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간의 激戰(격전)… 622명중 39명만 살아돌아오다
영국군 전적비(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산 1)와 英연방 참전비(경기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365-1를 찾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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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1번국도인 통일로를 타고 문산까지 간 뒤 법원리 방향 364번 국도로 17km를 가면 효촌삼거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해 5km 가면 매곡삼거리, 감악산 방면으로 1.7km를 더 가면 오른편에 영국군 戰跡碑(전적비)가 나온다. 의정부를 경유해 갈 경우 동두천 방면 평화로를 타고 10km쯤 가면 덕정 4거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해 4km쯤 가면 은현1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감악산로 남면 방면 좌측도로로 10km쯤 가면 영국군 전적비가 나온다.
  
  
  
  도로변 안내문엔 ‘영국군 전적비(1951.4.22~4.25)’란 제목 밑에 ‘글로스타샤 연대 제1대대 제 170 독립 박격포대 C포대 전적비’란 내용이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 있다. 참전기념비가 아니고 전투를 기념하는 장소란 뜻이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별로 눈에 띄는 조형물이 없다. 유엔기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태극기와 영국기가 펄럭이는넓은 광장이 나왔다. 1968년 한국군 8022 공병부대가 ‘설마리 영국군 전투비’ 공원을 조성했다는 작은 표석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우측 계곡을 보니 아치 모양 두 개를 연달아 붙여놓은 형태의 25m 길이의 흰색 교량이 나왔다. 교각에 쓰여진 안내문을 보니 파주시청에서 2000년에 건립한 글로스타샤橋(교)였다.
  
  다리를 건너 50m쯤 왼쪽으로 가니 계단이 나왔고 1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작은 비석이 하나 놓여있고 그 앞 절벽에 돌을 붙인 듯한 벽이 보였고 그 벽에 글과 그림이 그려진 네 개의 돌판이 박혀있었다. 멀리서 보면 산 속의 약수터 같은 곳으로 보였는데 그곳이 영국군 전적비가 있는 곳이었다. 비석은 한글로 적혀있었고 아래에 영문으로도 적혀있었다.
  
  
  
  
  
  ‘이 기념비는 한국정부의 자혜스러운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글로스타샤 연대 제1대대는 이 기념비가 또한 그들에 못지않게 자유를 사랑하고 그들과 또다른 영국연방군에 종군중 산화한 용맹스러운 한국인을 추모하리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첨성대의 벽 같은 곳에 붙인 네 돌판중 위의 두 곳엔 유엔 기와 그로스터셔 연대의 旗(기)가 그려져 잇다. 그 아래 돌판 두 곳엔 한글과 영문 설명이 조각돼 있다.
  
  ‘설마리 전투
  一九五一年 四月 二二日~二五日
  글로스터 언덕 위에 세운 이 기념비는 다음 양 부대의 영웅적인 공적을 찬양하여 기리 기념키 위함이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
  영 포병 제-七0 경박격포대 C소대‘
  
  1957년에 만든 비석이라서인지 지금과는 다른 표기법을 보여준다. 1951년 4월의 나흘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전적비 앞 안내판 내용의 일부를 옮긴다.
  
  ‘1951년 4월22일 따뜻한 봄날씨. 이날 임진강 격전은 시작되었다. 대대는 10배의 적군과 싸우다 설마리 계곡으로 후퇴해, 기념비가 솟은 고지 위에서 적군에 포위되었다. 4월25일 적의 포위를 뚫고 67명이 탈출에 성공했고 59명이 전사했다. 526명은 포로로 잡혀 3년간 수용소에서 지냈고 이들중엔 부상병 180명도 포함됐다. 이중 34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이 격전에서 글로스터 연대는 2명이 최고무공훈장을 받았고 장병들의 희생은 세계 전사에 빛나고 있다. 이들의 격전은 당시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유엔군의 재편성을 가능케 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했다.’
  
  글로스터셔 부대원이었던 한 장병의 회고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선 설마리 전투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전투는 병기도 기술도 전략도 아무 소용없는 소모전이었다. 끝없이 격퇴했지만 적의 병력은 계속 늘었고 오히려 더 많이 보충되어 공격해왔다.”
  
  설마리 전투로 영국 제29여단은 전 병력의 3분의 1을 잃었으며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이 겪었던 가장 치열한 전투로 남았다. 4일간의 격전 끝에 622명중 39명만 살아돌아올 정도의 치열했던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투였다. 어찌 보면 영국군이 참패한 곳일 수도 있는 이곳을 영국인들은 ‘글로스터 밸리(Gloster Valley)’라고 부르며 지금껏 돌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앤드루 왕자가 이곳을 찾았고 이곳 묘역을 돌보는 적성면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해마다 4월 22일엔 이곳에서 兩國(양국) 인사들이 참가해 합동 추모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영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전투 부대를 한국에 파병한 국가이며,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지상군과 해군을 파견하였다. 영국은 1950년 6월29일에 영국 극동 해군의 일부 함정을 대한 해역으로 전개시켜 참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지상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참전하였다.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 1척·순양함 1척·구축함 3척·프리킷함 2척·보조선 1척·병원선 1척·보조근무선 8척 등으로 소형 함대를 구성하여 美극동 해군 사령관/제7함대 사령관의 작전 통제하에 주로 서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영국이 전쟁기간 중 한국에 파병한 지상군은 2개 여단(증강) 규모였다. 이중, 제27여단은 1950년 8월28일 부산에 도착하여 낙동강 방어 작전에 참전하였으며, 제29여단은 1950년 11월 18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최초 미국 군단 및 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951년 7월28일 이후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英연방 국가(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의 부대와 연합하여 英연방 제1사단을 구성하고 사단 단위로 작전을 실시하였다. 영연방 제1사단은 미군 사단을 제외하고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사단이었다. 이외에, 1950년 9월 초부터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 해군 해병 1개 특공대가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지상군의 총병력은 1만4198명이었다.
  
  
  
  서울에서 경춘국도를 타고 춘천 방향으로 가다 가평읍에서 좌회전해 200m쯤 가면 가평읍사무소가 나온다. 읍사무소 앞 840여 평 공원에 英연방 참전기념비가 있다.
  
  
  
  
  기단 높이 1m, 비석 높이 12m의 이 참전비엔 ‘세계 평화와 자유수호를 위해 한국전쟁 중 이 땅에 공헌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의 영웅적인 용사들에게 바친다.’는 내용의 碑文(비문)이 적혀있다. 비문 위엔 직사각형 크기의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국기가 새겨졌다. 참전비는 대형 직사각형 모양으로 大英(대영)제국의 거대함을 뜻하고 사각형의 碑身(비신)은 정의의 십자군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참전비 뒷면엔 한국전쟁 당시 영연방국가 군인들의 인명피해 상황(‘오스트레일리아 전사 311, 부상 1230’ 등 네 나라 장병들의 피해상황을 동판에 새겼다. 그 옆엔 1951년 4월24~25일 사이에 가평전투 당시의 영연방국 군부대의 주둔지와 전투상황을 약도로 그려놓았다. 이 참전비는 영연방군의 격전지 중 한 곳인 가평지구 전투를 기념해 1967년 가평군민과 유엔 한국참전국협회가 건립했다. 해마다 4월 마지막 주일에 이곳에서 기념식을 갖는다고 한다.
  
  
  
  1951년 4월22일 중공군은 가평계곡으로 쳐들어왔고 英연방 27여단이 이들을 막기 위해 계곡에 배치됐다. 영국군은 미들섹스연대 휘하의 대대들, 왕립호주연대, 캐나다 輕(경)보병대, 뉴질랜드 16야전포병대가 방어를 맡아 3일간 중공군을 막아내 가평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평읍내에 이 기념물을 세운 것이다. 가평군에서는 매년 4월 말에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英연방국들의 駐韓(주한) 대사들이 새로 부임하면 이곳을 찾아 추모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영국군의 주요 戰績(전적)을 소개한다.
  
  *정주 전투(1950. 10. 29~30)
  이 전투는 英國軍 제27여단이 韓·滿(한만) 국경선을 향한 유엔군의 北進(북진)시 평안북도 정주에서 퇴각하는 북한군(T-34 전차로 증강)과 치른 전투이다. 이 여단은 평양을 점령한 후 美제24사단에 배속되어 유엔군 선두 부대로 북진 작전에 참가하여 청천강을 도하하였으며, 정주에서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정주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美제24사단은 정주에서부터 정거동까지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박천 전투(1950. 11. 4~6)
  이 전투는 영국군이 중공군과 치른 최초의 전투이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여 10월 25일부터 대공세를 취하자 정주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 중이던 英제27여단은 박천으로 이동하여, 유엔군(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으며, 그후 박천 동쪽에서 철수 부대를 뒤따르던 중공군과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27여단은 그들을 지원하던 포병 대대의 진지가 중공군에 점령되고 청천강으로 이르는 철수로가 차단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역습으로 이를 격퇴하고 박천 지구를 계속 확보하였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제1차 공세시 유엔군이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 전투이다.
  
  *고양 전투(의정부 서북방 10Km, 1951. 1. 2~3)
  이 전투는 제29여단이 중공군의 新正(신정) 공세시(3차 공세) 중공군과 치른 방어 전투이다. 이 여단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중 중공군의 공세로 인하여 38도선까지 후퇴하여 그곳에서 방어선을 편성할 당시, 美제1군단의 예비로 고양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여단은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신정 공세가 시작되자, 전방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어, 철수 부대에 뒤따라 접근하는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 제29여단은 중공군과 수차에 걸친 근접전 등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그곳 방어선을 만 24시간 동안 지탱함으로써 유엔군 전방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가평 전투(1951. 4. 23~25)
  이 전투는 제27여단이 가평 북쪽 7km 지점에 위치한 죽둔리에서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 시(1951. 4. 22~30) 중공군과 치른 방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英연방 제 27여단은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맞아 전방 지역인 사창리에서 후퇴하는 한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들을 뒤따라 가평으로 진출하여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을 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3일간에 치른 격전에서 이 여단은 많은 인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앞서 치른 적성 설마리 전투에서와 같이 중공군의 주력이 이 여단 정면으로 부딪힌 전투로서, 영국군이 이를 지연 또는 저지함으로써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좌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휴전 후, 영국 해군은 1955년 3월에 철수를 완료하고, 지상군은 1954~1957년 사이에 철수하였다. 영국군은 참전기간 중 전사 1078명, 부상 2674명, 실종 179명, 포로 977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31, 16: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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