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기벌포 해전서 大勝 후에도 국방력 증강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4)/“唐軍(당군)은 서부전선에서 토번군에 고전, 신라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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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기벌포 해전서 大勝 후에도 국방력 증강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신라의 先制공격

 670년 4월, 고구려의 大兄(대형14관등 중 제7위) 劒牟岑(검모잠)이 水臨城(수림성:황해도 평산)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군을 일으켰다. 같은 달 4일, 신라에 망명 중이던 고구려의 太大兄(태대형:14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 高延武(고연무)가 신라의 사찬 설오유와 함께 각각 1만 명씩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의 鳳凰城(봉황성) 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적극 지원했다.

 

 이 해 5월, 唐(당)은 좌감문위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管(동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한반도 전선에 투입했다. 고간과 이근행은 평양성을 점거하고 있던 고구려 부흥군을 남쪽으로 내몰았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로 집단 이주시키고,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唐은 백제 유민을 조종하여 신라의 對唐(대당) 적대행위를 분쇄하려 했다. 이에 신라는 대아찬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하여 휴전을 요청했다. 이렇게 和戰 양면책에 능숙했다.   

 이 해 7월, 설인귀가 이끈 당군은 靑海의 大非川(대비천) 전투(7월)에서 토번군에게 참패했음은 앞에서 살폈다. 이로써 630년 東돌궐의 頡利可汗(힐리가한) 생포로 성립된 唐의 覇權(패권)시대는 4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671년 1월, 신라군은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의 소재지인 公州 남쪽 근교에서 당군과 접전을 벌였다. 6월, 金竹旨(김죽지)가 지휘하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교의 加林城(가림성) 일대 들판의 농작물을 짓밟아 당군에 대한 兵糧(병량)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출동한 당군과 石城(석성:논산 서부) 일대에서 접전, 5300여 명을 살상하고, 백제 장수 2명과 당군의 고급장교 6명을 생포했다.     

 

 671년 7월, 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은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가 보낸 항의 서신을 접수했다. 설인귀는 大非川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고 象州(상주)로 유배를 갔으나 측천무후로부터 사면을 받고 한반도에 再투입되었다. 文武王은 이에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를 보내 대동강 以南의 토지에 대한 신라의 영토권을 당당하게 천명했다. 이때, 신라는 부여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 故土(고토)에 대한 점령지역을 확대했다. 그 해 겨울에는 신라 해군이 예성강 하구에서 唐의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당군 100여 명을 포획했는데, 익사한 적군은 매우 많았다. 兵站線(병참선)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唐 육군의 지속적인 南下를 저지했다. 신라군은 백제 고토에 대한 공세를 강화, 672년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했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과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이렇게 토번도 신라처럼 唐과 和戰 양면책을 구사했다. 8월, 高侃(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 4만이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공세를 걸어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白水城(황해도 재령)을 포위했다. 이에 신라는 백수성에 구원군을 급파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백수성 들판에서 唐軍을 협격했다. 이때 신라의 長槍幢(장창당:긴 창을 쓰는 부대)은 唐의 騎兵(기병) 수천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러스트-唐代의 기병(左)과 보병(右)>>


 石門전투의 패배로 최대 위기 맞아

 고간의 唐軍은 후퇴하여 石門(황해도 서흥)의 요충지에다 굳센 진을 치고, 추격해 오는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 백수성 전투 때 장창당의 전과에 자극을 받은 신라군의 각 부대는 서로 戰功(전공)을 다투어 협조체제를 이루지 못했다.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은 대아찬 金曉川(김효천), 아찬 金能申(김능신)․ 金豆善(김두선), 사찬 金義文(김의문)․ 金山世(김산세), 일길찬 金良臣(김양신) 등이 한꺼번에 전사하는 대타격을 입었다. 나당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이 같은 패전을 보고받은 문무왕은 즉시 重臣(중신)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당군의 전략을 알기 어려우므로 장병을 총동원하여 요충지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신라는 당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漢山州(한산주:경기도 廣州)에 晝長城(주장성:남한산성) 등을 축조했다. 주장성은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문무왕은 能小能大(능소능대)했다. 그 해 9월에 金原川(김원천) 등을 당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는 문무왕의 사죄 表文(표문:임금에게 바치는 글)을 보내고, 그동안 포로로 잡혀 있던 萊州(내주) 자사 王藝本(왕예본)과 烈州長史(열주장사) 王益을 비롯한 唐兵(당병) 170여 명을 인도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금 120分(푼), 은 3만3500푼, 동 3만3000푼, 바늘 40승포, 牛黃(우황) 30승포 등을 唐 조정의 요인들에게 예물로 증정했다.

 

 이런 노력으로 신라에 대한 唐의 태도는 일단 누그러졌지만, 신라군의 지원을 받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당군의 공세는 가열되었다. 673년 5월, 燕山道摠管(연산도총관) 이근행 휘하의 당군은 임진강 전선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임진강 중류를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부흥군은 임진강의 요새에서 唐의 대군에 포위되어 수천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 이후 부흥군 세력은 대부분 신라 내륙으로 이동하여 신라군에 편입되었다.

 

 673년 7월, 신라의 태대각간 金庾信(김유신)이 79세를 一期(일기)로 병사했다. 신라는 당군이 고구려 부흥군과 전투를 벌이는 기간에 방어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673년 9월에 이르기까지 내륙 및 변방의 요충지에 많은 성곽을 증축하거나 새로 축조했다. 대아찬 金徹川(김철천) 등은 함선 100척을 거느리고, 당군의 해상보급로에 대한 초계활동을 강화시켰다.


최후의 육상 決戰— 買肖城(매소성) 전투


 그해 가을 9월, 당군은 임진강을 도하하여 한강 북안 王逢河(왕봉하:경기도 고양)까지 남하했다. 그해 겨울, 당군은 예성강 중류에 위치한 牛岑城(우잠성:황해도 금천)을 공격했다. 이어 童子城(경기도 김포시 통진) 등도 거란․말갈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신라는 9軍을 투입해 당군의 공세를 막았다.

 

 674년 1월, 唐은 문무왕에게 주었던 관작을 취소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신라의 내부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長安에 머물고 있던 金仁問(문무왕의 동생)을 새로운 신라 국왕으로 임명하고 그를 호위하고 갈 원정부대를 편성했다. 총사령관은 鷄林道(계림도)대총관 劉仁軌(유인궤), 부사령관은 衛尉卿 李弼(위위경 이필)과 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이었다.

 

 그러나 唐은 신라에 원정군을 파견할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天山산맥 일대 西돌궐의 여러 부족이 토번의 선동을 받아 對唐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唐은 소정방을 파견하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신라와 당은 674년 1월부터 675년 2월까지 14개월간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문무왕은 674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서라벌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거행하여 항전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675년 1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측과 모종의 협상을 벌였다. 이같은 정세 속에서 당의 한반도 작전이 재개되었다. 金仁問을 호위하여 서라벌에 입성하라는 측천무후의 명령을 받은 劉仁軌(유인궤)는 675년 2월에 임진강을 도하하여 七重城(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대파했다. 이에 문무왕은 사죄 사신을 長安에 파견하여 평화공세를 벌였다. 唐은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총사령관 유인궤를 귀국시켰다. 김인문도 신라로 오던 도중에 長安으로 되돌아가 臨海郡公(임해군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이때 유인궤의 귀국 후, 임진강 전선의 총사령관은 이근행이 맡았다. 문무왕이 사죄했다고 측천무후가 유인궤를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귀국 후 유인궤는 곧장 靑海(청해)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675년 10월, 임진강 하구에 접근하던 唐의 보급 함대가 신라 해군에 의해 交河(교하:경기도 파주)에서 저지당했다. 신라 장군 김문훈은 당군 1400명을 전사시키고, 병선 40척을 포획했다. 이달 29일, 신라군은 이근행이 점거하고 있던 임진강 支流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경기도 연천군 全谷)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말갈병 20만 명을 거느린 이근행은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다수의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는 임진강을 통한 당군의 병참선이 봉쇄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戰馬는 병사의 12배의 식량을 먹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軍으로서는 끌고 다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약탈을 하며 북상한 이근행은 귀국 후 바로 청해 전선에 투입되었다.


 기벌포 海戰 대승 후에도 放心하지 않았던 신라의 지도층


  675년, 唐은 서역의 安西4鎭(현재의 신강위구르自治區 남부지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西돌궐과 연합하여 이 4鎭을 다시 攻取(공취)했다. 676년 토번의 만손 칸포가 병사했다. 만손 칸포의 왕비는 친정 오빠이며 國相(국상:정승)인 麴薩若(국살약)과 짜고 그녀의 소생인 치토슨을 후계 칸포로 세웠다. 반면, 청해 전선에서 당군과 대치 중이던 論欽陵(논흠릉)은 자기 陣中(진중)에 머물고 있던 치토슨의 異腹(이복)동생을 칸포로 옹립하려고 했다.

 

 토번은 敵前分裂(적전분열)의 위기에 빠질 뻔했지만, 論欽陵은 현명했다. 그는 치토슨을 칸포로 인정해 주는 대신에 兵權(병권)을 계속 장악하는 선에서 국살약 측과 대타협을 했던 것이다. 내부 안정을 이룬 논흠릉은 676년부터 唐에 대공세를 재개했다.

 

 676년 11월,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거느린 신라의 함대는 伎伐浦(기벌포) 전투에서 薛仁貴가 지휘한 唐의 함대를 대파했다. 唐의 함대는 금강 하류로 진입하려다 신라 함대에 포착되어 싸움이 벌어졌다. 신라 함대는 첫 전투에서 불리했으나 이어 전개된 大小(대소) 22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당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기벌포 해전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결전이 되었다. 이후 당군은 토번군에 고전, 신라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후 역사 전개가 그렇다는 것이지, 羅唐 간에 평화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唐은 신라 조정에 대해 계속 압박을 가했고, 신라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당군에 대비해 계속 국방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양국의 국교가 완전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56년 후인 渤海(발해)가 山東반도를 기습했던 732년 이후의 일이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唐은 渤海(발해)에 보복하기 위해 신라에 대해 연합작전을 요청했다. 신라는 원정군을 일으켜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략했으나 때마침 몰아친 한파로 다수의 병력을 잃고 戰果(전과)도 없이 회군했다. 그러나 唐은 신라의 군사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가 지배하고 있던 대동강 이남의 땅을 734년 신라 영토로 승인했다. 

 

 기벌포 전투 패전 후 唐은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新城(신성:요녕성 撫順)으로 더 후퇴시켰다. 677년에는 옛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 데 이어 朝鮮(조선) 국왕으로 책봉했다. 또한 중국의 변경으로 끌고 갔던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호를 요동에 再이주시켰다. 그러나 보장왕은 反唐(반당) 활동을 기도하다가 오지인 邛州(공주:사천성)로 귀양하고, 고구려 유민들은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등 변경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백제 義慈王(의자왕)의 왕자 扶餘隆(부여융)은 熊津都督(웅진도독)에 임명된 데 이어 帶方王(대방왕)에 책봉되었으나 이곳은 이미 신라가 지배하고 있었던 만큼 부임할 수 없었다.

 

 677년 5월, 토번은 扶州의 臨河鎭(임하진:지금의 사천성 西部)을 공격했다. 이어 9월에 청해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토번군은 河源道행군총관 李敬玄(이경현) 휘하의 左衛대장군 劉審禮(유심례)를 사로잡고, 당군 18만 명을 전사시켰다. 토번의 대공세였다.   

 

 그러나 677년 후반에서 678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티베트 고원에서 羊同(양동)의 부흥세력과 토번의 병권을 잡은 論欽陵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唐으로서는 토번에 복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唐 고종은 신라 공격에 집착했다.  다음은 <資治通鑑(자치통감)>儀鳳 3년(678) 9월 조의 기사이다.

 

 <高宗이 장차 發兵(발병)하여 新羅를 토벌하려 했다. 병으로 집에 있던 侍中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侵寇(침구:침입하여 노략질함)하니 바야흐로 發兵하여 西討(서토)를 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다시 東征(동정)을 한다면, 臣(신)은 그 弊害(폐해)가 公私(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東征을 중지했다. 丙寅에 이경현의 장병 18만이 靑海에서 토번군의 論欽陵 軍과 싸우다 패했다….>

 

 681년 7월, 문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신문왕의 즉위 직후 신문왕의 장인인 소판 金欽突(김흠돌), 파진찬 金興元(김흥원), 대아찬 金眞功(진공) 등이 역모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병부령 金軍官(김군관)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목을 벴다. 신라는 언제 재개될지 모른 상황에서 불평분자 및 親唐분자 등을 숙청하여 擧國(거국) 일치체제를 굳혔다.   

 

 <<사진-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그 무렵, 唐은 東돌궐의 반란을 진압하여, 신라에 외교적 압력을 가할 여유가 생겼다. 신문왕 원년(681)에 唐 고종은 신라 太宗武烈王의 시호가 외람되게 唐 太宗의 시호와 겹친다면서 이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추동한 武烈王-文武王 系의 立地(입지)를 흔들려는 의도였다. 신문왕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라는 국방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신문왕 재위 12년간에 신라는 군단 조직인 九誓幢(9서당:9개 군단)을 완성했다. (계속)

[ 2010-05-16, 10: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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