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春秋와 唐 태종의 비밀 협정!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3)/唐나라가 羅唐협약을 깨뜨리자 신라는 드디어 전쟁을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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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春秋와 唐 태종의 비밀 협정!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隋·唐(수·당)은 선비족 王朝


그러면 이제는 羅·唐전쟁에 이르기 전의 국제정세를 짚어볼 차례이다. 617년, 太原留守(태원유수) 李淵(이연)이 거병하여 長安을 점령했다. 이때 隋(수)의 煬帝(양제)는 수도 長安을 비우고 江都(강도:지금의 강소성 揚州)로 南行, 酒色(주색)에 골몰하고 있었다. 611년 이후 3년간 세 번이나 감행된  고구려 遠征(원정)의 실패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煬帝는 통치에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다.       

 

 618년, 양제는 친위대장 于文化及(우문화급)에게 江都의 行宮(행궁)에서 살해당했다. 이에 長安을 점거하고 있던 李淵은 그가 옹립한 허수아비 황제(隋 양제의 손자 恭帝)를 죽이고, 唐(당) 왕조를 창업했다. 그가 唐의 高祖(고조)이다. 唐 고조 李淵과 隋 양제 楊廣(양광)은 이종사촌간이다. 隋 양제의 어머니는 선비족의 명문 獨孤信(독고신)의 제4녀, 唐고조의 어머니는 獨孤信의 제9녀로서 親자매간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隋와 唐을 漢族왕조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지만, 역사왜곡이다. 선비족왕조 北周(북주)를 찬탈해 隋를 창업한 文帝 楊堅(양견)의 아버지 楊忠(양충)은 원래 선비족의 3字 復姓(복성)인 普六茹(보륙려)씨였다. 唐 왕조의 李씨도 선비족 왕조 西魏(서위)의 8柱國 가문 중 하나로서 陰山山脈(음산산맥)의 요충지를 방어하던 武川鎭(무천진) 군벌이며, 그들의 본래 성은 선비족 復姓(복성)인 大野(대야)씨였다.

 

<<사진-수·당 왕가의 출신지인 내몽골의 武川鎭 거리>> 

 

 선비족은 원래 흉노의 모돈 선우에게 멸망당한 東胡(동호)의 후예이다. 흉노가 前漢 말에 南흉노·北흉노로 분열하여 세력을 잃자 선비족은 남·북 흉노 사이를 파고들어 그 세력권이 동쪽에서는 만주의 흥안령산맥,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청해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일파인 拓跋(척발)씨의 선비족이  華北(화북)에 기마민족정복국가인 北魏(북위)를 세웠다.

 

 南흉노는 前漢 말에 장성 안으로 이주해 後漢 및 삼국시대의 魏 그리고 西晉(서진) 시대에 용병이 되었다. 4세기에 전개된 五胡十六國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五胡의 하나로서 前趙· 後趙· 北涼· 夏 등의 나라를 건설했다.

 

 한편 몽골 高原에 남아 있던 北흉노는 後漢(후한) 및 後發(후발)의 유목민족인 丁零(정령), 그리고 北魏를 건국했던 선비족의 공격을 받아 멀리 서방으로 이동했다. 이 北흉노가 4세기에 로마세계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진시킨 훈族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선비족 왕조인 唐도 창업 초에는 통일왕조가 아니었다. 洛陽(낙양)에는 王世充(왕세충), 河北에는 竇建德(두건덕) 등 여러 군벌이 난립해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唐이 群雄(군웅)들을 평정하고 통일정권을 이룩한 것은 건국 8년 후인 624년의 일이었다.    

 

  626년, 高祖(고조)의 차남 李世民(이세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형(황태자 建成)과 동생(齊王 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소위 玄武門(현무간)의 變(변)이다. 이세민은 황태자와 제왕 元吉(원길)의 가족도 모두 몰살하여 후환을 끊었다. 다만 元吉의 아내만은 살려 측실로 두었다. 고조 李淵은 上皇(상황)으로 물러앉고, 이세민이 즉위했다. 그가 唐의 태종이다.   

 

 당시 아시아 대륙의 패권국은 오르도스 북방에 웅거한 東돌궐이었다. 李淵이 太原(태원)에서 거병할 때 東돌궐로부터 기병 3000기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唐은 돌궐에 자주 조공을 바쳤다. 태종 李世民이 즉위한 626년에 돌궐의 頡利可汗(힐리가한)은 10만 기를 거느리고 長安 70리 밖인 渭水(위수) 다리까지 쳐내려 왔다. 太宗이 감행한 宮庭(궁정) 쿠데타의 죄를 물은 것이다. 可汗(가한: 카간)은 돌궐제국 君主(군주)의 칭호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太宗이 渭水 남안으로 달려가 힐리가한을 꾸짖어 철병시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이때 唐 태종은 長安의 府庫(부고)를 모조리 털어 힐리가한에 헌상함으로써 멸망의 위기를 모면했다. 흉노처럼 純粹(순수) 유목민족인 돌궐은 半유목․ 半농경 민족인 선비족․ 오환족․ 만주족과는 달리 농경지대에 대한 영토적 욕심이 없었다.  돌궐의 최대 관심사는 약탈이었던 것이다.   

       

 唐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던 까닭


 唐 태종은 東돌궐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630년, 당의 명장 李靖(이정)이 내분중인 東돌궐의 王庭(왕정)을 급습, 힐리가한을 생포했다. 唐朝는 홍로경(주변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서의 장관)을 돌궐에 파견하여 힐리가한을 안심시킨 다음에,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때 돌궐족 10여만 명이 중국 內地(내지)로 옮겨져 변경 수비를 떠맡게 되었다.

 

<<그림-唐代의 기병>> 

 

 634년, 唐은 기세를 타고 청해호 남안의 吐谷渾(토욕혼)을 복속시켰다. 641년 唐 태종이 문성공주를 토번의 송첸 칸포에게 보낸 일은 앞에서 거론했다. 이것은 동방정책 추진을 위한 그의 사전 포석이었다. 한편 토번은 이같은 정세를 이용하여 티베트 高原을 완전히 통일했다.  

 

 645년 唐 태종은 드디어 遼河(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나 安市城(안시성) 공방전에서 참패하여 철퇴했다. 唐 태종이 고구려 공략에 집착한 것은 같은 선비족 왕조인 隋(수)를 대신한 唐의 대내외적 위신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엇던 것이다.

 

 648년, 고구려․ 백제의 挾擊(협격)을 받아오던 신라의 재상 金春秋(김춘추:후일의 太宗武烈王)가 唐 태종 李世民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었다. 비밀협정의 골자는 고구려․ 백제를 공파한 후 신라가 백제의 故土(고토) 전부와 대동강 以南 고구려 故土를, 唐은 대동강 이북을 차지한다는 약속이었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羅-唐의 東西동맹과 고구려-백제-倭(왜)로 연결되는 南北동맹의 대결 양상으로 압축되었다. 이 해 북방의 강자 薛延陀(설연타)의 왕 阿波設(아파설)이 唐에 항복했다.            

 

 唐 태종과 티베트 통일의 영웅인 송첸 칸포는 649년 잇달아 사망했다. 토번에서는 송첸 칸포의 아들이 칸포를 승계했다. 唐에서는 李治(이치)가 후계했다. 그가 高宗이다.

 

 고종 李治는 아버지 태종의 才人(재인)이었던 武씨를 정2품 후궁인 昭儀(소의)로 맞이해 총애했다. 才人은 唐 황제가 거느리는 121인의 后妃(후비) 중 하나이다. 태종이 죽은 후 武재인은 머리를 박박 깎고 感業寺(감업사)의 여승이 되어 있었으나 고종에 의해 다시 입궁했던 것이다. 고종이 자기 아비의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든 것은, 生母(생모)를 제외한 아비의 처첩을 모두 물려받는 騎馬民族(기마민족)의 婚風(혼풍)과 별로 다를 바 없다.    

 

 657년, 唐將(당장) 蘇定方(소정방)은 중앙아시아의 타시켄트까지 추격하여 西돌궐의 沙鉢羅(사발라) 카간을 생포했다. 그 후 소정방은 靑海 지구에서 주둔하다가 660년 1월 長安에서 신정하례식을 겸한 논공행상에 참여한 후 3월 山東반도의 끝 成山角(성산각)에서 黃海(황해) 직선항로를 통해 南陽灣(남양만) 앞 덕물도에 상륙했다. 당군은 금강 河口로 진입, 수륙 양면으로 백제의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사진-산동반도 끝 成山角>>

 

 한편 金庾信(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炭峴(탄현:대전 동남부 식장산)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이 거느린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군했다. 羅唐연합군은 7월19일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백제 멸망 후 唐은 648년의 나당 협약을 위반,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의 고토를 직할 식민지로 삼았다. 661~662년 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패전했다. 唐이 한반도 전선에 몰입해 있던 662년 論欽陵(논흠릉) 휘하의 토번군이 唐의 속국이 된 토욕혼을 공격했다.      

     

 663년 8월, 白村江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은 백제-왜 연합군을 격멸했다. 왜국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3차에 걸쳐 3만2000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했었다. 백촌강 패전 후 백제 상류층은 대거 왜국으로 망명했다.  

 

 666년,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그의 장남 男生(남생)이 막리지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지방 순시를 나간 사이에 동생 男建(남건)과 男産(남산)이 형의 지위를 빼앗았다. 男生은 압록강 북안의 國內城(국내성)을 점거하고 그의 아들 獻誠(헌성)을 적국 唐에 보내 항복했다. 667년, 唐이 對고구려 전쟁에 열중하는 사이 토번은 토욕혼을 완전 병합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攻破(공파)했다. 唐은 고구려의 故土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唐의 직할 식민지로 편입했다. 이것은 金春秋와 李世民(唐태종) 사이에 합의된 648년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폭거였다. 고구려 멸망 때까지는 백제의 故土를 직할 식민지로 삼은 唐의 배신행위에도 은인자중하던 신라는 드디어 對唐(대당)전쟁을 결심했다.

 

 신라는 나당연합군의 평양 攻破(공파)가 예상되던 668년 8월에 이미 왜국에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여 對唐 開戰(개전)에 대비한 주변 외교를 전개했다. 白村江 전투에서 참패한 왜국은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방어하기 좋고 도주하기도 좋은 琵琶湖(비파호) 연안, 지금의 오쓰(大津)로 천도해 놓고 있었다. 신라의 주변외교로 왜국은 신라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文武王과 김유신에게 각각 선박 1척분의 예물을 증정했다. 그해 11월, 왜국은 답례사절을 신라에 파견했다. 이로써 657년 이래 10여년 동안 단절되었던 신라-왜국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669년 4월, 토번의 평화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唐 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나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켰다. 토번이 唐의 속국이었던 토욕혼을 병합한 데 대한 唐의 공격을 무마하기 위한 평화공세였다.  

 

 이해 5월, 唐은 2만8000여 호의 고구려 유민을 자국 영토로 강제 이주시켰다. 9월, 토번이 실크로드를 공격하자, 安東都護 설인귀가 병력을 이끌고 靑海로 이동하고 있었다. 신라는 물론 이런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 故土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는 한편 金欽純(김흠순:金庾信의 동생)과 金良圖(김양도)를 唐 조정에 파견하여 백제 고토를 잠식해 온 신라의 입장을 설명했던 듯하다. 이에 唐은 신라 사신 2인을 감금했는데, 다음 해 1월, 김흠순은 석방되었으나, 김양도는 옥사했다.(계속)

[ 2010-05-15, 10: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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