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을 군림한 武則天의 우먼 파워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5)/“政務(정무)에 권태를 느낀 玄宗이 23세의 楊貴妃를 만난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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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중국역사상 유일한 女帝(여제)

 

683년 12월, 武后(무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唐 고종이 죽고 中宗 李哲(이철)이 즉위했다. 中宗은 실질적인 통치자인 무후와 상의하지도 않고 자신의 장인을 侍中(시중)으로 임명하려 했다. 이에 격노한 무후는 684년 中宗을 폐위시키고, 中宗의 동생 李旦(이단)을 즉위시켰다. 그가 睿宗(예종)이다.

 

<<사진-측천무후>>

원래, 고종은 미천한 첩이 낳은 아들 忠(충)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武后는 황후가 된 후 忠을 廢嫡(폐적:嫡子 신분을 없앰)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 弘(홍)을 태자로 세웠다. 弘은 동정심 깊은 인물이었지만, 무후의 심기를 거슬러 독살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32세의 나이로 昭儀(소의)에서 황후가 된 무후는 폐위된 王황후와 蕭妃(소비)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과 코를 벤 후 술독에 담가 죽였다. 蕭妃는 생전에 두 공주를 낳았다. 태자 弘은 이 자매의 婚期(혼기)가 이미 찼으므로 시집을 보내도록 高宗에게 진언했다. 이것을 무후는 자신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였다.

 

고종과 무후 사이엔 弘·賢·哲·旦(홍·현·철·단) 등 모두 네 아들을 두었는데, 弘의 독살 후 賢을 태자로 세웠지만, 또 폐적하고, 다음 아들 哲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 賢을 폐한 이유는 무후 측근의 方士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것이 태자 賢의 사주에 의한 범행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方士는 태자 賢의 비행을 무후에게 자주 고자질했다.

 

690년, 武后(무후)는 국호를 大周(대주)로 고치고, 중국사상 유일한 女帝(여제)가 되었다. 武則天(무측천)은 폐위당한 아들 예종을 태자로 삼고, 그의 姓도 武씨로 고쳤다. 荊州(형주)의 도독 武士彠(무사확)의 딸인 무측천은 원래 문장에 재능이 있고 역사에 밝은 데다 太宗의 말기부터 庶務(서무)를 대신 처리하며 政務(정무)의 능력을 쌓았다.

 

女帝 무측천은 처음엔 懷義(회의)라는 승려를 궁중에 끌어들여 총애했지만, 그가 거들먹거리자 무후의 密命(밀명)을 받은 힘센 궁녀가 그를 때려죽였다. 이후 무측천은 張易之(장역지)·張昌宗(장창종)이라는 美소년을 곁에 두고 총애했다.

<<사진-당나라의 채색을 한 文官像(좌), 武官像(우)>>

 

무측천은 자기에 대한 世人의 비난이 들끓을 것을 두려워했다. 밀고가 장려되어 자기에게 비판적인 신하들을 붙들어 혹독하게 처벌했다. 설사 밀고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어도 처벌하지 않는다고 장려했기 때문에 밀고가 난무했다. 더욱이 索元禮(색원래)·周興(주흥)․來俊臣(내준신)이라는 酷吏(혹리:혹독하고 못된 관리)들이 고문을 가해 죄상을 마음대로 날조했다. 투옥된 사람은 대부분 반역자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주살되었다. 이때 백제 출신 명장 黑齒常之(흑치상지)가 모반죄로 처형된 것도 이들 혹리들의 조작이었다.

 

女帝는 파워게임엔 능숙했지만…

 

무측천이 여제로 등극한 大周 시대에 고구려의 유민 大祚榮(대조영)이 渤海國(발해국)을 창건했다. 668년 羅․ 唐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된 후 끝까지 항거한 다수의 고구려인들과 말갈족은 당군에 의해 營州(영주:지금의 요녕성 朝陽)에 강제로 옮겨진 바 있었다.

 

그후 696년에 이르러 營州에서는 무측천 정권의 지배에 불평을 품고 있던 거란(契丹)의 추장 李盡忠(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乞四比羽(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그들의 옛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들을 추격하던 大周의 軍에 의해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의 무리까지 합쳐 옛 고구려 영토였던 東牟山(동모산:지금의 길림성 敦化縣 敖東城)에서 자립하여 698년 震國王(진국왕)이 되었다. 대조영의 세력은 성장을 거듭하여 지금의 요동산 동쪽과 압록강 남부까지 영토를 넓히자 唐의 玄宗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712년 渤海郡王(발해군왕)으로 봉했다. 이후 大祚榮은 발해국왕을 칭하게 되었다.

 

최근 중국에서 唯一無二(유일무이)한 女帝로서 무측천의 인재 등용 등 治績(치적)이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權謀術數(권모술수)와 파워게임에 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男尊女卑(남존여비)의 시대에 女帝로서의 국정 장악에는 장애와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國威(국위)의 저하를 막기엔 力不足이었다.

 

‘파워 우먼’ 무측천도 나이는 이길 수 없었다. 나이 80을 넘긴 후에는 왕년의 기력․체력은 쇠잔해졌다. 名臣(명신) 狄仁傑(적인걸)의 천거로 張柬之(장간지)가 재상으로 기용되었고, 그 후 바로 무측천은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간지는 근위대장 李多祚(이다조:거란족) 등을 포섭하여 반란을 감행했다. 그는 태자를 동궁으로부터 맞아들이고,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반란군을 이끌고 玄武門(현무문)의 빗장을 때려 부수고, 궁중으로 돌입했다.

 

먼저 무측천의 男妾(남첩)인 장역지․장창종 형제를 궁중의 복도에서 베어 죽이고 병상의 무측천에 몰려가 退位(퇴위)를 강요했다. 무측천도 늙고 병들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주체는 그녀를 궁중으로부터 別宮(별궁)으로 옮기고, 체면치레로 則天大聖皇帝(측천대성황제)라는 尊號(존호)를 올렸다. 어떻든 그녀는 새 황제인 中宗의 친모였기 때문이다. 大周는 15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705년 겨울, 무후는 죽었다. 나이 82세였다. 그녀는 거의 50년간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中宗은 복위 후 國號(국호)를 大唐(대당)으로 복원시켰다. 그러나 무측천처럼 女帝가 되려는 여성이 또다시 등장했다. 바로 中宗의 처인 韋(위)황후였다. 韋황후는 사돈관계인 武三思(무삼사:무측천의 조카)의 헌책에 의해 張柬之 등 쿠데타로 中宗을 복위시킨 功臣(공신) 5명을 일단 지방관으로 좌천시킨 후 모두 주살했다. 710년 中宗이 韋황후와 武三思의 불륜관계를 눈치채자 韋황후는 남편 中宗을 독살했다.

 

<<사진-당삼채 여인상>>

 

韋황후의 딸 安樂公主(안락공주)는 武三思(무삼사)의 아들 武崇訓(무숭훈)에 시집가 있었다. 그녀는 皇太女(황태녀)가 되어 언젠가 女帝가 될 어머니 위황후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을 것을 꿈꾼 여인이다. 무삼사는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韋황후와 정을 통했는데, 눈치가 둔한 中宗은 韋황후와 武三思가 노름을 할 때 곁에서 계산해주는 역할까지 자청하기도 했다.

 

中宗을 독살한 후 韋황후는 中宗의 제4자 重茂(중무)를 황제로 세우고, 그녀 자신은 攝政(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에 의해 폐위되었던 睿宗(예종:李旦)의 아들 李隆基(이융기)가 擧兵(거병)하여 玄武門으로부터 궁중에 돌입하여 韋황후와 安樂공주를 참살하고, 그 일당도 모두 주살했다. 이융기는 자신의 아버지 睿宗(예종)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 2년 만인 712년 帝位를 아들 이융기에 물려주고 上皇(상황)이 되었다. 이융기가 바로 唐의 6대 황제 玄宗(현종)이다.

 

唐 玄宗의 권태 속에 傾國之色 양귀비의 등장

 

<<기록화-唐 玄宗>>

 

玄宗은 재위기간이 45년으로 唐 왕조 중 가장 길었다. 그의 즉위 초기에는 姚崇(요숭)·宋璟(송경) 등 賢臣(현신)을 재상으로 등용해 좋은 정치를 하고, 또한 문학․예술에 관심을 가져 현란한 盛唐(성당)의 문화를 開花(개화)시켰다. 이 시대는 ‘開元(개원)의 治’라 하여 太宗 시대의 ‘貞觀(정관)의 治’와 더불어 당의 最盛期(최성기)였다. 726년 唐의 인구는 706만 戶(호) 4142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현종은 재위 절반을 지나고부터 정무에 권태를 느끼고, 楊貴妃(양귀비)를 얻은 이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唐제국은 붕괴되어 갔다. 楊貴妃는 원래 현종의 아들 壽王(수왕)의 妃였다. 현종은 楊玉環(양옥환:양귀비의 本名)을 한번 보고 미모와 춤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뜻으로 가장해서 壽王과 이혼시킨 뒤 여승 楊太眞(양태진)으로 만들어 속세와 인연을 끊은 것으로 조작하고, 그후 그녀를 후궁에 넣어 총애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3세, 현종은 56세였다.

 

<<기록화-楊貴妃>>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독점했다. 양귀비의 일족은 부귀와 권세를 잡았다. 양귀비의 세 언니는 모두 황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6촌 오빠 楊釗(양쇠)는 원래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파락호였지만, 현종으로부터 國忠(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벼락 출세의 길에 올랐다.

 

732년 渤海(발해)의 장수 張文休(장문휴)가 함대를 이끌고 산동반도의 登州(등주:지금의 烟臺市)에 상륙하여 자사(州의 장관) 韋俊(위준)을 잡아 죽였다. 唐 현종은 左領軍(좌령군)을 급파했으나 登州에 도착했을 때 발해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때는 발해국의 2대 武王 大武藝(대무예)의 시기였다. 무인적 기질이 강렬했던 그는 영토 확장을 위해 변경을 정복했다. 특히 北만주 삼림지대의 肅愼(숙신)․勿吉(물길)系의 말갈 諸族(제족)에 대한 지배를 굳혀 갔고, 720년대 전반에는 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런데 726년, 武王의 강권지배에 반발한 黑水部(흑수부:松花江 남․북안 유역)가 唐朝에 조공을 바치며 唐의 관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동년, 唐은 黑水部를 黑水州로 삼고, 黑水도독부를 설치했다. 발해에 대해서는 남북으로 끼고 치는 형세를 취했던 셈이다.

 

이에 격노한 발해 武王은 黑水(흑수) 공략과 對唐 개전을 결심했다. 그의 동생 大文藝(대문예)에게 원정군을 지휘하도록 했지만, 大文藝는 唐과의 개전에 반대, 오히려 唐에 망명했다. 唐 현종은 대문예를 비호하면서 무왕과 대립시켰다. 이에 무왕이 선제공격을 가하여 등주를 습격했던 것이다. 드디어 唐과 발해는 본격적인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唐 현종은 신라에 請兵(청병)을 하여 남북으로부터 발해를 협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734년, 발해의 남쪽 국경까지 북진한 신라군은 마침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아무 전과 없이 회군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唐 玄宗은 羅唐전쟁 시기(670-676)에 신라가 쟁취한 대동강 以南의 땅을 신라의 영토를 인정했다. 무려 60년 만에 김춘추-이세민(당태종)의 ‘648년 협약’이 실현되어 국교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계속)

 

 

 

 

<<사진-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상>>

[ 2010-05-17, 11: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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