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軍은 우리 편이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7)/ 군대는 시위대에 發砲를 포기하고 李承晩 대통령은 下野를 결심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군대의 發砲 포기
  
  21일 오후 홍진기 내무, 김정렬 국방장관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에 들어서니 박마리아와 자유당 강경파 인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김정렬 회고록). 홍, 김 두 장관이 주위를 물리치게 한 뒤 이기붕에게 부통령 당선자 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기붕의 안색이 변하더니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괜찮습니까” 하니 이기붕은 “난 괜찮아, 말을 계속하게”라고 했다. 두 장관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이기붕은 의외로 선선히 응했다.
  
  “내가 뭐 하고 싶어서 하나. 몸도 나쁘고 재간도 없네. 자네들이 이야기 안 해도 그만둘 생각이었네.”
  
  “죄송하지만 공식발표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럼. 그래야지.”
  
  “그러면 언제쯤 경무대에 가시겠습니까.”
  
  “좀 있다가 가겠네.”
  
  두 장관은 중앙청 국무회의실로 돌아가 기다리는 장관들에게 보고했다. “사퇴 성명을 감동적으로 써야 할 텐데”라는 말도 나왔다.
  
  “名文章家(명문장가)인 韓甲洙(한갑수) 씨가 비서로 있으니 잘 처리하겠지요.”
  
  김정렬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경무대 朴贊一(박찬일) 비서관이 전화를 걸어 “빨리 올라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무대로 가 보니 응접실에서 이기붕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말씀드려도 영 고집불통이시네. 허락을 안 해주시는구먼. 자네가 가서 말씀드려 보게.”
  
  김 장관은 집무실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이기붕 의장도 사퇴에 동의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승만은 “그래, 그렇게 하려면 해!”라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김 장관은 바깥으로 나와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이기붕에게 이 말을 전했다. 김정렬은 이기붕이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 서대문의 이기붕 자택으로 갔다. 한 시간쯤 기다리는데 이기붕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살았어! 아이고 살았어! 내가 그런 재목이 못 되지 않나. 내가 아주 무거운 책임을 면하게 되었네. 자네 덕분이네.”
  
  다음날(4월23일) 점심 무렵 신문 號外(호외)가 국무위원실로 배달되었다. 김정렬 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신문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한다.
  
  ‘장면, 부통령직에서 사퇴’란 제목의 머리기사 아래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라는 작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본인은 보수 세력의 합동을 통해서 내각책임제로의 정치제도 개혁을 고려한다. 부통령 당선 사퇴도 고려한다’는 이기붕의 애매한 성명은 이미 돌아버린 민심을 우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서 앞다투어 이기붕을 치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아니, 이게 무슨 꼴이오?” 하고 김정렬 장관을 다그쳤다. 김 장관이 알아보니 이날 아침 한갑수 비서관이 초안하여 가져간 사퇴 성명문에 대하여 자유당 강경파 인사들이 반발, ‘사퇴 고려’란 표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24일) 역효과에 놀란 이기붕은 ‘사퇴 고려란 표현은 잘못 전해진 것이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승만 대통령도 ‘전 국무위원의 사표를 수리하고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한 뒤 超黨的(초당적)으로 인사를 개편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뒤였다. 25일 국회는 사태가 안정되었다는 이유로 ‘비상계엄령을 26일 오전 5시를 기해서 경비계엄령으로 완화한다’는 결의를 했다.
  
  25일 오후에는 교수들이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대학교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벌였다. 교수들은 결의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이날 야당인 민주당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자’에서 ‘이승만 하야’로 바뀐 것인데 그때까지 시위 학생들 가운데서도 이승만 하야를 주장한 이들은 소수였다. 이제 상황은 거대한 자체 慣性(관성)에 이끌려 굴러가고 있었다. 25일 오후 세종로, 국회의사당, 중앙청 일대로 쏟아져 나온 수십만 군중은 통행금지 시간을 무시했다. 당시 대한일보 편집부국장 吳蘇白(오소백)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탱크에서 번갯불처럼 비치는 라이트에 데모 군중의 이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다시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노래가 나온다. 학생들은 하나, 둘 나중에는 파리 떼처럼 탱크에 올라탔다. 병사들은 학생들을 부축해 가며 어쩔 줄 몰랐다. 병사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엉엉 우는 학생들이 있다. 오히려 병사들이 불쌍하고 딱해 보인다. 40대 중년신사가 병사들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을 쏘아 죽이시오. 동포들을 다 쏘아 죽이시오.”
  
  소대장처럼 보이는 군인이 경상도 사투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요, 그 무슨 말입니꺼. 우리도 같은 핏줄의 국민입니데이. 우리가 여러분에게 이 총을 쏜다면… 우리는 뒤로 돌아서서 이 아스팔트 땅을 쏘지요. 아저씨요, 말씀 삼가하입시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함성이 올랐다.
  
  “국군 만세! 국군 만세!”
  
  옆에 있던 젊은 여인이 “국군은 우리 편이다”고 소리치자 박수가 터졌다. 戰友歌(전우가)가 들려온다. 모두 목메어 울면서 노래를 부른다>
  
  일단의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갔다. “공산당도 싫다. 이기붕도 싫다”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경비경찰관들이 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기붕 가족은 피신한 뒤였다. 시위대는 정치깡패 임화수와 李丁載(이정재)의 집으로 쳐들어가 박살을 내고는 가재도구와 집기를 끄집어내어 불질렀다.
  
  4월25일 포천 6군단장 강영훈 중장은 숙소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 9시쯤 당번병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더니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고 했다. 잠옷바람으로 나가니 응접실엔 이기붕의 차남 강욱이 서 있었다.
  
  “부모님을 또 모시고 왔습니다. 서울에서 또 소요가 났습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가.”
  
  “밖에 세워 둔 차 안에 계십니다.”
  
  “빨리 모시고 오너라.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강 장군이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응접실에 이기붕이 박마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이거, 내가 또 왔네.”
  
  “잘 오셨습니다.”
  
  강 장군은 이기붕 일행을 소파에 앉게 했다. 1952년에 강 장군은 국방부 경리국장 겸 관리국장으로서 이기붕 국방장관을 모신 적이 있었다.
  
  군단 일직 사령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데모 학생들이 20여 대의 자동차를 뺏어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李承晩 下野 결심
  
  강영훈 6군단장은 시위대가 몰려와도 안전할 곳이 어디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1개 예비연대 주둔지에 있는 副군단장 숙소를 생각했다. 호수와 숲이 있는 그곳이 이기붕 일행이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 데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되어 이기붕과 의논했다.
  
  “한 30분쯤 더 가시면 1개 연대가 있습니다.”
  
  “아, 군단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시오.”
  
  강영훈은 이기붕 일행을 직접 안내하여 副군단장 숙소로 갔다. 그곳에 가서 보니 이곳도 안전에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사병들 중에는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한 복무 기간 1년 반짜리 ‘학보병’이 많았다. 이들은 시위 학생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므로 서울에서 시위대가 몰려오면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숙소로 돌아온 강 군단장은 미 1군단 포병사령관 숙소가 생각났다. 다음날 오전 강영훈은 출장 간 미 1군단장을 대리하던 부군단장 샌더스와 의논하러 갔다. 그는 냉담했다.
  
  “그 사람 문제에 왜 강 장군이 앞장서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도 강 장군이 이기붕을 도피시켰다는 정보가 들어왔었다. 이 일은 계엄사령관이 할 일이다.”
  
  “그 사람은 바쁘다. 책임線(선)을 따질 일이 아니라 우선 해결해놓고 볼 일이다.”
  
  “다른 군단장에게 그 사람을 맡으라고 해보지.”
  
  26일 아침 1군 사령부에서 군단장 회의가 열렸다. 강 장군이 이기붕 건을 설명했더니 모두들 “아이고, 강 장군 입장이 어렵게 되었구나”란 반응이었다. 閔耭植(민기식) 부사령관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황당한 이야기를 툭 툭 던져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의 말은 대부분 옳은 말이었음이 밝혀지곤 했다. 그런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지금 이기붕 가족한테 우리나라 팔도강산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나? 그 사람에게 길은 딱 두 가지밖에 없어. 하나는 자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으로 망명하는 거야.”
  
  유재흥 1군 사령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下命(하명)을 청했다. 송 장군은 “생각 좀 해보자”고 하더니 감감소식이었다고 한다.
  
  이날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은 국방부에서 중앙청으로 향하는 길에 도심으로 몰려들고 있는 거대한 시위 인파를 보았다. 국회 결의에 의해서 26일 오전 5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완화될 예정이었다. 김 장관은 시위를 막으려면 비상계엄을 연장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중앙청 국무회의실을 나와서 경무대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직원이 달려오더니 “미국 대사 매카나기가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이 대통령을 뵙고자 하니 장관께서 알선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직접 경무대로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수차 비서실로 연락을 했는데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기회를 봐서 진언하겠습니다.”
  
  김 장관이 경무대에 들어가니 이승만은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잘 잤나?” 하고 말하는 것이, 지금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김 장관이 집무실로 따라 들어가 지금 급박해지는 상황을 보고했다. 이승만은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은 잠시 회상에 잠기더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김 장관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대통령은 다시 “어떻게 하면 좋은가, 말 좀 해봐!”라고 했다. 김정렬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무의식중에 ‘각하,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는 것이다(회고록).
  
  이승만 대통령은 김정렬의 어깨를 꼭 껴안고 “대장부가 이렇게 어려울 때 이게 무슨 꼴인가” 하더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自問(자문)했다. 한참 후에 대통령은 이렇게 입을 뗐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너무 중대한 말이라 김정렬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재차 김 장관의 어깨를 흔들면서 물었다. 김 장관은 말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그렇게 하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어떻게 하지?”
  
  “성명서를 만드셔서 방송하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박찬일 비서관을 부르더니 “자네 둘이서 성명서를 만들어보게”라고 했다. 박찬일 비서에게 김 장관은 성명의 골자를 불러 주었다. 하야한다는 것, 선거를 다시 한다는 것, 내각책임제로 개헌한다는 것. 박 비서관이 이를 받아쓰려고 하자 이승만이 나섰다.
  
  “자네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네. 내가 부를 터이니 받아 쓰게.”
  
  이승만은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잘 지냈으니, 이제 세상을 떠나도 원한이 없다’로 시작되는 성명서의 요지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들어왔다. 김 장관이 지금까지의 경과를 귀띔해 주었다. 이승만은 송 장군에게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물었다.
  
  “예, 지금 국방장관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하께서 그만두시면 사람은 다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박찬일이 구술받은 성명서를 낭독하자 송요찬은 “이기붕 의장이 공직으로부터 떠난다는 대목을 첨가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승낙했다. 조금 있다가 송요찬이 시위학생 대표 다섯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하야 성명문이 淨書(정서)되는 사이에 이 대통령은 후원에서 이들을 만났다. 고려대 정치학과 학생 兪一羅(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어떻게 하라고?”라며 되물었다. 옆에 있던 곽영주가 이 박사의 귀에 대고 영어로 “스텝 다운(Step Down)”이라고 했다.
  
  “또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으로 가서 살란 말인가.”
  
  “국민이 원합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가야지. 이 나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가야지.”
[ 2011-01-21, 09: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