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비례로 가장 많은 병력 派兵(파병)…중부전선의 ‘젊은 피’ 역할
캐나다군 참전비(경기 가평군 북면 이곡리 207-4)와 홍천지구 전투전적비(강원도 홍천군 홍천읍)를 찾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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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경춘국도를 타고 가평읍으로 들어간 간 뒤 75번 국도를 타고 7.3km 정도 가면 도로 왼쪽에 캐나다군 참전비가 나온다. 우측으로 가평천을 끼고 가는 길이라 시야가 탁 트여있고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기 쉽다. 길가 식당과 붙어있는 주차장은 20대 정도 주차가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참전비의 基壇(기단)은 배 모양이고 돛처럼 세로로 뻗은 비석에 ‘캐나다군 참전 지원비’란 글이 쓰여 있다. 비석 상단엔 캐나다를 상징하는 단풍잎 문양이 들어있었다. 캐나다군(육군, 공군)의 가평 지구전투(1951. 4.24 ~ 4.25)를 기념하여 1975년 11월7일 유엔 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건립하였으며, 그 후 1983. 12. 30 가평군에서 再(재)건립했다. 비석 아래 중앙에 ‘자유와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공헌한 캐나다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이곳 옛 격전지에 이 기념비를 세우다’란 내용의 碑文(비문)이 적혀 있다.
  
  참전비 우측엔 1.5m 정도 높이의 돌로 만든 비석이 있었다. 돌에 붙인 초콜릿색 동판 속엔 ‘한국전에 있어서의 캐나다의 기여’란 제목의 글이 한글,영어,불어로 쓰여있었다.
  
  
  
  ‘캐나다는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UN 다국적군의 일환으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국가의 인구비례로 볼 때, 캐나다의 육해공군은 UN군중 가장 큰 군대를 파병하였다. 27000여 캐나다 장병은 머나먼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위하여 가정의 안락을 뒤로 한 채 고국을 떠났다. 그중 오백십육명이 이 숭고한 대의를 명분으로 목숨을 바쳤다. 캐나다 군인들은 UN의 원칙을 지키려는 자국의 굳건한 의지를 구현하였으며, 이들의 용맹함은 수많은 훈장으로 인정받았다.’
  
  1950년의 캐나다 인구는 1370만 명 정도였고 미국이 1억5700만 명 정도, 한국은 1900만 명 정도였다. 참전비 왼쪽엔 가평전투에서 공을 세운 2대대인 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부대를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졌다.
  
  
  
  캐나다는 6.25전쟁에 다섯 번째로 전투 부대를 파견한 국가이며 지상군·해군·공군을 모두 파견하였다. 캐나다 해군은 1950년 7월5일 구축함 3척을 한국 해역으로 출동시켜 7월30일부터 극동 해군 사령부의 작전 통제하에 해상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캐나다 공군은 제426항공 수송대대를 파견하여 1950년 7월26일부터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캐나다는 이외에도 조종사 22명을 美극동 공군에 파견하여 유엔 공군기를 조종하게 하였다.
  
  캐나다 지상군은 한국전에 파병하기 위하여 캐나다 제25여단을 새로 창설하였으며, 예하의 PPCLI 제2대대가 제1차로 1950년 12월18일 부산항에 도착하였고 그 주력은 다음해 5월 초에 도착하였다. 캐나다군 제25여단은 편성 당시에는 全병력이 동시에 파견될 계획이었으나, 유엔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호전됨에 따라 1개 대대만 먼저 파병하게 되었으며, 그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상황이 악화되자 주력이 이동하게 된 것이었다.
  
  최초로 파병된 PPCLI 제2대대는 英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주력이 도착한 다음에는 그들 여단으로 복귀하였다. 캐나다 제25여단은 미군 군단 또는 사단에 배속되어 작전하였으며, 1951년 7월 28일부터는 영연방 제1사단에 편입되어 휴전이 될 때까지 주로 임진강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유엔군은 1951년 초 중공군의 新正(신정)공세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평택~안성~원주~평창을 잇는 방어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 무렵 거듭된 패전으로 유엔군 내부엔 패배주의가 팽배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 제27여단에 배속돼 중부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제2대대는 프랑스대대와 함께 그야말로 6·25전쟁의 ‘젊은 피’의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듣는다. 주요 전투를 소개한다.
  
  *가평 전투(1951. 4. 23~25)
  이 전투는 캐나다군 제2대대가 가평 북쪽 7km에 위치한 가평천 남단 667고지에서 중공군 제20군 예하 부대와 치른 방어 전투이다. 이 대대는 당시 英연방 제27여단의 일부로서 이곳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맞아 전방 지역인 사창리에서 후퇴하는 한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이들을 뒤따라 가평으로 진출하여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을 저지하게 되었다. 캐나다군은 4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까지 중공군과 가평천변의 677고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경춘가도의 요충인 가평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밀어닥친 중공군을 맞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적군을 진내 깊숙이 유인해 크게 무찔렀다.
  
  *자일리 전투(운천 북쪽 2km, 1951. 5. 30)
  이 전투는 캐나다 제25여단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2차 춘계 공세를 저지한 후 실시된 재반격 작전에 참가하여 운천으로 機動(기동)한 후, 그 북쪽에 위치한 자일리와 동쪽의 각걸봉(467고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여단은 이 공격에서 자일리와 각걸봉의 일부를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과 역습으로 공격에 실패한 후 운천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이 여단은 이 전투 후 예비 임무로 전환되어 포천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홍천 진출전(1951.2.19~3.11)
  캐나다군 제2대대는 1951년 2월19일 여주 북동쪽 주암리로 이동하여 英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됨과 동시에 공격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다. 제2대대는 3월7일 오스트레일리아 대대와 함께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공격이 어려워지자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 美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하여 목표고지 일대를 포격하였다. 一進一退(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대대는 공격을 再開해 532고지를 점령하였다.
  
  
  
  캐나다 제2대대가 1951년 3월7일부터 3월11일까지 양덕원리 부근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아군이 중부전선을 확보하는데 기여한 이 홍천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는 ‘홍천지구전투전적비’가 1957년 3월15일 육군 1군단에 의해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 공원에 건립됐다. 양평 방면에서 홍천읍내로 들어가는 입구인 연봉삼거리 언덕에 위치한 이 공원은 舊韓末(구한말)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애국자 남궁억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전적비 외에 남궁억 선생의 詩碑(시비)를 비롯하여 군민헌장기념비, 충혼탑, 3·1만세탑, 국회 부의장을 지낸 이재학 선생 기념비와 광장에 건립한 반공 희생자 위령탑 등이 함께 있다. ‘홍천지구전투전적비’는 격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기에 쓴 碑文(비문)이라서인지 글 곳곳에 격한 감정이 담겨 있다.
  
  ‘피에 굶주린 이리떼와 같이 침공해 오던 북쪽 오랑캐에 대하여 이 반격이 없었던들 이날과 이곳이 있을 것인가. 피땀에 젖은 장병들의 혈투사는 불후의 무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국군 3,5,8사단과 영웅적인 미해병 1사단 및 카나다, 뉴지랜드부대의 장병들은…끝끝내 적을 섬멸하고 중부전선의 요지인 이 지구를 최후까지 확보함으로써…’
  
  *고왕산(355고지) 부근 전투(1952.10.23)
  캐나다 제25여단이 임진강 북쪽 고왕산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여단은 중공군의 급습을 받고 한때 고왕산 서측방의 고지를 피탈당했으나 역습으로 이를 탈환하여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10월24일 중공군은 다시 공격하여 여단의 포병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진내로 접근하였고, 중대는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응수하였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진지 일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D중대는 자정무렵 특공대를 조직하여 역습하였고 진지를 재탈환하였다.
  
  *나부리(전곡 서북방 18㎞) 전투(1953.4.)
  이 전투는 캐나다 25여단이 임진강과 사미천의 합류지점 부근인 나부리의 무명고지(97m)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1953년 4월 하순에 접어들자 중공군은 여단의 좌측에 배치된 英제29여단의 후크고지와 우측에 배치된 英연방 제28여단의 고왕산 일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말부터는 여단 정면의 나부리 일대로 확산되었다. 캐나다 제25여단이 방어중인 나부리 일대를 포격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이 지역은 중공군의 전초진지에서 감제관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이 개활지로 이루어져 있어 적이 공격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5월2일 중공군은 주도면밀한 공격계획하에 침투부대를 침투시켜 쌍방간에는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진 C중대의 요청으로 진내사격이 개시되자 중공군의 공격기세는 현저히 둔화되었고, 여단의 적의 증원과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사미천 북쪽 적의 전초진지인 166고지 일대를 무차별 포격하였다. 이러한 전투는 3일 오전까지 계속되었으나 캐나다 대대가 역습을 준비하자 중공군이 철수함으로써 나부리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휴전 후, 캐나다 공군은 1953년 7월에, 해군은 1955년 9월에, 그리고 지상군은 1957년 6월에 철수하였다. 캐나다군은 참전기간 중 戰死(전사) 312명, 부상 1212명, 실종 1명, 포로 32명의 피해를 입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4-03, 13: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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