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시대로 뛰어든 朴正熙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0)/4·19 유혈 사태에 이은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그리고 이기붕 일가의 자살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한국 사회에서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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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상황
  
  4월28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은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매카나기 대사는 김 장관이 전날 요청했던 사안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과도 정부 수반으로 민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허정 외무장관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것과 이기붕 내외의 미국 망명을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통보를 하던 매카나기 대사는 “그런데 경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들으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글쎄요,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나도 궁금해요.”
  
  전화를 끊고 김정렬은 경무대로 달려갔다. 본관으로 가니 비서관들과 경찰관들이 바깥에 둘러서서 밖으로 나오는 누군가를 막고 있었다. 김 장관이 가까이 가 보니 이 대통령 내외가 바깥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老(노)대통령은 막아선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김 장관도 엉겁결에 막는 쪽에 합세했다가 옆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새벽에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습니다. 각하께서 그 현장으로 가시겠다고 해서 이렇게 막고 있습니다.”
  
  김정렬은 이기붕이 묵고 있었다는 경무대 내 별관 36호실 쪽으로 달려갔다. 4·19 직후 사임한 홍진기에 이어 내무장관으로 발탁된 李澔(이호) 장관이 걸어 올라오면서 김 장관을 붙들었다.
  
  “김 형, 내려가지 말어. 봐도 소용없고 일생 동안 참혹한 기억이 남을 터이니 내려가지 말어.”
  
  김정렬은 李 장관에게 끌려 대기실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바로 오늘 아침 매카나기 대사로부터 망명 알선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검찰은 이기붕 일가 변사 사건의 현장을 조사하고 시체를 검안한 뒤 ‘합의된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유서는 없었다. 권총은 모두 다섯 발이 발사되었다. 이강석만이 머리와 가슴에 두 발을 맞았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한 발씩 맞았다. 세 발은 28일 새벽 5시 50분경 연속으로 발사되었고 4, 5분이 지나서 두 발이 발사되었다. 이기붕은 상의를 의자에 걸어 놓고 셔츠만 입은 채로 숨져 있었다.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이강석은 가로로 쓰러져 있었다>
  
  이기붕 가족이 피신해 있던 6군단 부군단장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경무대 별관으로 돌아온 것은 26일 밤이었다. 6군단장 비서실장이던 이성재 중령에 따르면 경무대 경찰서에서 차를 보내 이기붕 일가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때 이미 서대문 자택은 시위대의 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기붕은 경무대로 갔다. 이기붕 일가가 죽은 뒤 일부 언론에서는 강영훈 6군단장이 이기붕 일가를 외면하는 바람에 서울로 돌아와 자살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강영훈 전 총리는 “내가 그런 오보를 한 기자에게 항의했더니 ‘사실 관계는 알지만 이렇게 써야 장군님께 유리하다’고 변명만 하고 정정해 주지 않았다”면서 “그 뒤 자유당에서는 날 욕하고 민주당에선 갈채를 보냈다”고 했다.
  
  4·19 유혈 사태에 이은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그리고 이기붕 일가의 자살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한국 사회에서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崔仁圭(최인규) 등 3·15 부정선거 주범 구속, 金九(김구) 암살 등 과거 정치적 사건의 재조명 요구, 경찰 등 권력 기관 간부 퇴진, 徐珉濠(서민호), 姜文奉(강문봉) 등 前(전) 정권 때의 정치 사건 수감자 석방, 교장 총장 배척 운동, 학생들의 동맹 휴학, 좌익의 정치 세력화, 시위의 난동화 등 그 뒤에도 정권 교체기마다 되풀이되는 정형화된 혼란이었다. 4월28일 계엄 사령부는 북한과 조총련이 남한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 불온 문서를 학교와 학생 단체로 보내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論客(논객) 월트 리프먼은 4월2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기고한 ‘한국이란 우리의 두통거리’란 題下(제하)의 칼럼에서 ‘한국은 그 자신의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계속 미국의 被保護國(피보호국)이며 被後見國(피후견국)의 지위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한국을 위해 흘린 피를 값싼 농담으로 만들어 버린’ 이승만 정권을 퇴진시킨 데 기여한 미국 정부의 조치를 옹호했다.
  
  4월29일 AP통신은 ‘屍山血海(시산혈해)의 유혈 사태로 전락할 뻔했던 한국 사태가 이승만 하야로 수습된 데는 한국군의 自制(자제)가 큰 기여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만 해도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인기는 좋았다. 29일 신문들은 ‘송요찬 장군의 국방장관 입각설’을 보도했다. 이 날짜부터 모든 신문은 터키에서 발생한, 反(반)멘데레스 총리 유혈 학생 시위로 계엄령이 선포된 사건을 연일 크게 다룬다. 기사들은 이 학생 시위가 한국 학생들의 용감한 행동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신문 지면은 온통 국내외의 시위 사태로 채워지고 있었다.
  
  4월30일 수도육군병원 강당에서는 자살한 이기붕 일가 네 명의 영결식이 있었다. 이틀 전 梨花莊(이화장)으로 물러났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양자인 이강석의 관 앞에 앉아 한 10분간 영정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짓다가 측근의 만류를 받고 식장을 떠났다. 4월30일자 <조선일보>의 사회면은 학원 내 진통으로 채워져 있었다. ‘민주 혁명은 학원 내로’란 제하에 ‘어용학자를 숙정─학생들 궐기에 일부 교사도 동조’, ‘서울대─학도호국단 해체 주장’, ‘성균관대─총장사퇴를 요구’, ‘경희대─총장 축출 움직임’이란 작은 제목의 기사들이 지면을 뒤덮었다.
  
  이 날짜 조선일보 1면에 실린 洪鍾仁(홍종인)의 시론은 ‘民意(민의)를 떠난 개헌은 있을 수 없다’면서 ‘정계 혁신을 위해 현 국회의원은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학생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는데 ‘현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을 치르면서 개헌 여부를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홍종인은 ‘오늘의 사태를 가져온 책임의 일단은 신파, 구파로 나뉘어 싸움질을 해온 민주당에도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의 정당’을 자처하던 민주당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한 글이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4·19 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도 못한 민주당이 流血(유혈)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데 대한 반감뿐 아니라 민주당도 결국은 지주, 일제 관료 출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구태의연한 정치 세력으로서 본질적으로 자유당과 같은 뿌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박정희도 그런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宋堯讚 총장께”
  
  4·26 이승만 하야 이후 온 나라에 불어 닥친 혁명적 분위기는 박정희 소장을 격동시켰다. 5월2일 박정희는 육사 11기 작전장교 손영길 대위를 불렀다. 이낙선이 작성한 《5·16 증언록》에서 손영길 대위는 이렇게 기억했다.
  
  <박정희: “손 대위, 위관급 장교들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지금 모든 분야에서 혁신의 분위기가 있는데도 군부에서만은 이렇다 할 혁신의 기운이 없다. 서울에서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 사령부 내의 위관급 장교들 동태는 어떤가?”
  
  손영길: “대부분의 장교들은 과거에 부정선거를 지시한 부정 장성들이 건재하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입니다. 젊은 장교들은 지휘관들을 불신임하고 있는 경향입니다.”
  
  박정희: “(편지봉투를 전하면서) 이걸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전달하게.” >
  
  손영길 대위는 이날 오후 편지봉투를 들고 L─19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갔다.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실에 근무하는 동기생 김 대위를 통해 이 서신을 전달했다. ‘5·16 혁명의 史官(사관)’ 이낙선은 문제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고 적었다.
  
  <참모총장 각하.
  
  多難(다난)한 계엄 업무와 군내의 諸(제)업무의 처리에 골몰하심을 위로드리는 바입니다. 각하로부터 많은 恩顧(은고)를 입으며 각하를 존경함에 누구 못지않을 본인이 지금 그 높으신 은공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각하의 처신을 그르치지 않게 충고 드리옴이 유일한 방도일까 짐작되옵니다.
  
  지금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선거 부정 관리의 책임으로 규탄되고 있으며 군 역시나 내부적, 외부적 양면에서 이와 같은 비난과 淨化(정화)에서 예외될 수는 없을 것이오니 未久(미구)에 닥쳐올 격동의 냉각기에는 이것이 문제화될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며 현재 일부 국회 국방위원들이 對軍(대군) 추궁을 위한 증거 자료를 수집 중임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옵니다.
  
  卑見(비견)이오나 군은 上命下服(상명하복)의 엄숙한 통수 계통에 있는 것이므로 군의 최고명령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 각하께서는 4·19 이후의 민주적인 제반처사에 의하여 絶讚(절찬)을 받으시오니 부정의 책임감은 희박해지며 국민이 보내는 갈채만을 기억하시겠습니다마는 사실은 不日內(불일내)에 밝혀질 것입니다. 차라리 국민이 아쉬워할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시고 처신을 배려하심이 각하의 장래를 보장하며 과거를 장식케 하는 유일한 방도일까 아뢰옵니다.
  
  4·19 사태를 민주적으로 원만히 수습하신 각하의 공적이 절찬에 값하는 바임은 물론이오나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도 또한 결코 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功過(공과)는 相殺(상쇄)가 불가능한 사실에 비추어 가급 조속히 進退(진퇴)를 英斷(영단)하심이 국민과 군의 眞意(진의)에 迎合(영합)되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현명한 상관은 부하의 誠心(성심)을 수락함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별한 은혜를 입은 부하로서 각하를 길이 받들려는 微忠(미충)에서 감히 진언드리는 충고를 경청하시어 성심에 답하는 裁量(재량) 있으시기를 伏望(복망)하옵니다.
  
  외람되오나 각하와의 두터운 신의에 의지하여 이 글을 올리오니 두루 解諒(해량)하시와 본인으로서의 심사숙고된 성심을 참작하여 주시기 아뢰옵나이다>
  
  그동안 박정희가 송요찬에게서 입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이 편지는 독한 마음을 품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私情(사정)을 모질게 끊고 송요찬의 용퇴를 건의한 것이다. 이때 송요찬은 계엄군이 4·19 때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의 하야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국민적 인기가 높았다. 미국 정부도 한때 그를 과도 정부 수반으로 밀어 줄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송 장군에게 匕首(비수)와 같은 편지를 써 올린 박정희는 이 행동으로써 격랑이 일고 있는 시대 상황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은 상황의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이 되겠다는 결단이었다.
  
  5월2일 허정 과도 정부 내각 수반은 국방장관에 이종찬 전 육대 총장을 임명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박정희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전복을 생각했고 한때는 많은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군사 혁명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었던 이종찬의 장관 취임은 박정희에게 상당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종찬은 송요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편지를 받은 송요찬의 심경을, 이낙선은 《正義(정의)의 受難(수난)》이란 기록에서 다소 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송 총장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다.
  
  “빨갱이 같은 놈! 부정선거에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또 책임이 있다 치더라도 4·19 이후의 처신이 충분히 그것을 속죄했다고 언론이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저를 애써 승급시키고 등용하고 있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온 세상이 나를 칭찬하는데 네가 나를 잡아먹어?”
  
  분을 못 이긴 송 총장은 문제의 서신을 움켜쥐고 박정희 소장을 경계하는 여러 장성과 고위층에 이를 회람시켰다. 고민의 며칠 밤을 지낸 5월5일 송 총장은 곰곰이 생각한 결심 하나를 실천에 옮겼다. 육군본부의 전 장병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사무치는 분노와 危懼感(위구감)을 폭발시킨 것이다.
  
  “4·19 사태의 수습에 있어서 우리 군은 본인의 지휘하에 원만히 그 소임을 다하여 靑史(청사)에 남는 위업을 달성한 것인데 지금 일부에서는 이 성스러운 성과를 시기하며 파괴하려 드는 불순분자가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겠지만 이렇듯 下剋上(하극상)의 풍조를 선동하여 군 상하 간의 불신을 야기하며 단결을 와해시켜 북괴에 이익을 주는 따위의 행위는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이낙선의 《5·16 증언록》에 따르면 육본 정보국 기획과장 김종필 중령은 이 연병장 연설의 분위기에 대해서 이런 증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이미 중견 장교들의 동향이 뭉치기 시작한 때이고 연설 도중에 (장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해서 육본의 공기는 險惡一路(험악일로)가 되었다>
  
  5월6일 김종필 중령은 ‘육본의 공기와 그동안의 동향을 보고차 下釜(하부), 박 장군 숙소에서 투쟁 방법의 표면화(육본의 동지 규합을 위해)를 進言(진언)했다’는 것이다.
  
  5월8일,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출신 장교들은 整軍(정군)을 요구하는 連判狀(연판장)을 작성하여 상부에 제출하려다가 탄로가 난다.
  
  
[ 2011-01-24, 09: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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