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간 중 최고 30만 명 참전…실질적인 전쟁 主役
미국군 참전비(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494-1)를 찾아…‘냉전의 殘像(잔상)’으로 밀려나 ‘놀이공원에 갇힌’ 참전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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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군 참전비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494-1번지, 1972년에 건립된 임진각 건물 뒤편에 있다. 임진각 일대는 2005년부터 경기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임진각:평화누리’란 이름으로 불린다. 노무현 정권 때 ‘냉전시대의 잔상이었던 임진각을 화해와 상생, 통일이라는 더 넓은 평화의 메카로 변모시키기 위해’ 임진각 공원 입구쪽 3만여 평의 벌판을 잔디언덕으로 조성한 뒤 일반에 공개했다. ‘냉전의 殘像(잔상)’으로 밀려난 지역은 임진각과 자유의 다리, 6·25 남침전쟁과 얽힌 각종 비석들이다. 그 속에 미국군 참전비와 미제2사단 참전비, 참전을 결단한 당시 美대통령 트루만의 동상이 몰려 있다. 트루만 동상같은 곳은 ‘임진각:평화누리’ 안내센터에서 준 팜플렛에 나와 있지도 않았다.
  
  임진각 일대는 놀이공원으로 바뀌고 있다. 바이킹이 들어서고 놀이동산의 열차가 돌아다닌다. 미국군 참전비를 주위로 이 열차가 지나갈 때면 관람객들이 진입할 수가 없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공원을 놔두고 굳이 좁은 이곳에 들어와 현충시설을 욕보이고 있다. 나는 트루먼 동상을 찾느라 이 공원을 두 번이나 왔다. 안내팜플렛에 아예 나와 있지 않고 동상 바로 옆에 큰 나무가 가로막아 우연히 그 앞을 지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상태였다.
  
  
  
  
  
  미국군 참전비는 115평 부지에 삼각형 조형물 네 개가 놓여있다. 陸海空軍(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참전을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50개 주를 상징하는 숫자인 50개의 깃발이 참전비 둘레에 펄럭인다. 碑文(비문)은 간결하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기간(1950~1953) 동안 미국의 아들들이 바친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그들의 영령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워 기념하노라’
  
  참전비는 임진각이 만들어진 3년 뒤인 1975년 10월3일 우리 정부가 만든 기념비이다. 안내판에는 미군의 희생과 한국전에서의 역할이 간결하게 소개됐다.
  
  ‘참전 연인원 57만2000명, 사상자 14만2091(사망 3만3629명, 부상10만9284명, 실종 5178명)의 고귀한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이 크고 비싼 대가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의 망상은 좌절되고 대한민국은 마침내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미국군 참전비 좌우로 작은 추모비 몇 개가 붙어있다. ‘일본계 미군장병 247명 추모비’ ‘미 육군 187 공수전투단 참전 기념비’ 미군으로 참전한 ‘괌의 차모로(Chamorro)병사 추모비’ 등이다. 그 건너편 나무 그늘엔 ‘자유를 위해 전사한 용사들을 위하여 1950~’란 碑文(비문)의 美2사단 6·25참전비가 있다.
  
  
  
  
  
  
  
  
  
  참전비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30m쯤 가면 나무에 가린 녹색 동상이 하나 나온다. 미군의 6·25 참전 결단을 내려 대한민국을 구한 美트루먼 대통령의 동상(1975년 건립)이다. ‘해리 에스 트루만 상’이란 동상銘(명)은, 대한민국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침략을 당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파병의 용단을 내린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揮毫(휘호)했다는 글이 적혀있다. 동상 옆에는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에 관하여 발표한 성명문의 내용도 있었다.
  
  
  
  
  
  「국경에서의 침공을 방지하고 국내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된 한국 정부군이 북괴의 침략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우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군에게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이러한 정세 하에서 본인은 미국 공군과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군에게 원호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임진각 뒤편 1000평도 안돼 보이는 좁은 공간에 미국군 참전비와 美2사단 참전비, 美육군 제187공수특전단의 한국전쟁에서의 전투낙하를 기념하는 비석, 트루먼 대통령 동상 등이 어수선하게 전시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 대한민국 군대의 승전비도 있고 6·25남침전쟁과 전혀 다른 성격의 기념물들도 이 공간에 함께 모여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들고 한국전쟁의 승리 주역인 미국과 미군의 희생과 역할이 기록된 기념물을 ‘냉전의 殘像(잔상)’쯤으로 여긴 이들이 이런 시설들을 놀이공원 속에 가둬두고 자신들은 3만 평이 넘는 ‘평화’란 이름이 붙은 임진각의 언덕에서 연날리기를 하는 것은 일종의 국가적 背恩忘德(배은망덕)이란 생각도 들었다. 미군 참전용사들이 1개 대대를 보낸 참전국들의 참전비보다 못한 이런 꼴을 보면 우리를 어찌 생각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미국은 6·25 전쟁을 맞아 유엔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참전했으며 가장 큰 규모의 지상군, 해군, 공군을 파병했다. 전쟁 중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을 임명함으로써 6·25 전쟁을 주도하게 된 국가다.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최초로 북한군과 교전을 시작한 것을 비롯,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 北進(북진), 韓·滿(한만) 국경 진출, 1·4 후퇴, 휴전 등 6·25 전쟁 전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美육군은 전쟁기간 중 최고 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1952년 유엔군사령부의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의 병력수만으로 보면 지상군의 경우 한국군이 50%, 미군이 40%, 미국外의 참전군이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美육군이 시행한 작전은 사실상 6·25전쟁 전체 작전이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개 군단(美제1·9·10군단), 8개 육군 사단(美제 24·25·2·7·3·40·45보병 사단 및 제 1기병 사단), 1개 해병 사단(제1해병 사단), 그리고 2개 연대 전투단(제5보병 연대·제 187공수 연대) 및 이들의 지원 부대들이 투입되었다.
  
  美해군은 극동해군의 통제하에 제7함대가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항공모함, 전함,구축함, 순양함, 잠수함 및 지원함이 참여해 개전 이후 10일째 되는 7월4일부터 북한해안을 봉쇄해 제해권을 완전장악했다. 이후 美해군은 공중폭격, 함포사격,상륙병력 수송, 美본토로부터의 인원과 물자수송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 작전의 완전한 성공으로 그 실력을 보여주었다.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하에 제5공군과 전략폭격사령부를 중심으로 북한과 중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폭격과 근접지원 작전을 펼쳤다. 전쟁기간 내내 북한군과 중공군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미군은 참전 초기인 7월5일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최초로 북한軍과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작전, 北進(북진), 韓·滿(한·만) 국경 진출, 1·4 후퇴, 休戰(휴전) 등 6·25 전쟁 全과정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휴전 후 美해·공군은 곧 재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지상군은 1954년 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7개 사단이 철수하고 잔여 부대는 계속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군의 주요 전투를 소개한다.
  
  *오산 부근 전투(1950년 7.5~7.6)
  美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스미스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는 가능한 부산에서 먼 북쪽으로 진출하여 주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기도 오산 부근 죽미령으로 이동하였다. 죽미령에서 방어진지 구축작업 도중 북한군 제4사단이 전차 8대를 앞세우고 접근하여 진지돌파를 기도하였다. 7월5일 07시30분, 미군은 자신만만하게 75밀리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북한 전차를 명중시키면서 한반도에서 미군과 북한군간의 최초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타격을 입은 북한군 T-34전차는 잠시 멈칫했을 뿐 계속 전진했다. 불과 반나절의 전투로 스미스 부대는 440명 중 150여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포병대의 야포를 비롯한 모든 중화기는 망실되었다. 미군과 북한군의 역사적인 첫 전투는 이처럼 미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고 대대장은 철수를 명령하였고, 안성을 경유 7월6일 천안으로 철수하였다.
  
  *인천상륙작전(1950. 9.15)
  
  맥아더 장군은 전선상황이 악화될수록 북한군의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인천상륙계획을 구상한 결과 8월28일 인천상륙을 최종 결정하였고, 상륙작전 개시일도 9월 15일로 확정하였다. 美제1해병사단, 제7사단, 제2특수공병여단과 국군 제1해병연대, 제17연대를 주축으로 상륙부대인 美제10군단이 편성되었다. 美극동해군도 美해군 함정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함정을 포함 총 260여 척으로 제7합동기동부대를 편성하고, 상륙작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9월 초 상륙기동부대는 부산과 일본 요코하마, 고베에서 상륙군을 탑재하고 10일 인천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15일 새벽 인천상륙은 계획대로 시작되었고, 상륙군 선봉에 나선 美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녹색해안으로 상륙하여 08:00에 월미도를 점령한 데 이어 오후 만조 시간에 제5해병연대가 남쪽 청색해안으로 상륙하였다. 이후 상륙돌격부대들은 시가전을 벌여 북한군을 소탕한 후 16일 저녁 무렵 인천 외곽을 연결하는 해안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리에 종료되었다.
  
  *숙천·순천 공수작전(1950. 10. 20 ~ 10. 22)
  숙천·순천 공수작전은 미 제1군단이 평양을 탈환한 직후인 10월20일, 맥아더 원수의 명령에 의하여 평양에서 빠져나간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군 측에 억류되어 있는 유엔군 포로를 구출하기 위하여 실시된 空輸(공수)작전이다.
  
  美제187공수연대전투단(연대장 보웬 대령) 소속 장병 4220명은 10월20일 12시에 C-119 수송기 편으로 김포 비행장을 이륙하여 평양 북방 56Km 지점의 숙천(主투하지역)과 숙천에서 동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순천 지역에 투하되었다. 이틀간의 작전간에 숙천과 순천 일대에서 투하된 장비와 보급품은 105미리 곡사포 12문, 짚차 39대, 탄약과 각종 전투식량 등 무려 600톤이 넘었다. 전투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수량의 중장비가 투하되고 그것이 C-119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는 戰史上(전사상) 이것이 처음이었다.
  
  미군의 작전기대와는 달리 이미 북한군의 주력은 10월 12일에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였으며, 미군 및 국군포로들도 작전개시 이전에 북쪽으로 끌려가 구출되지 못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은 111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북한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제239연대병력을 비롯한 3818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美제187공수연대전투단은 숙천 일대를 英제27여단에게 넘겨주고 10월23일 다시 평양으로 내려왔다. 비록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이 작전의 심리적 효과는 대단하여 북한군 패잔병 부대들이 분산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수뇌부 요인들까지도 강계 지역 북방으로 도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장진호 전투(1950. 11.26~12.13)와 흥남 철수작전(12.15~12.24)
  장진호 전투는 1950년 겨울, 미해병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美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작전을 말한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美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국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흥남철수가 戰史(전사)에 남는 이유는 민간인 10만 명의 피난을 미군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美제10군단의 강력한 도로통제에도 불구하고 함흥-홍남 도로에 피난민이 장사진을 치고 미군과 함께 철수를 요구했다. 최초 제10군단은 軍警(군경) 가족과 일부 피난민의 수송만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가 피난민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제10군단장은 피난민들을 서호진항에 집결시켜 가용한 선박을 총동원하여 최대한 후송하기로 방침을 정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피의 능선’ 전투(1951. 8.18~9.7)
  피의 능선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북쪽의 능선으로 1951년 8월18일부터 9월7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며, 20만 발의 포탄이 떨어져 계곡과 산등성이마다 피로 얼룩진 혈전장이었다. 이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와이오밍 선으로 진출한 후, 주저항선 전방의 前哨(전초)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美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983고지-940고지-773고지)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7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1개연대 규모 사상자 발생과 북한군의 1개 사단규모 이상 피해가 발생해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커다란 격전이었으며, 결국 아군이 승리함으로써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고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 도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단장의 능선’ 전투 (1951. 9.13~10.13)
  ‘斷腸(단장)의 稜線(능선)’ 전투는 미국 2사단과 美2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가 강원도 양구 북방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에 배치된 북한군 2개 사단(6, 12사단)을 공격하여 점령한 공격 전투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에 붙여졌다. 미국에서는 지형에 비유하여 펀치볼 전투라고도 부른다.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高地(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미국 2사단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戰線(전선)을 정리, 조정하였다.
  
  
  
[ 2010-04-06, 15: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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