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 몰락을 가져온 ‘안록산의 亂’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6)/중국사 역대 제1의 美人으로 손꼽힌 양귀비, 비단 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다

鄭淳台 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체중 200kg의 雜胡를 목욕시킨 양귀비

 

742년, 현종은 安祿山(안록산)을 平盧(평로:지금의 요녕성 朝陽)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안록산은 이란系 소구드人인 아버지와 돌궐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중국식 표현으론 雜胡(잡호)인 그는 玄宗의 측근들에게 많은 뇌물을 먹여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744년 후 안록산은 范陽(범양:지금의 북경 일대) 절도사도 겸임했다.

<<사진-영화 '大唐芙蓉園'속의 안록산>>

 

현종은 745년 楊太眞(양태진)을 貴妃(귀비)로 격상시켰다. 747년 안록산은 부수상격인 御使大夫(어사대부)를 겸직했다. 안록산의 희망에 따라 그는 楊貴妃의 義아들이 되었다. 안록산은 산더미만한 뇌물을 가지고 入京하여 양귀비의 궁전에 들어와 밤새 노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양귀비의 거처에서 흘러나오는 嬌聲(교성)을 듣고 현종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측근에 물었는데, “貴妃가 녹산 아기를 목욕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해괴망칙한  얘기도 전해진다.

 

<<안록산은 이란계 소구드人 아버지와 돌궐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 소장의 소그드인 像>>

 

외부에서는 그와 양귀비의 스캔들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지만, 현종은 의심하지 않았다. 안록산은 200kg이 넘는 거구였는데, 胡旋舞(호선무)를 잘 추고 붙임성이 좋아 현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6개 국어를 구사했다. 祿山은 소구드語로 ‘로쿠샨’ 으로서, 그 의미는 빛(光)이다.

 

750년, 16년간 재상직에 재직하면서 나라를 기울게 한 간신 李林甫(이임보)가 병사하자 후임 재상에 양귀비의 6촌 오빠 楊國忠(양국충)이 임명되었다. 751년, 안록산은 河東(하동:산서성 太原)의 절도사도 겸직했다. 한 사람이 3개 절도사를 겸직한 것이었다.

 

751년, 高句麗 유민 출신 唐의 安西(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절도사이며 西域(서역) 개척의 영웅이었던 高仙芝(고선지:?-755)가 탈라스 河畔(하반·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과 싸워 패전했다. 이 패전에 의해 唐은 실크로드 西部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고선지는 고구려의 멸망 후 아버지 高舍鷄(고사계)가 甘肅省(감숙성)으로 강제 이민되어 그곳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던 중 낳은 아들이다. 나이 20세에 아버지의 공로에 의해 遊擊將(유격장)으로 등용되고, 20세에 장군으로 올랐으며, 740년경 천산산맥의 達奚部(달해부)를 공략한 전공으로 安西의 副都護(부도호)로 승진했다.

 

747년, 토번과 이슬람의 覇者 압바스朝가 동맹하여 당을 견제하려고 하자 行營(행영)절도사로 발탁되어 당병 1만을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압바스朝와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이슬람勢의 東進(동진)을 저지했다. 이 전공으로 그는 特進 겸 左金吾대장군에 올랐다.

 

750년의 2차 원정에서는 그의 安西도호부의 治所(치소)인 쿠차를 출발하여 압바스朝와 동맹을 맺으려는 타시겐트(石國)의 국왕을 사로잡아 長安에 호송한 공로로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 이때 長安에서 文臣들의 현지사정을 무시한 주장에 의해 포로가 된 타시켄트 국왕을 처형하는 실책을 범해, 이듬해 서역 각국과 압바스朝가 연합하여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고선지는 7만 대군을 거느리고 제3차 원정에 나섰지만, 동맹군인 카르루크族의 敵前(적전) 배신으로 대패했다. 이때 唐軍(당군)으로 종군하던 종이 제조 기술자들이 포로가 되어 제지법이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로 전해지게 되는 文明史的 대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국사를 뒤흔든 대사건-祿山의 반란

 

755년 11월, 안록산은 근거지인 范陽(지금의 北京)에서 반기를 들었다. 안록산의 거병은 중국사를 뿌리째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다. 안록산의 핵심부대는 東羅(동라)·거란·室韋(실위)의 정예 기병 8000기였다. 그들은 모두 안록산의 義子들이었다. 여기에 절도사의 임지인 范陽(범양)·平盧(평로)·河東의 기병·보병을 합쳐 15만~20만의 병력이었다.

 

이에 앞서 안록산은 자기 근거지의 배후에 있는 거란족과 그것과 비슷한 종족인 奚(해)를 쳤다. 배후 불안을 제거한 것이었다. 안록산은 그의 둘째아들 安慶緖(안경서)와 상당한 병력을 그의 본거지 범양 일대의 방어를 위해 잔류시켰다.

 

안록산이 직접 이끈 多종족 혼성 부대는 唐朝의 궁정정치를 장악한 楊國忠을 제거하겠다는 명분 아래 우선 副수도인 洛陽을 향해 남하했다. 반란군은 河北 각지의 정부군으로부터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오랜 평화에 물젖어 있던 당군은 무력했다. 반면에 안록산의 기병은 오랜 기간 거란·奚族(해족)과의 전투로 단련되어 있었다.

 

叛軍(반군)은 거병 겨우 1개월여에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런 군세로 계속 밀었다면 唐朝는 멸망할 뻔했다. 그러나 안록산은 그러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안록산의 병 때문이었다. 그의 시력은 날로 희미해지고, 200kg의 몸은 온갖 질병으로 무너지고, 정신은 난조를 보였다.

 

756년 정월 1일에 안록산은 낙양에서 황제에 오르고, 국명을 大燕(대연)이라 칭했다. 洛陽 입성 18일 만이었다. 건국·즉위·建元(나라의 年號를 세움) 등의 행사로 안록산의 體調(체조)가 급속히 떨어졌다. 이에 따라 수뇌부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장병들은 낙양의 화려함에 정신을 빼앗겼다. 이리하여 천하의 요충인 潼關(동관)을 사이에 놓고 玄宗 정부와 안록산의 반군이 대치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한편 탈라스 전투에서 패전하고 귀국한 고선지는 그래도 그동안의 전공이 인정되어 密雲郡公(밀운군공)으로 봉해져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록산의 반란은 그를 다시 전장으로 내몰았다. 唐朝는 天武軍(천무군) 11만 명을 급히 조직하고, 원수에 황족인 榮王, 부원수에 고선지를 임명했다. 따라서 사실상의 작전지휘관은 고선지였다. 이때 고선지의 옛 部將으로서 後任 안서절도사가 된 封常淸(봉상청)이 上京, 토벌군의 선봉장이 되어 洛陽으로 진군했지만, 중도에서 참패했다. 토벌군은 갑자기 모집한 장정들로 편성되어 훈련도 받지 못해 반군을 만나면 으레 도주했다.

 

이때 고선지는 선봉군의 뒤를 따라 陝州(섬주)까지 진출해 있었다. 고선지와 봉상청은 물러나 關中 최대의 요새 동관을 지켰다. 두 장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감독관으로 종군하던 환관이 뇌물을 받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陝州에서 후퇴할 때 그곳에 보관 중이던 정부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분배한 사실을 조정에 ‘착복’이라 모함하여 고선지는 진중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적에게 넘어갈 양곡을 불태우기보다는 백성들에게 분배한 것은 오히려 잘한 일이었다. 唐朝는 많은 異민족 장수를 등용하기도 했지만, 이처럼 처벌도 가혹했다.

 

후임 장수인 哥舒翰(가서한)도 多종족 혼성의 21만 대군을 이끌고 처음엔 고선지처럼 동관을 굳게 지키기만 했다. 그러나 노름꾼 출신의 재상 楊國忠의 충동질에 의해 玄宗의 재촉을 받은 가서한은 마지못해 출격하고 말았다. 가서한은 안록산의 정예 기병에 참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양 진영의 밸러스가 일거에 무너졌다. 가서한은 그의 아버지가 투르크系 突騎施(돌기시), 어머니가 이란系로 안록산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6월16일, 반군이 長安을 점령했고, 그 직전에 현종은 사천을 향해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長安 서쪽 100리의 馬嵬驛(마외역)에서 호위 장병들이 下剋上(하극상)을 일으켜 楊國忠과 양귀비의 언니들을 참살했다. 그런 후에도 장병들은 만족하지 않고 玄宗에게 양귀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중국에서 역대 제1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양귀비는 비단 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었지만, 玄宗은 얼굴을 가리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馬嵬驛’ 이라는 간판이 붙은 기차역이 내려다 보는 야산 기슭에 양귀비의 묘가 남아 있다.

 

<<사진-西安 부근 야산 기슭에 남은 양귀비의 묘>>

 

마외역에서 현종은 四川으로 남하하고, 태자는 서북쪽 靈武(영무: 지금의 寧夏回族자치구의 수도 銀川)로 떠났다. 이어 현종은 上皇으로 물러나고 황태자가 즉위했다. 그가 肅宗(숙종)이다.

 

이번에는 안록산 진영에서 自中之亂(자중지란)이 일어났다. 악성 종기로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 안록산은 애첩의 아들을 그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후계자의 지위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의 아들 安慶緖(안경서)가 밤중에 낙양 궁전 내 침소에서 안록산을 암살했다. 757년 1월의 일이었다. 안록산의 나이 55세, 거병 후 14개월 만이었다.

 

이에 안록산의 오랜 同甲 친구이며 그 휘하의 제1將인 史思明(사사명)이 范陽(범양: 지금의 北京)에서 自立했다. 싸움은 3파전의 양상을 띄었다. 이때 몽골고원에는 건국 13년째의 위구르 遊牧국가가 번영하고 있었다. 군사적 실력으로 보면 范陽의 史思明, 洛陽의 安慶緖, 靈武의 肅宗(숙종)을 웃돌고 있었다. 숙종 정부는 위구르國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후 위구르國은 唐朝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결국 安慶緖는 사사명에게 討死(토사)되었다. 사사명은 낙양에 들어와 大燕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장남 史朝義(사조의)에게 암살되었다. 안록산과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사사명도 안록산처럼 이란系 소구드人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으며 똑같이 후계문제로 아들에게 피살되었던 것이다.

 

吐藩·위구르 2强시대에 신라는 景德王·聖德王의 황금시대 이룩해

 

762년, 上皇 현종과 숙종이 잇달아 사망하고 숙종의 아들 代宗이 즉위했다. 唐측이 사조의로부터 洛陽을 탈환한 것은 위구르軍의 도움 때문이었다. 북쪽의 근거지로 도주한 사조의가 부하의 배반으로 살해된 것은 763년 1월의 일이었다. 안록산의 거병으로부터 7년여 만에 대동란의 막이 내렸다. 중국사에서 이를 安史의 亂(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바로 그해(763년) 吐藩은 長安을 일시 점령했다. 토번과 당은 장안 점령 전 토번은 이미 당조의 혼란을 틈타 河西·隴右·四川에 침입하여 영토로 편입했다. 한편 唐朝는 안사의 난 때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매년 2만 필의 비단을 위구르에 바쳐왔는데, 난후 위구르는 약정된 양보다 더욱 많은 비단을 요구했다.

 

<<지도-아시아 東部의 2强, 위구르 유목국가와 토번>>

 

安史의 난 후, 唐朝은 전부터 변경 수비를 위해 설치했던 10개 절도사 이외에 더 많은 절도사를 두고 내륙부의 치안 유지를 맡겼다. 그런데 이 절도사가 半독립정권을 형성하여, 唐朝의 운명을 결정하는 암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河北의 3진, 河南의 2진은 횡포가 극심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李定己(이정기) 일족이 淄靑(치청:지금의 산동성)의 절도사가 되어 약 50년간 半독립정권을 형성하여 대운하의 요충지를 막고, 이의 토벌을 주장한 재상을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제, 아시아 동부에서는 토번과 위구르의 2强(강)체제가 형성되었다. 789~792년에 걸쳐 2强은 격돌했다. 天山산맥 북록의 요충 비슈 바리크(北庭)의 귀속을 둘러싸고 토번과 위구르가 전투를 벌였다. 위구르가 약간 우세한 가운데 화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天山 동부지방은 위구르, 河西·타림분지·파미르는 토번이 각기 장악하는 것으로 안정화되었다.

 

唐朝는 太宗 이래 玄宗 때까지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을 감행해 왔으나 安史의 亂 이후의 약체화로 주변국과 평화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東아시아 세계도 안정화되었다. 中國 땅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기만 하면 그들은 으레 침략전쟁을 벌였다. 이런 점에서 唐朝의 약체화는 그 주변국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때 신라는 聖德王으로부터 京德王에 이르는 黃金時代(황금시대)를 이룩했다. 그 당시에 축조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세계 제1류 문화국가 新羅’의 物證(물증)으로 현존하고 있다. *

 

<<사진-불국사의 석굴암>>

[ 2010-05-18, 10: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