 대대를 편성하였고, 룩셈부르크는 1개 소대를 편성하여 10월1일 벨기에 대대 A중대에 편입시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를 구성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유엔 참전국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았던 미니 부대였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리 유엔 사무총장과 美국무부에 “참전을 희망하는 국가는 작전에 기여할 수 잇는 정도로 최소 1000명은 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었다. 이 최소기준에서 예외가 된 국가가 룩셈부르크였다. 인구 20만인 룩셈부르크는 많은 병력을 파견할 수 없어 인접국인 벨기에와 협력, 벨기에에 1개 소대병력을 포함해 참전하는 방식으로 참전을 제안했고 이 의사가 받아들여져 48명의 소대가 참전하게 된 것이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1년 1월3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대대는 1951년 2월 11일부터 3월5일까지 대구-김천 간의 병참선 경계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3월6일 수원으로 이동하여 제3사단에 배속된 후 한강 선으로 진출하면서 전방 작전에 참가하였다. 주요 전투는 전곡 지역의 금굴산 전투, 학당리 388고지 전투 등이다. 주요 전투를 소개한다.
  
  *금굴산 전투(경기도 연천군 전곡 서쪽, 1951. 4. 22~25)
  이 전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 기간 중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美제3사단의 英연방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북쪽의 금굴산을 방어하고 있던 중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중공군에 점령당할 경우에는 전곡-연천-철원 축선의 도로가 차단되어 그 축선상으로 철수하는 부대가 포위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대대장 크레하이 중령과 대대원들은 오른쪽 인접부대들이 전곡 방향으로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이틀간 금굴산 진지를 고수한 뒤 도감포 교량을 통해 美제65연대 지역인 전곡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美대통령, 美8군사령관, 벨기에 국방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학당리 전투(388고지, 1951. 10. 11~13)
  이 전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중공군 제78사단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당시 대대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철원과 평강 사이의 학당리 388고지에서 연대의 前哨(전초) 임무를 수행하던 중 10월11일 야간에 실시된 2차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12일 야간에는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격퇴하였다.
  
  *김화 잣골 전투(1953. 2. 26~4. 21)
  이 전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美제3사단에 배속되어 김화 서북쪽 5km 지점인 잣골에서 주 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중, 중공군 제70사단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기간중, 이 대대는 수차에 걸친 전초 진지와 주 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김화 북방을 방어하였다. 이 기간중 4월18일과 19일에는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주 저항선과 전초 진지를 동시에 공격하였으나, 이 대대는 사단 및 군단 포병의 지원하에 이를 격퇴하였다.
  
  휴전 후,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5년 6월에 철수하였다. 벨기에군은 참전기간중 104명이 전사했고 부상 336명, 포로 1명의 피해를, 룩셈부르크군은 참전기간 중 전사 2명, 부상 15명의 피해를 입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30, 13: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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