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를 수 없는 격동기 역사의 흐름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2)/ 송요찬 총장이 자신의 용퇴를 주장하는 박정희 소장을 내사하고 김종필 중령을 구속했지만 대세는 이미 그의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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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堯讚과 金鍾泌
  
  최영희 육군 교육총본부 총장은 박정희에 의한 반란 음모설을 조사하러 부산으로 갔다가 그의 군 쇄신론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박 장군, 군대에선 협력이고 뭐고가 없어요. 승리 아니면 굴복 아니오. 이번 혁명이 옳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나가고 박 장군 같은 사람이 군을 맡아야지. 아니면 당신을 숙청하든지 말이야.”
  
  두 사람은 연 이틀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솔직한 의견을 교환했다. 2군 사령관을 지낸 적이 있는 최영희 중장은 후방 지역의 군 배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충고도 했다.
  
  “당신 말이야, 바보가 아니라면 이곳에서는 혁명 일으키지 마. 지방에서 일어나 성공한 나라가 없어. 통신 부대와 의무 부대 갖고 뭘 하겠소. 3개 사단만 집어넣으면 단번에 진압될 텐데. 그러면 당신은 죽는 거지. 그건 그렇고 이젠 당신이 참모총장 하쇼. 나는 그만둘 테니까.”
  
  사흘째 되는 날 최영희 중장은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여기 와보니 아무 이상이 없어요. 올라가도 좋겠소?”
  
  송요찬은 “부산은 아직 위험하니 더 있어. 내가 내려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라고 했다. 최 중장은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보고를 했는데 그도 “내가 내려갈 테니 더 있으라”고 했다.
  
  송요찬 총장은 비행기로 내려와 군수기지사령부를 시찰하고 장병들 앞에서 훈시를 했다. 그런데 송요찬은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이 그동안 시위대에 대해서 취한 조치를 칭찬하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이 연설을 들은 최영희 중장은 “내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총장이 정치적으로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최영희 장군에 이어 이종찬 국방장관도 부산을 시찰하러 내려왔다. 5월9일, 정부 대변인도 부산 시위에 공산 세력이 개입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을 부인했다. 부산 등 지방 계엄 상황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종찬 국방장관이 9일 국무회의에서 그같이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송요찬 총장도 태도를 바꾸고 기자들에게 ‘조총련 사주설은 사실 무근’이라고 말했다.
  
  부산 기자들은 현지에 내려온 군 고위층 인사들에게 “왜 평화적인 부산 시위에 조총련이 개입하고 있다고 덮어씌우느냐”고 대들기도 했다.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기자 회견장에서 송 총장은 옆에 배석한 박정희에게 “언론 검열을 중지해도 되겠는가. 자신 있는가”라고 물었다. 박정희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조치는 다음날 발효되었고 부산은 정상을 되찾았다.
  
  송요찬 총장이 자신의 용퇴를 주장하는 박정희 소장을 내사하고 김종필 중령을 구속했지만 대세는 이미 그의 편이 아니었다. 보통 때였다면 박정희와 김종필은 해임되거나 구속되었을 것이다. 혁명적 상황으로 변모한 격동기 역사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은 박정희와 김종필 쪽이었다. 많은 장성들과 장교들, 그리고 언론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노선에 동정하고 호응하고 있었다.
  
  서울에 진주한 15사단장 조재미 준장한테 金雄洙(김웅수) 군수참모부장이 부탁을 했다. 연판장 사건으로 구속된 김종필 중령 등 육사 8기생 다섯 명을 석방시켜 줄 것을 송요찬 총장에게 건의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재미 장군은 물러날 결심을 굳히고 있던 송 총장을 찾아가서 이 부탁을 전달했다고 한다.
  
  송요찬 총장은 육군 방첩대장 李召東(이소동) 준장에게 지시하여 김종필 등 다섯 명의 장교들을 풀어 주고 총장실로 데려오도록 했다. 육본 연병장에는 소문을 들은 8기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총장실로 들어간 김종필 중령은 송요찬 총장과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김종필 前 총리의 최근 증언).
  
  “날 더러 군복 벗고 나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야?”
  
  “우리나라가 4·19혁명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그 시발이 3·15 부정선거입니다. 총장께서는 이 부정선거에 앞장서시지 않았습니까. 이기붕에게 표를 120% 몰아주었다고 자랑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참신한 후계자를 골라서 넘겨주시고 깨끗이 물러나십시오. 저희들도 나가겠습니다. 군대가 깨끗하고 건실해야 그 뒤에서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군 내부의 요인들을 참모총장께서 안고 나가 주십시오.”
  
  송요찬 총장은 마주 서서 이런 말을 하는 김종필 중령에게 “앉아”라고 했다. 김 중령은 계속 서서 말했다. 그는 이 시점이 결판을 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 격동하는 상태하에서 생각이 왜 없겠나. 귀관들이 그런다면 한 이틀만 여유를 주게. 나도 생각해 보고 결심하겠네.”
  
  “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결심하십시오.”
  
  “그래, 이틀도 여유를 못 준단 말이야?”
  
  “시간을 가지시면 결심이 또 물러집니다. 그러니 오늘 저에게 아주 수모를 당하시는 자리에서 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송 총장은 털썩 자리에 앉더니 무겁게 말했다.
  
  “그래. 내 행동은 스스로 결심할 테니까… 고생했어. 나가 보시오.”
  
  김종필 중령이 연병장으로 나서자 기다리던 동기생들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와 에워쌌다.
  
  송요찬 총장은 5월19일 사표를 냈다. 정부는 5월23일 송요찬의 후임에 최영희 육군 교육총본부 총장을, 국방연구원장으로 나간 金鐘五(김종오) 참모차장 후임엔 崔慶祿(최경록) 국방연구원장을 임명했다. 허정 내각 수반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 문책은 육군 참모총장과 차장의 경질로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과도 정부의 내각 수반 허정과 이종찬 국방장관은 자유당 권력과 밀착되었던 군 고위층을 숙청해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었으나 과도 정부란 한계로 해서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도 허정에게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참모총장 운동
  
  5월31일자 <부산일보>에 ‘동아대학생들 총장 배척 운동’이란 1단 기사가 났다. 그 이튿날 이 기사에 불만을 품은 동아대학생들이 부산일보로 쳐들어가 창문을 부수고 기물을 파괴한 뒤 편집국에 난입했다. 학생들은 李相佑(이상우) 편집국장을 납치하여 ‘사과 호외’를 인쇄하게 했다.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에게 달려가 급보를 전했다. 박정희는 즉시 헌병을 출동시켜 주동 학생 수십 명을 체포했다. 까만 안경을 쓴 박정희가 부산일보 사장실로 들어가다가 친구 황용주 주필과 마주쳤다.
  
  “신문쟁이들이 그동안 학생들을 선동하더니 이제는 좀 당해 봐야 돼.”
  
  이때 헌병대장이 “동아대학 총장이 사령부로 와서 면회를 청했습니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만나자고 해.”
  
  조금 뒤 헌병대장이 또 들어와서 말했다.
  
  “신문사에선 만나기 싫답니다.”
  
  “그만두라고 해.”
  
  바깥에 나갔던 헌병대장이 다시 들어오더니 말했다.
  
  “부산역 광장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일국의 법무차관을 지냈다는 사람이 그 모양이야?”
  
  광장에서 박정희 사령관을 본 鄭在煥(정재환) 총장이 항의했다.
  
  “부산일보만 제일이오? 평화적인 데모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소. 학생 잡아가는 게 군대요?”
  
  박정희는 화가 나면 늘 그러하듯 턱을 약간 떨더니 빽 고함을 질렀다.
  
  “결사대가 평화적인 데모요?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는데 지성인들이 각성을 해야지!”
  
  박정희가 송요찬 총장 앞으로 용퇴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김종필 중령이 주동한 연판장 사건이 계기가 되어 결국 송 총장은 물러났다. 박 소장에게 호감을 가진 최영희 중장이 신임 육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하는 데 대해서도, 연판장 사건을 일으켰던 김종필 중령 등 8기 장교들은 불만이었다. 이들은 후임 총장으로 박정희나 朴炳權(박병권) 소장을 희망했으나 擧名(거명)을 하면서 추천을 하고 다닐 입장은 아니었다. 김종필 중령은 이종찬 국방장관을 찾아갔다고 한다(이낙선의 증언록).
  
  <그들은 장관을 만나지 못하고 특별보좌관 方熙(방희) 장군에게 차기 총장의 人選(인선)에 참고할 사항을 건의하였다. 整軍(정군)을 단행할 만한 인물일 것, 그 사람이 참모총장으로 임명됨으로써 군내의 파벌이 없어질 수 있는 공정무사한 인물일 것, 정군이 끝나는 날 자기도 정군 대상자로서 스스로 용퇴할 수 있는 뱃심 있는 인물일 것>
  
  김종필 前(전) 총리는 “박정희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면 정군을 하는 데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인을 추천할 입장은 아니었다. 박병권 장군 정도가 총장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종찬 국방장관이 일본 육사 후배인 유재흥 1군 사령관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추천할 것이란 말이 돌았다. 김종필 중령은 유재흥 장군을 찾아가서 “이런 분위기에선 총장에 취임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명예롭게 물러나실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건의했다. 유재흥은 선선히 “그러면 물러나지”라고 했다.
  
  김종필과 유재흥의 인연은 朴鐘圭(박종규·전 대통령 경호실장) 소령의 중계로 이루어졌다. 박 소령은 1958년 유 중장이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있을 때 그의 전속 부관이었다.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박 소령이 전출갈 때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 김종필 중령이었다. 유재흥은 김종필 중령을 불러 의사를 떠보았다. 김 중령은 그러나 “지금 저는 계획이 있어서 미국에 가 공부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불러주십시오”라면서 사양했다.
  
  박종규는 김종필을 형처럼 따랐다. 1948년 김종필이 육사 8기로 졸업하여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되어 그 과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 중이던 박정희를 만났을 때 이 과에는 박종규 하사도 있었다. 박종규 하사는 이틀이 멀다 하고 구타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일본 소년비행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 박종규는 유 중사, 정 중사와 함께 정보국의 삼총사로 불렸다.
  
  육본 앞에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 요리집이 있었다. 이 삼총사는 퇴근길이면 이 음식점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래서 주인이 퇴근 시간에는 문틈으로 박종규 하사 일행이 정문을 나오는가를 엿보고 있다가 ‘악당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빨리 빨리 해서 해”하면서 음식을 내어오는 등 (물론 공짜로) 쩔쩔 맸다고 한다. 김종필은 그런 박종규가 “디스 이즈 어 독, 디스 이즈 어 북”이라면서 우직하게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6·25 동란 중 일등 중사로 승진한 박종규를 지프에 태우고 가서 육군종합학교에 억지로 입학시켜 장교로 만들어준 것도 김종필이었다.
  
  박종규는 장교 생활을 하면서 家庭事(가정사)로 인해 탈영, 잠적 등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김종필이 힘을 써 그를 정보국 인사계장으로 데려다 놓은 지 몇 달 되지 않을 때였다. 아내 朴榮玉(박영옥)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왔다. ‘박 소령이 집에 오더니 자살한다고 우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김 중령이 달려가 보니 박종규는 우물 속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벌려 벽을 민 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살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머리부터 들어갔을 터인데 발부터 들어간 상태였다. 일종의 자살극이라고 본 김종필은 그를 끌어내 고민을 들어 보고는 “전방에 가서 긴장된 생활을 해야 낫겠다”면서 그를 전출시켜 주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원식 대령의 안내로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민주당 舊派(구파) 보스 金度演(김도연) 의원을 찾아가서 만난 적도 있다. 유 대령은 박정희를 총장으로 밀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그런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보이는데 5·16 뒤 박정희의 증언에 따르면, “그저 인사 정도였고 군내의 동요에 관한 언급이 있었을 뿐 깊은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 2011-01-26, 09: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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