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傷者(사상자) 1555명…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피해
오스트레일리아軍 전투기념비(경기 가평군 북면 목동리 691-1)를 찾아 “2009년 시드니에 한국전 참전비 제작 지원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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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춘천방면 46번 국도로 가평읍까지 간 뒤 좌회전해 읍내거리를 통과하면 北面(북면) 방향 391번 국도와 만난다. 이곳에서 9km쯤 東北進(동북진)하면 목동 삼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우회전해 1.5km쯤 가면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뉴질랜드군 전투기념비가 함께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내리막 7부능선쯤에 있는 이 공원엔 10여 대 이상 주차공간도 있다. 갈림길마다 ‘호주·뉴질랜드 전투기념비’ 푯말이 있고 길이 거의 외길이라 찾아가기 쉽다.
  
  한국전 당시 호주 보병 3대대가 중공군을 맞아 이곳에서(1951. 4. 24) 치열한 전투를 개시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3년 4월24일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기념비를 건립했고, 1983년 12월27일 가평군에서 재건립하였다고 한다.
  
  
  
   基壇(기단) 0.82m, 碑(비) 높이 4.6m로 십자가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기념비 상단 직사각형의 초록 동판엔 ‘현판 보수중 주한호주대사관’이란 글이 쓰여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캥거루 두 마리가 들어있는 紋樣(문양)이 있던 자리다.
  
  
  
  기념비 중앙 하단에 ‘자유와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공헌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길이 역사 속에 보전하기 위하여, 이곳 옛 격전지에 이 기념비를 세우다’란 내용의 碑文(비문)이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이 일어나자 호주 의회는 만장일치로 1개 대대 병력의 派兵(파병)을 승인햇다. 2차세계대전 때 태평양에서 미군과 연합작전을 벌인 경험도 있었고 유럽에서도 전투경험이 많던 군대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하였다. 이 나라는 1950년 7월 1일에 해·공군을 우선 파견하였으며, 지상군은 9월 27일에 파견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전쟁 발발 6일째인 7월 1일 당시 英연방 극동 함대에 소속되어 홍콩에 머물고 있던 프리킷함 2척이 한국 해역에 도착하여 美극동 해군 사령부 통제하에 작전 임무를 개시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항공모함 1척·구축함 2척·프리킷함 1척 수준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해상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延(연) 참전 함정수는 항공모함 1척·구축함 4척·프리킷함 4척 등 모두 9척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당시 英연방 점령군의 일원으로 일본에 주둔 중이던 제77전투 비행 대대가 美제5공군의 작전 통제하에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그후 1개 수송기 편대가 추가로 참전하였다. 지상군은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1950년 9월27일 부산에 도착하여 영국군 제27여단에 배속되어 지상 작전을 수행하였다.
  
  1952년 4월 9일에는 본국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제1대대’가 부산에 도착한 후 영연방 제1사단 제28여단에 배속되었으며, 이 대대는 1953년 3월21일에 새로이 파견된 ‘오스트레일리아 제2대대’와 교대하고 복귀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지상군은 최초에 1개 대대가 참전하였으며, 1952년 4월 이후에 2개 대대 병력이 참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延인원 8407명이 참전하여 전사 339명, 부상 1216명, 실종 3명, 포로 26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상 가장 큰 숫자의 사상자 기록이기도 하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주요 전투를 소개한다.
  
  
  
  *평남 평원군 영유리 전투(평양 북방 40km, 1950. 10. 22)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英제27여단의 일부로 영유리 부근에서 북한군 제239연대를 격파하고, 숙천에 공수낙하한 美제187 공수연대와 연결 작전을 이룬 전투이다. 이 대대는 美제1군단이 평양을 점령한 후 美제24사단에 배속되어 신안주-정주로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이때 평양 점령에 때를 맞추어 숙천과 순천 지역에 공수 작전을 전개하였다. 美 제187 공수연대가 영유리-어파리에 배치된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황이 위급하게 되자, 이를 구출하기 위한 임무를 받게 되었다. 이 대대는 英제27여단의 일부로서 영유리에 도착하여 전차 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 방어 진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공수 연대와 연결을 이루었으며, 대대는 이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획득한 반면 희생자는 극소수였다. 이 대대는 그 후 영국군 여단과 더불어 계획된 北進(북진)을 실시하였다.
  
  *평북 박천 전투(1950. 11. 4~6)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한국전에 참전한 이후 중공군과 최초로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유엔군의 총 공격 계획에 따라 英연방 제27여단의 일부로서 1950년 10월 30일 청천강 북방인 평북 정주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세로 박천까지 후퇴한 후 그곳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할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이 대대는 11월 5일 중공군이 英연방 제27여단의 박천 후방에 위치한 지원 포대 지역을 점령하고 박천-신안주 간의 병참선을 차단하자, 지원 포대의 구출 명령을 받고 이에 대한 공격 작전을 개시하여 포대 지역을 회복하고 병참선을 다시 확보하였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제1차 공세시 유엔군이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 전투이다.
  
  *경기 가평ㆍ죽둔리 전투(1951. 4. 23~25)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英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되어 가평 7km 북쪽 죽둔리에서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맞아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 27여단은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맞아 전방지역인 사창리에서 후퇴하는 한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들을 뒤따라 가평으로 진출하여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을 저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좌절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마량산 전투(1951. 10. 3~8)
  이 전투는 휴전 회담이 개시되고 휴전선의 설정이 논의되고 있을 무렵, 유엔군 측에서 휴전선이 설정되기 전에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할 목적으로 실시한 코맨도 작전 기간 중,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경기도 연천군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의 마량산을 공격·점령한 작전이었다. 이 대대는 3일간 계속된 공격 작전에서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차례로 격파하고 마량산을 점령하였다. 코맨도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은 철원-연천-서울에 이르는 도로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 후,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1953년 10월, 해군은 1954년 2월, 지상군은 1956년 3월에 철수하였다.
  
  2009년 7월26일 오스트레일리아 제1의 도시 시드니 외곽 무어파크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기념비는 태극문양의 원 모형 안에 1.5m∼2.5m의 깃대모양 石材(석재) 136개를 세워 제작됐으며 기념비로 사용된 석재는 호주 참전용사들의 건의에 따라 호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경기도 가평군에서 空輸(공수)됐다. 이날 제막식에는 대한민국 정부대표로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참석했다. 우리 정부는 이 기념비 제작에 80만 호주달러를 지원했다. 2000년엔 오스트레일리아 수도인 캔버라에 한국전 참전비가 세워졌는데 이 기념비 제작에도 한국정부가 일부 자금을 지원했다.
  
  
  
  호주 시드니 외곽 무어파크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비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4-01, 14: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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