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整軍 주장하는 장교들, 용서없이 처벌하겠다”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3)/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한 최영희 장군은 박정희를 광주에 있는 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시켰다. 좌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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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炯一 중장의 반격
  
  송요찬이 육군 참모총장 사퇴 의사를 발표한 뒤 최영희(유정회 회장·국방장관 역임) 중장은 김종오 참모차장, 유재흥 1군 사령관, 장도영 2군 사령관 등 군 사령관급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여 군의 진로를 의논했다고 한다. 최영희 장군의 최근 증언.
  
  “저는 4·19 혁명의 영향이 군대에 미칠 것이니 우리 같은 사람이 물러나든지, 아니면 불평분자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 회의에서는 유재흥 장군을 후임 총장으로 건의하기로 했고 이종찬 장관에게 그렇게 보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재흥 장군이 스스로 물러나자 장관과 허정 수반은 저를 불러서 총장직을 맡으라는 겁니다.”
  
  5월23일 최영희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그에게 “정군 운동의 구심점인 박정희 소장을 육본 인사참모부장으로 기용하면 청년 장교들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영희 총장은 박정희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인사에 관한 전권을 줄 테니 양심적 인사를 발탁하여 군내를 쇄신해 보라”며 인사참모부장직을 제의했다. 박정희는 사양했다.
  
  이를 두고 5·16 주체들의 기록에는 ‘최영희로서는 과감한 정군을 기대하기 어려워 거듭된 요청을 거절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최영희 장군은 “어떻게 하급자가 쉽게 응낙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겠나”면서 “박 장군은 송요찬 장군에게 보낸 편지 사건도 있고 해서 榮轉(영전)으로 비쳐지는 그런 인사 제의에 겸양한 태도였다”고 회고했다.
  
  최영희 총장은 5월27일 취임 소신을 밝히는 자리에서 ‘군을 혁신하는 입장에서 하급 장교들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겠지만 개인 감정으로 상관을 모략중상하는 일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취임 1주일쯤 뒤 초도 순시차 부산으로 내려와 군수기지사령부를 찾았다. 기자회견이 있었다.
  
  박정희는 최 총장에게 다가가더니 “각하, 요즈음 눈병이 나서 안경을 끼었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박정희는 두 발쯤 물러나서 팔짱을 끼고 최 총장의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30분간 계속된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물었다.
  
  “정군을 주장하는 장교들이 있는데 수습을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시종 웃는 얼굴로 답변하던 최 총장의 안색이 변했다.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자가 바로 군의 이간을 책동하는 불순한 자란 말이야. 앞으로 그런 자는 용서없이 처벌하겠어.”
  
  ‘바로 그 자’는 박정희를 지칭하는 것처럼 들렸다. 입을 꽉 물고 있던 박정희의 담배를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 항상 그랬듯 박정희의 턱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 총장은 “용서없이 처벌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기자회견장을 나가 버렸다. 박정희를 찾아간 김 기자가 “말썽을 만들어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괜찮아. 뭐 못할 소리했나”면서 넘겨 버렸다.
  
  이 무렵 과도 정부는 ‘생활 간소화’란 구호를 내걸고 虛禮虛飾(허례허식)을 배격하자는 운동을 펴고 있었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고관들이 부대를 시찰 올 때는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간소한 접대를 하고 있었다. 국방차관이 내려왔는데도 공항 영접과 사열을 생략하고 그냥 사무실에서 부대 현황을 보고했다. 차관 일행이 예하 부대 시찰을 떠날 때는 문 밖에서 인사를 하면서 차관에게 아리랑 담배 한 갑을 주더라고 한다. 옆에 있던 기자가 너무 소홀한 대접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내 할 일을 하면서 손님을 접대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 순시를 나왔다면 나도 내 할 일을 해가면서 접대를 해야지.”
  
  박정희는 강직하지만 경직되지는 않았고 엄격하지만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한 기자는 “그는 딱딱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조개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6월9일, 최영희 총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육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과 김형일 2군단장은 격론을 벌였다. 당시 박정희 아래서 공보실장으로 있던 이낙선 소령이 기록한 《정의의 수난》에선 박정희가 소장 이상 장성들에 대한 肅正(숙정)을 주장하고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는 “과도 정부하에서 군의 처우 개선과 군 내부의 정치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自淨(자정) 작업 없이 新(신)정권으로 넘어가면 군은 또다시 정치의 시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군 수뇌부를 겨냥한 박정희의 주장에 청렴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김형일이 반발했다.
  
  “오늘날 군의 잘잘못은 모든 장교들의 공동 책임이다. 군인도 인간인 이상 봉급만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것은 하사관부터 대장까지 마찬가지이다. 하사관들은 반합으로 盜食(도식)하고 장교들은 가마니나 후생 사업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부정 축재한 사람은 다 나가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식으로 하면 하극상이 만연되어 군은 자멸한다.”
  
  두 사람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이종찬 국방장관은 김형일 장군 편을 드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4·19는 혁명이 아니라 정변이다. 이 정권 시대의 법도 법이었다. 요사이 군과 관련된 거창 사건 등의 再審(재심)을 주장하는데 법은 一事不再理(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3·15 부정선거 때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제 와서 ‘부정선거를 강요한 자는 자진 사퇴하라’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4·19 이후 군대를 신경 쓰게 만든 것은 전국적으로 번진 양민 학살 폭로 시리즈였다. 5월11일 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선 9년 전인 6·25동란 당시에 일어났던 학살 사건의 유족들이 당시 면장 朴榮輔(박영보)를 붙들어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 면장은 1951년에 군인들이 7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공비 협조자로 몰아 학살하는 데 협력했다고 해서 신원면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피학살자 유족들이 몰려와서 “우리가 죽였으니 다 잡아가라”고 하는 바람에 주동자를 가리기도 어려웠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많은 고급 장교들의 눈에는 박정희의 군 숙정론이 이런 類(유)의 時勢(시세)에 영합하는 행동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의 인기는 주로 영관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좌천
  
  이즈음 군사 혁명을 꿈꾸던 박정희, 김종필 등 장교들이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사태는 터키의 군부 쿠데타였다. 5월27일, 터키 군부는 멘데레스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멘데레스 정부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다가 학생들의 시위를 불렀다. 이 학생들이 한국의 4·19 혁명에 자극받았다고 하여 우리 신문들은 터키 사건을 크게 보도해 왔었다. 언론은 대체로 터키 군사 혁명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전했다. ‘터키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군대를 열렬히 환영하고 군대는 폐쇄된 대학과 신문사의 문을 다시 열게 했으며 경찰력을 무력화시키고 舊(구)집권 세력을 소탕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이런 보도는 4·19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국군 장교들을 고무시킬 만한 것이었다.
  
  5·16 주체 세력은 이집트의 나세르 등 외국의 군사 혁명 사례를 참고로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케말 파샤에 의한 터키의 근대화 혁명을 많이 연구했다. 당시 우리 언론이나 장교들이 터키 군부의 역할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터키 군부는 헌법에 의해서 ‘케말리즘의 수호자’로 지정되어 있다. 케말리즘의 핵심은 政敎(정교) 분리, 남녀 불평등 폐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적 근대화 이념이다. 한때 이슬람권의 종주국이었던 터키가 이슬람교 원리주의자들로부터의 도전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서구 지향의 國體(국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군부가 케말 파샤의 근대화 이념의 수호자로서, 또 國政(국정)의 감시자로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는 정부가 케말리즘을 위반한다고 판단하면 합헌적인(헌법이 군대에 케말리즘의 수호를 의무화하고 있으므로) 개입을 통해서 정권을 갈아치우곤 한다. 따라서 터키 군부의 거사는 쿠데타나 혁명으로 부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영희 총장이 취임한 지 한 달쯤 뒤 김종필, 石正善(석정선) 두 중령이 용산구 청파동의 私邸(사저)로 찾아왔다. 최영희의 기억에 따르면 두 8기 중령은 “나라가 이렇게 혼란해서야 되겠습니까.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대가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라고 군사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최영희 장군이 8사단장 시절, 자신의 밑에서 특공대장을 했던 朴蒼岩(박창암) 대령도 찾아와서는 격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다. 이들에게 최 총장은 “군대는 民意(민의)를 따라야 한다. 아직 민주당 정권이 출범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나무란 뒤 돌려보냈다. 방첩대로부터는 ‘박정희 장군 중심으로 장교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도 더러 올라왔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입 밖에 내지 못할 이야기들이 군인들의 입에서 함부로 나와도 달래기에 바쁜 시대 상황이었다.
  
  1960년 7월 하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출입 기자와 참모들을 데리고 부산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과묵하고 딱딱한 박정희가 노래를 잇달아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박정희는 느릿한 ‘낙화유수’를 주먹을 흔들면서 군가식으로 바꾸어 불렀다. 참모들이 ‘하나, 둘, 셋’하면서 장단을 맞추어 배꼽을 잡게 했다. 박정희는 둥근 방석을 머리에 이고는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더니 ‘安南(안남)춤’이란 걸 추기도 했다. 박정희는 원래 술자리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진 듯 상하 관계를 무시하고 풍류와 흥에 겨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인데 기자들에게는 이것이 뉴스였다. 박정희가 육본으로부터 인사 발령을 전해들은 것은 이 자리에서였다. 7월28일자로 광주에 있는 1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백한 좌천이었다. 울적해진 박정희는 이날 인사불성일 정도로 술을 마셔 부하들에게 업혀나갔다.
  
  다음날 부산일보에 김종신 기자가 쓴 ‘4·19와 박정희 장군’이란 제하의 기사는 ‘부정부패한 장성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영관급 장교들의 지지와는 역비례적으로 고급 장성들은 박 소장을 눈 아래 혹으로 생각했다’고 보도했다.
  
  최영희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군 수뇌부와 미군에서 박 장군에 대한 말들이 많아 내가 그를 전보시켰다”고 말했다. 자신은 비록 박정희의 整軍論(정군론)에 동감하고 있었지만 그를 계속 부산에 두는 것은 지휘 체제에 혼란을 부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이종찬 장관, 허정 수반,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까지도 군대를 안정시켜야 할 때이지 개혁할 때가 아니란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박정희는 인사참모 박태준 대령을 1관구 사령관의 참모장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장도영 2군 사령관이 박정희에게 “지금 참모장은 내가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계속 써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1관구 사령관 박정희를 따라 광주로 간 참모는 윤필용 중령이었다. 박태준 대령은 후임 군수기지사령관 박현수 소장이 “같이 일하자”고 붙드는 것을 마다하고 두 번째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광주의 1관구 사령부는 예산이 부족해서 장교들의 회식도 좀처럼 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사령관 전속 부관 金聖龜(김성구) 대위가 전화를 걸어 윤 중령에게 “사령관께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신다”고 했다. 사령관 있는 데로 갔더니 박정희는 부사령관, 참모장과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윤필용이 나타난 것을 힐끗 보더니 “웬일이야”라고 했다. 윤 중령은 찾는다고 해서 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박 소장은 윤 중령을 합석시키더니 술과 고기를 권했다. 한참 술잔이 돌아 거나하게 취하자 박정희는 부사령관을 보면서 말했다.
  
  “실은 내가 윤 중령을 오라고 했소. 나를 따라다니는 이 친구가 데려온 자식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윤 중령은 그 말에 눈물이 핑 돌더라고 한다. 윤필용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청년 장교들이 박 장군을 따랐던 이유는 그분이 나라 걱정을 많이 하고 부하들을 골육의 정으로 사랑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밥 주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를 가장 좋아하는 식구를 따른다고 합니다. 한번 그분의 부하가 되어 본 많은 장교들이 심복이 되었습니다.”
  
  내각제로 개헌이 이루어진 뒤 치러진 1960년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219개 민의원 선거구 가운데서 172명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다. 압도적 지지를 받은 민주당이 단결만 했더라면 정치적 안정과 거기에 바탕한 경제 발전도 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間選(간선)된 민주당 舊派(구파)의 윤보선은 국무총리 후보에도 舊派 김도연 의원을 지명했다. 이에 반발한 新派(신파)가 국회 인준 투표에서 부결시켜 버렸다. 할 수 없이 윤 대통령은 신파의 장면 의원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는데 구파가 반발해 겨우 10표 차이로 인준되었다. 이념이 아닌 인맥에 따라 파당적 분열상을 보이고 끝내는 分黨(분당)으로 치닫게 되는 민주당의 사정은 사회 혼란과 5·16을 부르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다.
[ 2011-01-27, 10: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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