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선거를 하느니 차라리 선거를 하지 말지.”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 마산, 부산에서 부정 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는 가운데 박정희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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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炳注의 관찰기
  
  1960년 이른 봄 군사 혁명을 모의하고 있던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가깝게 관찰한 사람 가운데는 소설가 李炳注(이병주)도 있었다.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던 그는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과 함께 부산언론의 論調(논조)를 이끌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본 것은 경상남도 도청의회 회의실에서다. 무슨 일이었던가는 기억할 수 없는데 愼道晟(신도성) 도지사가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고 나는 사장을 대리하여 참석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여윈 몸집으로 작달막한 군인이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색안경을 쓰고 가죽으로 된 말채찍을 든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도지사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회의장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후다닥 일어나서 휙 하고 나가 버렸다. 회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도지사에게 물어보았다. 신도성이 쓴 웃음을 띠고 한 대답을 요약하면, 그는 박정희 소장인데 자리가 도지사석과 시장석과는 먼 末席(말석)인 것이 불만이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대통령들의 초상》)
  
  이병주는 그 뒤 박정희, 황용주, 조증출과 함께 더러 술자리에서 어울렸다. 국제신보 軍(군) 출입 기자 설영우가 이병주의 논설에 동감과 관심을 보이는 박정희에게 한 번 만나 볼 것을 권해서 이루어진 자리가 그 뒤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나에게 던지는 그의 첫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 주필, 나라가 이래 갖고 되겠소?” 그런데 이것은 묻는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자세를 다지는 일종의 제스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용주에게 대한 첫 말은 “어때, 부인 잘 계시나”였다. 이렇게 한마디 해놓고는 별반 말이 없다. 묵묵하게 잔을 비우고 있는 사이 사이 間投詞(간투사)를 닮은 말이 끼일 뿐이다.
  
  “부정 선거를 하느니 차라리 선거를 하지 말지.”
  
  그러곤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놈 저놈 모두 썩어빠졌어” 하고 혀를 찼다. 그러다가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온다.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마산사건에 제5列(열)이 섞였다고 정부가 발설했을 때이다. 여느 때처럼 “이 주필, 나라가 이래 가지고 되겠소” 해놓곤 대뜸 시작했다.
  
   “도대체 5열이란 게 뭣고. 5열이 약방의 감초가? 감당 못 할 사건이 생기면 5열이 튀어나와. 5열이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 국민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생사람 죽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원!”
  
  박정희 소장은 대개 묵묵했지만 입을 열었다 하면 나라 걱정이고 민족 걱정이었다. 그는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을 호흡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날짜를 1960년 3월15일로 정한 것은 3월26일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 85세 생일이란 것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자유당의 온건파를 이끌고 있었던 李在鶴(이재학) 국회 부의장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당 강경파는 ‘노인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탄신일 이전에 당선시켜 드린 다음 탄신일을 거족적인 祝日(축일)로 하자’고 早期(조기) 선거를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2월15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미국 월트 리드 육군병원에서 서거했다. 이로써 이승만 후보는 단일 후보로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다. 문제는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 강경파에선 年老(연로)한 이승만 대통령이 有故(유고)가 될 경우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직에는 반드시 이기붕을 당선시켜 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유당은 崔仁圭(최인규) 내무장관과 李康學(이강학) 치안국장 지휘 하에 행정과 경찰 조직을 총동원한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게 되었다. 이재학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경무대를 찾는 자유당 간부들에게 하는 당부가 ‘공명선거 부탁뿐이었다’고 한다. 이재학은 지역구인 강원도 홍천에 내려와 보고는 깜짝 놀랐다. 경찰서장의 진두 지휘하에 투·개표 부정 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의원이 “당장 취소하라”고 해도 서장은 난색을 보였다.
  
  “치안국장이 ‘나의 육성으로 변경을 명령하기 전까지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밀어붙여라’고 했으니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권력자가 하나를 하라고 하면 아랫사람은 열 개를 알아서 하려는 이 과잉 충성은 조선 왕조에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끈질긴 정치 문화이다. 권력자가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권력자를 위한다면서 열심으로 무리하는 아랫사람을 제어하는 일인데, 그런 아부자는 실은 권력자를 위한다면서 私益(사익)을 챙기고 私怨(사원)을 갚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군대도 부정 선거 공작에 휩쓸렸다.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은 비리의 온상이던 후생 사업을 금지시키고 미국의 선진 행정기술을 도입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부정 선거 공작에 앞장서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4·19 뒤의 혼란기 때 군에서 밀려난다.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陸本(육본)으로부터 내려오는 부정 선거 지시에 협조하지 않았다.
  
  3월 어느 날 작전참모 金景沃(김경옥·준장 예편, 주일 대사관 공사 역임) 대령은 특무대장 모 대령과 함께 사령관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부관 손영길 대위가 투표 통지서를 가져와서 박정희 사령관에게 드렸다. 박정희는 용지를 받아들더니 “이 따위 투표는 해선 뭘해”라면서 북북 찢어 내버렸다. 김경옥은 특무대장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상부에 보고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대신 자신이 나서서 장병들에게 기권 방지 운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손영길은 “그때 박 장군은 자신이 부산으로 주소지를 옮긴 지 석 달이 안 되어 부산에서는 투표권이 없는데도 투표용지가 나온 것을 보니 원천적 부정 선거라고 흥분했다”고 기억한다. 그때 송요찬 참모총장 부관은 손 대위와 육사 11기 동기인 金聖鎭(김성진) 대위였다. 김 대위가 손영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부산병기학교에 교관으로 있는 육사 후배가 여당 후보 지지 교육을 사병들에게 하라는 지시를 거부했다가 구속되었으니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손 대위는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즉시 전화기를 들어 병기학교장에게 지시했다.
  
  “그 장교에 대한 처벌 조치를 중지하시오.”
  
  “특무대에서 한 일입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사령관인데. 내 명령대로 하시오.”
  
  馬釜사태
  
  3·15 투표일이 임박하자 군내 부정 선거를 지휘하던 방첩대 본부에서 군수기지사령부로 회식비를 내려 보냈다. 작전참모 김경옥 대령이 그 돈을 수령해서 박정희에게 주었더니 “몽땅 돌려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김경옥은 돈을 부산 지구 특무대장에게 갖다 주고는 “너희가 쓰고 보고할 때는 우리가 썼다고 하라”고 했다.
  
  투표 며칠 전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부산에 왔다. 송 총장은 출입 기자들을 시내 중앙동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기자들이 ‘박 사령관은 근래 기자들과 접촉이 없다’고 불평했다.
  
  “거, 잘 봐주시오. 그러니 오늘 이렇게 모인 게 아니겠소. 앞으로 중대사도 있는데. 어디 박 장군도 바빠서 그렇지 기자 선생님들을 싫어해서 그랬겠소?”
  
  이 자리에 있었던 부산일보 金鍾信(김종신) 기자는 1966년에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장군이 ‘× 같은 새끼!’라고 내뱉었다”고 《零時(영시)의 횃불》에서 썼다. 이 책을 읽은 박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 김종신을 부르더니 “내가 송 장군에게 그런 욕을 한 기억은 없어요”라고 했다. 김종신은 “맞습니다. 제가 실감을 주기 위해서 좀 과장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가 덧붙였다.
  
  “그 말 지우면 책이 안 팔리나.”
  
  “역시 그런 대목이 있어야 박력이 풍기고 판매에도 도움이 됩니다.”
  
  “많이 팔린다면 할 수 없지.”
  
  1960년 당시 문제의 술자리에 참석했던 국제신보 설영우 기자는 ‘송요찬이 이번 선거에 협조해 달라는 당부를 하자 박정희가 여러 기자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여 분위기가 어색해졌는데 송요찬은 그런 박정희 사령관을 상당히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송요찬 총장과 특무대가 주도한 군내의 부정 선거 공작에 반대한 장교들은 많았다. 이한림 육사교장은 “사관생도들에게 부정을 가르칠 수는 없다”면서 ‘투표장에 나가서 서 있어만 달라’는 특무대의 부탁도 거절했다고 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생기는 법. 2월28일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부정 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당국이 일요일인 이날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등교를 시킨 데 반발한 것이다.
  
  투표일인 3월15일에는 자유당의 노골적인 투표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터졌다. 시민들이 파출소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경찰이 발포하여 10여 명이 죽었다. 마산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계지 역할을 한 곳은 부산의 언론과 고등학생들이었다. 1979년에 일어난 釜馬(부마)사태는 부산 시위가 마산으로 번졌다가 권력의 심장부로 옮겨 박 정권을 붕괴에 이르게 한 경우이고, 1960년엔 마산이 먼저 일어나고 부산이 응원하여 서울로 北上(북상)한 馬釜(마부)사태였다. 나중에 부산 지구 계엄분소장이 되는 박정희나 그의 대구사범 동기생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은 학생 시위를 지원하는 편에 섰다. 황씨의 증언.
  
  <3월15일 마산 주재 기자가 ‘북마산 파출소가 불타고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냈는데 경남 도경에서 보도관제를 해달라는 전화 연락을 해왔다. 저녁 때 부산일보와 자매 관계에 있던 부산 문화방송 아나운서가 부산일보 사장실에 와서 3·15 선거 발표 내용을 읽고 있었다. 나는 마산 시위 기사를 적어 아나운서에게 전해주곤 ‘방금 들어온 특급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읽도록 했다.
  
  중간 중간 그런 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金智泰(김지태) 사장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도경국장이 와서 생방송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장과 도경국장 두 사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면서 아나운서에게 계속하라고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고 나서 일본 방송을 틀어보았더니 ‘한국 부산 문화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하고 마산 시위가 보도되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문화방송 기자가 마산 시위 현장에 가서 경찰의 발포 銃聲(총성)까지 녹음해 가지고 와서 일종의 시위 중계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4월11일 저녁 최루탄이 눈에 박힌 金朱烈(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부산일보 사진부 기자가 그 사진을 특종했다. 그때는 신문이 매일 조·석간을 내고 있었는데 ‘다음날 조간에 시체 사진을 낼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있었다. 옥신각신 끝에 ‘아침이고 지랄이고가 어딨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실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은 다른 신문에 轉載(전재)되면서 전국의 민심을 확 돌려놓았다>
  
  개국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부산 문화방송은 거의 매일 총성과 구호, 비명과 노래가 들려오는 시위 현장 속에 기자를 들여보내 생생한 시위 중계방송을 했는데 이 때문에 시청률이 높아지고 광고가 몰려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방송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잡았다.
  
  방송이 시위를 현장 중계한 것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승만 정부의 언론 통제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부산일보는 김주열 시신 사진이 나간 날 1면에 金泰洪(김태홍) 논설위원이 쓴 ‘馬山(마산)은!’이란 자극적인 시도 실었다.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 속에 괴면 / 눈동자에 彈丸(탄환)이 박힌 少年(소년)의 屍體(시체)가 / 대낮에 표류하는 / 학생과 학생과 시민이 / ‘戰友(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愛國歌(애국가)와 / 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埠頭(부두)인 것이다>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는 가운데 박정희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5월8일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미국 방문을 위해 떠날 시점을 거사일로 잡아 놓고 동지들을 포섭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급박해져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3월17일 부산으로 내려온 육본 戰史監(전사감) 崔周鍾(최주종) 준장은 박정희를 관사에서 만나 거사일을 4월 초순으로 앞당기는 문제를 의논했다. 육본의 柳元植(유원식)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로 휴양을 갈 때 납치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박정희가 이낙선에게 구술한 《증언록》에 따르면 당시 동원이 가능한 부대는 대강 이러했다.
  
  ㆍ부산 지역: 군수기지사령부 예하 부대, 홍종철 중령의 고사포부대, 포항 김동하 소장의 해병사단.
  
  ㆍ서울 지역: 육본 전사감 최주종 준장, 육본 유원식 대령, 전두열 대령, 김종필 중령 외 영관급 약간명.
  
  ㆍ대구 지역: 2군사령관 장도영 중장, 안동사단의 윤태일 준장, 이주일 2군 참모장.
  
  ㆍ인천 지역: 고사포 대대장 정석윤 중령.
  
  ㆍ진해: 陸大(육대) 재학생 공작 중
  
   위의 명단엔 장도영 중장과 같은 포섭 대상자도 들어 있고 아직 병력 동원의 세부 계획도 마련되지 않았다. 군사 혁명의 구상과 포섭 단계이지 행동 계획을 구체화시킬 수준으로 성숙되지는 않고 있었다.
[ 2011-01-18, 10: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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