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唐의 장수 薛仁貴(설인귀)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바로 靑海의 大非川에서 吐藩(토번· 티베트)軍에게 전멸당한 곳이 大非川(대비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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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사진-靑海湖>>

 

靑海를 답사해야 했던 까닭

 

중국 靑海省(청해성)의 북동부에 위치한 靑海湖(청해호)의 넓이는 제주도의 2.5배이다. 靑海湖의 남쪽을 흐르다가 모래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大非川(대비천)은 羅․唐(나·당)전쟁의 승패, 즉 그후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이다. 서기 670년 7월, 唐의 장수 薛仁貴(설인귀)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바로 靑海의 大非川에서 論欽陵(논흠릉)이 거느린 吐藩(토번․ 티베트)軍에게 전멸당했다. 보급부대 등 지원부대 전사자와 포로를 합치면 唐의 인명피해는 50만 명에 달했다.

 

대비천 전투에서 승세를 탄 吐藩軍(토번군)은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 즉 실크로드(비단길)로 이어지는 통로를 점령했다. 이로써 토번은 당시 세계의 主교통로(main-trunk)를 지배하게 되었다.

 

청해호 남쪽 대비천 전투에 투입되기 바로 직전, 薛仁貴는 韓半島(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都護(도호)였다. 安東都護는 新羅(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唐의 東方정책을 지휘하던 사령관 겸 총독이었다. 설인귀의 청해지역 투입 때 韓半島 전선에 포진하고 있던 병력 중 상당수가 청해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新羅 지도부가 이런 유리한 정세변동을 간과할 리 없었다. 당시 신라는 長安에 관리․ 宿衛(숙위)학생․ 留學僧(유학승) 등을 파견해 놓고 있어 唐軍(당군)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670년 3~4월, 新羅의 사찬 薛烏儒(설오유)가 高句麗(고구려) 부흥군의 태대형 高延武(고연무)와 함께 정병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皆敦壤(개돈양:요녕성 鳳凰城 방면)에서 唐의 용병인 靺鞨軍(말갈군)을 대파했다. 설인귀 軍의 靑海 배치 1개월 전이며, 대비천 전투 4개월 전의 일이다. 안동도호부 병력의 靑海 이동을 간파한 신라의 對唐(대당) 선제공격이었다.

 

이로부터 羅-唐 전쟁과 토번-唐 전쟁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唐朝(당조)는 薛仁貴․ 李謹行(이근행․ 말갈 출신)·劉仁軌(유인궤)·契苾何力(설필하력·돌궐系 突騎施 출신) 등의 한반도에 투입된 장수들을 戰況(전황)에 따라 靑海에 이동․ 배치했다. 어떠한 强國(강국)도 2正面 전쟁은 무리다. 신라와 토번의 협공을 받은 唐은 두 戰域(전역)에서 모두 패전, 마침내 世界帝國(세계제국)의 지위에서 추락하게 된다.

 

唐-토번 전쟁은 669년 9월 토번이 天山南路(천산남로)를 급습함으로써 개시되었다. 天山南路는 실크로드 중 唐이 관할하던 타림 분지(지금의 新疆 위구르自治區 남부 사막지대) 주위의 오아시스 北道와 南道이다. 세계제국 唐에게 실크로드는 死活的(사활적) 교통로였다.

 

664년 이후 唐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則天武后(측천무후)였다. 그녀의 남편 高宗 李治(이치)는 간질병을 앓아 政事(정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統帥權(통수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측천무후는 韓半島 전선에 투입된 薛仁貴를 1만5000리 떨어진 靑海 지역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그가 청해 전선에 도착한 것은 670년 4월의 일이었다. 물론 무리한 병력 이동이었다. 설인귀는 비록 대비천에서 참패했지만, 645년 唐 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병졸로 자원 참전한 이래 거듭 戰功(전공)을 세워 大將軍(대장군)의 반열에 올랐던 立志傳的(입지전적) 인물이다. ·

 

신라와 토번은 일찍이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그 어떤 동맹국보다 효과적으로 東西에서 唐을 挾攻(협공)했다. 토번의 擡頭(대두)라는 국제정세의 판을 정확히 읽고 對唐 선제공격을 감행한 신라 지도부의 결단력과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결단과 의지가 없었다면 韓民族도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50여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陸接(육접)한 민족들은 거의 대부분 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했고, 그 예외적 존재라면 韓國과 베트남 정도이다. 對唐 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自尊(자존)의 韓民族史 형성으로 직결되는 힘찬 발걸음이었다.

 

百濟 출신 靑海방면군 사령관 黑齒常之(흑치상지)가 쌓은 西寧 일대의 烽燧臺(봉수대)

 

<<사진-청해호 주변 지도>>

 

지난 4월9일 아침, 필자 일행 5명이 탑승한 CA여객기는 北京공항을 이륙한 지 2시간30분 만에 西寧(서녕) 공항에 착륙했다. 해발 2600m의 盆地(분지)에 형성된 西寧市는 현재 청해省의 省都(성도)로만 기억될 곳이 아니다. 西寧에는 현재 조선족 거주자가 없지만, 西寧을 중국 서부의 關防(관방)도시로 맨 처음 건설한 인물은 百濟(백제) 출신의 무장 黑齒常之(흑치상지)이다. 청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한 행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詳論(상론)할 것이다. 그후 평화시의 서녕은 중국과 티베트의 茶․ 馬(차·마) 교역시장으로 발전했다.

 

黃河(황하)의 지류인 湟水(황수)

청해성 박물관

 

시내인구 200만 명인 西寧은 黃河(황하)의 지류인 湟水(황수)를 따라 가로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하늘도 누렇고, 사방을 꽉 둘러싼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서녕驛(역) 등 중심가와 청해성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날씨는 춥고, 황사를 날리는 바람도 거세다. 여성들은 대부분 투명한 분홍색 혹은 흰색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멋쟁이 아가씨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맨 얼굴의 어린 소년·소녀들의 뺨은 강렬한 햇볕을 받아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있다.

 

서녕은 티베트족(藏族)․ 위구르족(回族)․ 몽골족․ 滿洲族(만주족)․ 土族(토족) 등 35개 소수민족이 漢族과 함께 사는 인종의 전시장이다. 이것은 이 땅의 주인이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증거이다. 티베트족은 골격이 크고 다리가 길며 耳目口鼻(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위구르인은 가톨릭 성직자처럼 머리에 하얀 빵모자를 쓰고 있다. 만주족은 淸代에 이곳에 주둔한 八旗兵(팔기병)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티베트族 식당 종업원과 필자

 

점심 후 서녕시의 屬縣(속현:지방관이 파견된 郡이나 현에 속한 낮은 급의 지방 행정 단위)인 湟中(황중)의 티베트 불교 게루派의 본산인 塔爾寺(탑이사:타얼스)로 출발했다. 황중에 이르는 길 옆 산봉우리에는 烽燧臺(봉수대)가 잔존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출신 흑치상지는 이곳에 70여개의 봉수대를 건설했다.

 

<<사진-唐代의 봉수대>>

 

 30만 평 분지에 펼쳐진 塔爾寺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學僧(학승)이었던 쫑가파(宗咯巴)가 태어난 곳이다. 쫑가파는 티베트 불교 게루파(格魯派)의 창시자다.  게루파 승려는 노란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黃帽派(황모파)라고 불린다. 현재, 인도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紅帽派(홍모파)이다.

 

쫑가파는 明나라 永樂帝(영락제)가 北京에 스승으로 초청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 번째의 간곡한 초청이 오자 그는 제자 샤카예쉬를 明廷(명정)에 자기 대신 파견했다. 지금은 中國 정권이 티베트를 강점하고 있지만, 적어도 明代까지 티베트와 中國의 정권 사이엔 아무런 종속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滿洲族(만주족)의 정복왕조 시기인 淸代(청대)에도 성직자로서의 달라이 라마와 大후원자로서의 淸 황제가 서로 돕는 관계, 즉 檀越(단월)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열강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집중되었을 때 中共軍은 首都 라싸에 병력을 투입, 티베트를 西藏自治區(서장자치구)로 만들어버렸다. 1959년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印度(인도)로 망명한 14代 달라이 라마는 인도 北部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이후 50여년 동안 티베트인의 自治(자치)를 요구해 오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內治만 티베트인이 맡고, 외교․ 국방은 중국 정부에게 위임하겠다는 온건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의 거리에서는 티베트인 청년들이 달라이 라마의 온건노선을 반대하며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부르짖는 켐페인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티베트 불교 최고의 學僧 쫑가파가 태어난 타얼寺>>

 

현재, 티베트인이 주장하는 티베트의 범위는 티베트․ 靑海省의 전부와 甘肅省(감숙성)․四川省(사천성)․雲南省(운남성) 일부이다. 필자는 2008년 여름에 인도의 西北端(서북단) 레 지역의 불교 유적을 답사한 후 해발 5000m가 넘는 험한 고개 세 개를 지프를 타고 넘어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청사(남걀寺院)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3일간에 걸쳐 약 2시간 동안 회견했다(月刊朝鮮 2008년 9월호 보도). 회견에서 그는 “우리의 소원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自由(자유)”라고 강조했다.

 

14代 달라이 라마의 고향도 사천성과 접경지역인 靑海省의 南東部(남동부) 암도이다. 암도 인근지역인 玉樹(옥수)에서 4월14일 아침 진도 7.1의 大지진이 발생하여 수천 명의 주민이 죽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우리 일행이 청해성을 떠나 기련산맥을 넘어 감숙성으로 북상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청해성은 한반도의 3.5배의 면적, 省都 서녕과 지진의 현장인 옥수는 821km의 거리다. 14代 달라이 라마는 지진이 난 고향 玉樹지역을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고 한다.

 

1만5000리 떨어진 임진강 戰線과 靑海 전선

 

湟中縣(황중현)은 말갈족 출신 장수 李謹行(이근행)이 토번군을 방어하던 현장이다. 이근행은 그 직전에 唐軍의 한반도 臨津江(임진강) 전선의 총사령관이었다. 말갈병 20만 명을 이끌던 이근행은 675년 10월29일 臨津江 지류 한탄강변의 買肖城(매소성: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의 대전리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배, 戰馬(전마) 3만380필을 버린 채 황급하게 퇴각했다. 이근행의 패인은 임진강 河口로 접근하던 唐의 보급함대가 坡州 交河(파주 교하) 부근에서 신라 해군에 저지되는 등 兵站(병참)의 실패로 보인다.

 

<<지도-임진강 전선과 청해 전선 1만5000리>>

 

매소성에서 퇴각한 이근행 軍은 곧바로 귀국해 임진강 전선에서 1만5000리 거리의 靑海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근행은 청해 전선에서 토번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후 불과 1년 만에 병사했다. 이근행이 죽은 후 唐의 中書令(중서령) 겸 河源道대총관 李敬玄(이경현)이 이곳을 지켰다. 그러나 679년, 이경현 휘하 唐軍 18만 명은 토번의 명장 論欽陵(논흠릉) 軍과 전투를 벌이다 전멸했다.

 

 

<<사진-한탄강변의 매소성. 675년 9월, 이근행이 지휘한 당군 20만 명을 격파해 戰馬 3만380필을 획득한 매소성 전투의 현장(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현재 우리 국군의 진지가 축조되어 있다>>

 

 

 

재상급인 이경헌은 자신을 청해 지구에 투입한 측천무후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처음부터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휘하의 좌위대장군 劉審禮(유심례)에게 부대의 지휘를 맡겼는데, 유심례는 졸전 끝에 토번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경현의 패전도 언제 唐軍이 再侵(재침)할지 몰라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던 신라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청해 전선의 당군은 戰意(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패군을 수습하여 후퇴하려고 했지만, 퇴로가 막혀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주변의 높은 산 위에 진을 쳤던 토번군은 습지대의 진흙 속을 헤매고 있던 唐軍을 빤히 내려다보고 압박했다. 이때 백제 출신 흑치상지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 진영을 야습해 교란한 뒤 퇴로를 뚫음으로써 일약 武名(무명)을 떨쳤다.

 

이때 측천무후는 흑치상지에게 金 500량 비단 500필을 하사하고, 河源道經略副使(하원도경략부사)로 발탁했다. 흑치상지는 680년에도 정예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또 토번 진영에 야습을 걸어 토번병 2000명을 죽이고 말과 양 수만 필을 노획했다. 이런 전공으로 흑치상지는 이경현을 대신하여 河源道경략대사로 승진했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河源道란 黃河의 源流(원류)가 소재한 곳, 즉 지금의 靑海省이다. 청해성은 황하뿐만 아니라 長江과 메콩강의 발원지이다.

 

흑치상지 軍은 현재의 서녕市 일대에 鎭守(진수)했던 만큼 군량의 확보에 의한 戰線의 안정이 시급했다. 그는 湟水(황수) 강변에 5000頃(경)의 토지를 개간하여 100만여 斛(곡=石)의 곡물을 수확했다. 1頃(100畝)은 100步 平方이며, 1斛(곡)은 10斗이다. 또 그는 서녕 일대에 烽燧臺 70여개소를 축소하여 토번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필자 일행이 서녕시부터 황중현 塔爾寺(탑이사)로 가면서 목격한 唐代의 봉수대들은 흑치상지가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가 河源道경략대사를 맡았던 약 6년간 토번은 감히 唐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지 못했다. 그는 李勣(이적)의 손자인 李慶業(이경업)이 반란을 일으켜 南京을 점거하자 江南道 행군총관이 되어 진압전에 참전했다. 이경업은 唐朝를 찬탈하려는 측천무후의 움직임에 반발하여 거병했지만, 전략 不在로 패망했다. 그는 唐의 수도 長安과 副都(부도) 낙양을 直攻(직공)하지 않았다.

 

<<사진-1929년 洛陽의 북망산에서 발굴된 흑치상지의 묘비명>>

 

684년 흑치상지는 左무위대장군 겸 檢校左羽林軍(검교좌우림군)으로서 황제 경호부대인 北衙禁衛(북아금위) 전체를 통솔했다. 696년 再興 돌궐이 변경을 침입해오자 그는 靑海 전선을 떠나 燕然道(연연도:외몽골)의 대총관이 되었다. 그는 黃花堆(황하퇴:현재의 山西省 山陽縣)에서 돌궐의 쿠토르크(骨础祿)軍을 격파, 燕國公(연국공)이라는 작위와 식읍 3000호를 받았다. 이런 그도 결국 피의 숙청을 당하고 마는데, 그 과정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계속)

[ 2010-05-13, 10: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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