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테베 작전 지휘관 요니의 生과 死
조국이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주리라는 것을 믿었을 그는 죽을 때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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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테베 작전의 지휘관인 요나탄 네탄야후의 父母는 미국 코넬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다. 남동생이 둘이었다. 벤자민 네탄야후는 현재 이스라엘 총리이고, 이도 네탄야후는 작가이다. 세 형제는 모두 이스라엘 군의 엘리트 부대인 사이예레트 마트칼 특공대에서 근무하였다.
  
   네탄야후는 1964년에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공수부대에서 근무하고 싶어하여 장교 과정을 밟고 중대장이 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시나이 사막과 골란 高原에서 싸웠다. 敵陣에 남겨진 동료 병사를 구하려다가 팔꿈치에 총상을 입었다.
   6일 전쟁 후 그는 미국에 가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년 뒤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그는 1972년에 특공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시리아 고관들을 납치해 와서 시리아에 억류된 이스라엘 조종사와 바꾸도록 했다. 이듬해엔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을 죽인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검은 9월단’의 단원들을 암살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요나탄 네탄야후는 골란고원에서 40명의 시리아 특공부대원들을 사살하였다. 시리아 戰線에서 부상당한 채 남겨진 한 중령을 구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세 번째 등급인 ‘무공수훈 메달’을 받았다. 네탄야후는 기갑부대에 근무를 자원하였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 때 기갑부대 장교들을 많이 잃었다. 그는 기갑부대 장교로서도 부대를 잘 이끌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5년 6월 네탄야후는 특공부대장으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7월4일 우간다 엔테베 공항을 기습,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우간다 군인들이 억류중인 100여 명의 유태인들을 구출하는 특공작전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건물 바깥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30세였다. 특공대원 100여 명이 참여한 전투에서 그가 유일한 戰死者였다. 엔테베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요나탄 작전’이라고 불린다. 죽을 때 요나탄 네탄야후는 이혼한 상태에서 애인과 동거중이었다.
  
   7월6일 거행된 장례식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국방장관 페레스는 弔辭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총탄은 이스라엘의 가장 좋은 아들, 가장 용감한 戰士, 가장 유망한 지휘관의 심장을 찢어놓고 말았다.”
   1980년에 네탄야후의 편지 모음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글이었다. 戰線의 급박한 상황에서 쓰여진 글이라 이스라엘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이였지만 전쟁 기술을 연마하는 데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항상 그러하였듯이 아무리 善한 것이라도 자신을 물리적으로 지킬 힘이 없으면 惡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요나탄 네탄야후의 생애를 그린 영화의 제목은 ‘나를 따르라’(Follow Me)이다. 이스라엘 장교들에겐 ‘돌격’이란 명령이 없다고 한다. ‘나를 따르라’뿐이다. 그래서 장교들의 戰死率이 매우 높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代價를 치르기 위하여’라는 연극이 작년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요나탄 연구소’는 테러 연구를 전문으로 한다. 네탄야후 총리가 테러에 강경한 것도 형의 죽음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네탄야후 총리도 특공대원으로 근무중, 납치된 벨기에 여객기 승객을 구출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我軍이 쏜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대위로 제대하였다.
   ‘요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젊은 군인은 죽어서 神話가 되었다. 조국이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주리라는 것을 믿었을 그는 죽을 때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군인을 경멸하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풍토와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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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電光石火-엔테베 특공作戰 비화
  
  
   라빈 수상이 내각을 소집, 공식적으로 허가 여부를 토의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네 대의 비행기가 이미 이륙한 뒤였다. 내각이 부결하면 비행기를 귀환시킬 작정이었다.
  趙甲濟
  
   1976년 7월4일에 있었던 엔테베 인질 구출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휘하였던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무엇보다도 지도부의 창의성과 신속성에 놀라게 된다.
  
   공군사령관 펠레드 소장의 다소 거친 發想을 무시하지 않고 作戰계획으로 발전시켜 집행하는 데 걸린 시간은 6일이었다. 이 사이 105명의 인질이 잡혀 있던 엔테베 공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훈련을 하고, 내각의 의결을 거쳤다.
  
   라빈 수상이 내각을 소집, 공식적으로 허가 여부를 토의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네 대의 비행기가 이미 이륙한 뒤였다. 내각이 부결하면 비행기를 귀환시킬 작정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풀려난 非유태系 인질들로부터 납치범들과 공항의 내부 구조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우간다 군의 훈련을 도운 인연으로 독재자 이디 아민과 친하였던 퇴역 장교 발 레브는 수시로 아민과 통화, 정보를 수집하고, 인질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이스라엘 군은 엔테베 공항의 모형을 急造, 훈련을 시켰다. 허큘리스 수송기 석 대가 엔테베 공항에 내려 구출작전을 벌이는 동안 이스라엘 공군사령관과 총참모부의 작전사령관이 다른 비행기에 타고 상공에서 지휘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장교들은 늘 앞장 선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자 마자 벤츠를 내렸다. 마치 이디 아민이 외국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인질구출 작전에 걸린 시간은 30분이었다. 100명의 이스라엘 특공대 가운데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29명이었다. 이들은 일곱 명의 납치범들, 30명 이상의 우간다 군인들을 사살하였다. 비행장에 있던 11대의 미그 17기를 파괴하고 이륙하였다.
  
   이스라엘측 戰死者는 1명인데, 그가 특공대장 요나탄 네탄야후 중령이었다. 105명의 인질 가운데 세 명이 죽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를 태운 군용기는 8000km를 왕복하였다. 돌아올 때 케냐에 잠시 기착하였다. 우간다는 유엔 안보리에 항의하였으나 안보리는 이스라엘의 특공작전을 자위권 행사로 인정, 규탄 결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납치된 여객기엔 248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프랑스인 기장을 풀어주었으나 機長은 인질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면서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남았다가 구조되었다.
  
   엔테베 작전은 기획부터 실행까지가 電光石火였다. 이스라엘의 군부와 국가 지도부는 위기 때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라빈 전 총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가장 큰 敵은 관료주의이다"고 말한 바 있다.
  
   연평도 도발 때 우리 군부가 이스라엘 지휘부처럼 행동하였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 2010-12-08, 19:57 ]
  
  
  .
[ 2010-12-11, 23: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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