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냐 국민이냐’ 기로에 선 國軍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은 4·19 시위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서 “여러분들이 못다 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습니다”는 弔辭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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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구 계엄사무소장 朴正熙
  
  공군 참모총장 출신인 김정렬 국방장관은 4월19일 오후 5시를 기해서 서울 등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서울로 진입하는 양평 주둔 15사단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만일의 가능성에도 대비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계엄사령관이 야심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주위에서 잘못 부추긴다면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1군 사령관 劉載興(유재흥) 중장을 통해서 견제하기로 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남겼다.
  
  김정렬은 일본 육사 54기 출신으로서 유재흥보다 1기 선배인데다가 집안끼리도 절친한 사이였다. 김정렬 장관이 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로 전화를 걸어 유재흥 사령관을 찾으니 그는 마침 교육에 참석하러 서울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김정렬과 유재흥은 중앙청 뒤편에 있는 별채 건물에서 만났다.
  
  “병력을 동원해서 계엄사령관을 꼼짝 못 하도록 감시를 해야겠소. 몇 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소?”
  
  “2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지휘소를 설치할 생각이오?”
  
  “중랑천 부근에 주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재흥 사령관은 중랑천 근처 한독약품 공장을 임시 지휘소로 설치하여 서울 시내로 들어간 15사단의 擧動(거동)을 감시, 견제했다는 것이다. 유재흥 장군은 15사단으로 가서 趙在美(조재미) 사단장과 중대장급 이상 장교들을 집합시킨 다음 “실탄은 휴대하되 내 명령 없이는 사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회고록 《격동의 세월》). 그는 ‘임시 지휘소에서 帶同(대동)한 참모들과 함께 사태를 주시하면서 군부의 예상치 않은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감독했다’고 썼다.
  
  2개 사단을 서울의 외곽에 배치했다는 김정렬의 언급은 사실과 다르다. 육군의 20개 전투사단 중 18개를 지휘하는 1軍司(1군사·당시는 3군 사령부가 창설되기 전)의 태도에 대해서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도 관심이 많았다. 4·19 며칠 전 매카나기 대사는 유재흥 장군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자꾸 시위가 일어나고 국민들이 불안해하는데 야전군에선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야전군은 절대로 정치에 간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선을 지키는 게 우리 임무입니다.”
  
  유재흥은 “그는 무슨 낌새를 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 하더라도 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답변에 안심하는 듯했다. 미국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군부보다는 야당이 집권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을 것이다”고 증언했다. 그 동안 이승만 대통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쳐 왔던 국군은 이제 권력의 편에 서느냐, 국민의 편에 서느냐의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19일 AP통신은 ‘군대는 정숙히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데모대원들에게 손뼉을 치던 沿道(연도)의 구경꾼들로부터 환영의 갈채를 받았다. 몇몇 군인들도 미소 짓고 손을 흔들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9일 부산에서는 학생 데모대에 합세한 군중 속에 군인도 끼어 있어 이들은 학생들에게 돌을 날라다 주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부산에서도 돌을 던지고 放火(방화)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15명이 죽었다. 4월19일 시위로 인한 사망자는 서울에서 110명, 마산 10명, 광주 8명을 포함하여 모두 143명이었다. 4월19일 밤 8시를 기해 정부는 계엄포고문 제3호를 통해서 계엄부사령관에 장도영 2군 사령관, 부산 지구 계엄사무소장에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 대구 지구는 尹春根(윤춘근) 소장, 광주 지구는 朴炫洙(박현수) 소장, 대전 지구 계엄사무소장에는 林富澤(임부택) 소장을 각각 임명했다. 박정희 소장의 이름이 언론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 11년 전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처음이었다.
  
  박정희 소장은 이날 저녁 경고문을 발표했다.
  
  <시민 여러분과 학생 諸君(제군)은 냉정과 이성을 찾아 여러분의 가정으로 돌아가 주시기를 바라며 만약 본인의 이와 같은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고 법과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지극히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며 본인은 부득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박 소장은 通禁(통금) 시간을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로 연장했다. 박정희는 부산의 기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문: 집회는?
  답:모든 집회는 계엄사령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문: 마산 사건의 경우, 소요 주모자 색출에 경찰의 고문이 많았다는데 부산의 경우는?
  답: 이제부터는 수사에 그런 일은 없고 어디까지나 인권을 존중할 것이다.
  
  문: 소요 주모자가 적발되면 엄벌할 것인가?
  답: 아직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상부 지시에 따르겠다.
  
  문: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어떻게 되나?
  답:: 상부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집에 돌려보내주고 싶다.
  
  문: 신문 보도에 대한 검열 기준은 어디에 두나?
  답: 선동적인 것과 허위 사실은 통제하겠다.
  
  문: 신문기자들에 대한 취재 활동의 자유 보장은?
  답: 물론 최대한 협력하겠다>
  
  박정희 소장은 또 “계엄령 선포 전의 범법 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선포 후의 범법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부산 지구 계엄사무소는 21일 경찰이 넘긴 소요 혐의자 41명을 심사하여 12명만을 구속하고 나머지는 석방했다.
  
  박정희는 “계엄 선포 후 연행자를 고문하는 경찰관들은 엄벌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날 박정희 소장은 동부산 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고 데레사여중·고에 들어가서 수색을 한 데 대해서 이를 중단시키고 “앞으로는 경찰은 물론, 군 수사기관원도 사전 승인 없이는 학원 수색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24일 부산계엄사무소 예하 軍檢(군검)합동수사반은 민주당원을 시위 주모자로 몰아 고문한 부산진 경찰서 사찰계 형사 한 사람을 구속하고 수명의 형사들을 연행했다. 계엄령이 퍼지자 군대가 학생, 시민, 언론, 야당 편에 서서 이 정권의 下手人(하수인)격인 경찰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이미 정권 교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反旗
  
  부산 계엄사무소장 박정희 소장의 행동을 가까이서 관찰한 기자로서는 당시 부산 문화방송 보도과장 전응덕이 있다. 박 소장은 4월19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우선 부산 언론기관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국제신보 이병주 편집국장 겸 주필, 부산일보 李相佑(이상우) 편집국장, 그리고 전응덕을 사령관실로 불렀다.
  
  전응덕 과장은 공보실장 이낙선 소령으로부터 “사령부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 동안 시위를 선동했다고 잡아넣으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全(전) 과장은 좀 늦게 사령관실로 들어갔는데 박 소장이 의외로 웃는 얼굴로 맞았다.
  
  “전응덕 씨가 진행하는 방송 잘 들었습니다. 사태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 문화방송은 마산, 부산 시위 현장 속으로 녹음기를 든 기자를 들여보내 시위 현장 방송을 했고 전 과장은 시사 해설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세 보도 책임자들에게 계엄 업무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오늘은 발표가 늦어 어차피 통행금지를 저녁 7시부터 실시할 수 없으니 저녁 9시부터 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왜 부산에서만 통행금지를 9시로 늦추었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상황을 설명한 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내가 알아서 하는데 말이야…”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4월24일 부산 교외 범어사에서 4·19 시위 희생자 13명에 대한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은 親(친)학생적인 弔辭(조사)를 했다.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기 위하여 꽃다운 생명을 버린 젊은 학도들이여! 여러분의 애통한 희생은 바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선배들의 책임인 바, 나도 여러분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같은 비통한 순간을 맞아 뼈아픈 회한을 느끼는 바입니다. (중략)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고귀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오늘 여러분들의 永訣(영결)은 자유를 위한 우리들과의 자랑스런 結緣(결연)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중략) 여러분들이 못다 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습니다. 부디 他界(타계)에서나마 寧日(영일)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이 조사를 듣고 있던 부산 문화방송 전응덕과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는 ‘후련하기도 하고 간담이 서늘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아직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특무대원들의 눈이 번득이고 있는데 ‘여러분이 못다 이룬 소원을 기필코 우리가 성취하겠다’니, 이건 反정부 선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긴장했다는 것이다. 김종신은 《영시의 횃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맥 빠지고 천편일률적인 弔辭(조사)에 지루해진 動員(동원) 학생들은 모두 엉거주춤히 서서, 어떤 학생은 간간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는데 박 장군이 조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이 연설을 녹음해 간 전응덕은 방송하기 전에 군수기지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었다. 이낙선 공보실장에게 “이 연설을 내보내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낙선은 “잠시 기다려 달라”면서 박정희에게 물어 보고는 “사령관께서 알아서 하라고 하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5·16 거사 뒤 이 연설의 녹음테이프를 보내 달라고 전응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민심과 軍心(군심)이 같이 돌고 있었다. 4월20일 오전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5대 도시는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경찰 등 수사 기관에서 시민들에게 보복 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엄단하겠다”고 했다. 4월22일 서울 동대문 경찰서는 18일에 있었던 고려대학생 습격사건에 가담한 깡패 13명을 구속했다. 23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나는 이런 고문을 당했다’, ‘들어가자 몽둥이질, 이래도 치고 저래도 치고’, ‘방망이로 파리 잡듯 총으로 누르고 발로 차고’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자유당과 경찰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계엄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고 있었다.
  
  4월23일, 경찰은 고대생 습격사건을 지휘한 혐의로 柳志光(유지광), 林和秀(임화수)를 구속했다. 24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 ‘서울 용산 경찰서와 성북 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정치 사찰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집단 사표를 냈다’고 보도했다. 4월24일, 계엄사령부는 ‘25일부터는 언론 검열을 철폐하고 통금 시간도 종전으로 돌린다’고 발표했다.
  
  4월21일, 국무위원들 전원이 유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22일에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3·15 부정 선거에 의해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국무위원들은 홍진기 내무장관과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을 자진 사퇴시키는 악역을 맡겼다. 두 사람은 이기붕이 사는 서대문으로 향했다. 이기붕은 19일 오후 서대문 자택으로 시위대가 몰려오자 지프를 타고 포천 6군단으로 향했었다.
  
  당시 6군단장은 姜英勳(강영훈) 중장, 비서실장은 李性宰(이성재) 중령이었다. 이 중령이 군단장실 앞에 당도한 지프로 마중을 나갔다. 운전사 외에 네 사람이 타고 있었다. 앞자리엔 국회의장 비서인 全榮培(전영배), 뒷자리엔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 그리고 차남 康旭(강욱)이 있었다. 이기붕은 무릎을 담요로 덮고 있었고 그와 강욱 사이엔 便器(변기)용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강영훈 중장은 이기붕을 군단장 숙소로 모시려고 지프의 앞자리에 올랐다. 이기붕은 車中(차중)에서 “소요가 일어나 집에 있을 수 없었소. 창동에 있는 검찰총장 별장으로 갔는데 거기엔 전화가 없어서 이리로 오게 되었소”라고 했다. 이날 저녁 강영훈 군단장은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기붕 件(건)을 보고했다. 그 직후에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전화를 걸어 왔다.
  
  “하여간 안정을 취하게 잘 보호해 드리십시오. 서울은 안정되어가니 안심하라고 하십시오.”
  
  저녁에 강 장군이 이 중령을 부르더니 “지금 저 양반이 식사를 전혀 못 하는데 미 고문관에게 부탁해서 과일 주스를 좀 구해다 주게”라고 했다. 이기붕은 부축을 받지 않고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동할 때는 업혀서 했다. 말도 박마리아가 통역을 해주는 실정이었다. 박마리아가 “이런 뜻이지요” 하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기붕 가족은 6군단장 숙소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21일은 박마리아의 생일이었다. 이성재 중령이 꽃을 꺾어 드리니 감격하는 표정을 지었다. 21일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 집으로 돌아갔다. 강 군단장은 참모장더러 모셔다 드리라고 했는데 그는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의장을 모시고 먼저 경무대로 갔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설 기던 사람들이 본체 만체했습니다.”
[ 2011-01-20, 09: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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