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살 길은 革命 뿐”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4)/ ‘가도 가도 視觀이 보이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이러한 道程을 줄달음질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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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 중령의 로비
  
  1960년 8월19일, 장면 신임 총리가 국회에서 인준되고 내각 구성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자 整軍派(정군파) 장교들의 대표격인 김종필 중령은 군복을 입은 채로 중앙청에 있던 국무총리실을 찾아갔다. 국방장관 인선에 대한 건의를 할 참이었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인 宋元英(송원영) 비서관이 나오더니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군 관계 일로 건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금 組閣(조각) 때문에 바쁜데 여기를 군복 입고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소.”
  
  “군인이니까 군복 입고 오지요. 조각은 군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조각을 결심하시기 전에 총리 각하에게 건의를 드리려고 합니다.”
  
  송 비서관은 김종필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어, 당신이 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요?”라고 했다.
  
  “忠情(충정)으로 왔습니다. 꼭 뵙게 해주십시오.”
  
  송원영은 총리실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도저히 말씀드릴 상황이 아닌데, 이러면 어떻겠소. 내일 아침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명륜동 자택으로 오시오”라고 했다.
  
  총리실에선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민주당 구파 보스인 柳珍山(유진산) 의원이 씩씩거리면서 나왔다. 그가 옆방으로 들어가니 기다리던 기자들이 몰려 들어갔다. 김종필도 슬그머니 다가갔다. 유진산이 기자들에게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 내가 뭐 무리한 요구를 하느냐 말이야. 저 사람 인식이 그렇게 되어 있질 않아.”
  
  보아 하니 조각의 신·구파 배분 문제로 총리와 격론을 벌이다가 합의를 보지 못한 듯했다. 김종필은 다음날 새벽 일찍 명륜동 총리 사택으로 갔다. 현관에 들어서니 벗어 놓은 구두가 수십 켤레나 되었다. 안은 찾아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금 기다리니 장면 총리가 나왔다. 김종필이 다가가는데 주위에서 밀어붙여 접근이 되질 않았다. 장 총리는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송원영 비서관이 장면 총리 뒤를 따라 나왔다. 송 비서관이 김종필을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내가 나중에 말씀을 전하고 당신께 알려드릴 테니 전화번호를 주시오”라고 했다. 김종필은 다시 한 번 “꼭 이런 말씀을 드려 달라”고 다짐했다.
  
  “군을 정화한 뒤 떠날 수 있는 사람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그 일을 밀어줄 수 있는 분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처벌을 받아도 달게 받겠습니다.”
  
  김종필이 육본 첩보부대 기획처장실로 돌아가 있는데 송 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총리께 그대로 말씀드렸는데 총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소.”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조각 협상에 실패하여 첫 내각은 신파 의원들로만 구성되었다. 구파는 별도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하여 分黨(분당)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8월23일, 장면 총리는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국방장관은 玄錫虎(현석호) 의원이었다. 행정 관료 출신으로서 군대를 잘 모르는 그가 국방장관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생 玄錫朱(현석주)때문이었다. 현 준장은 육사 2기 출신으로서 박정희와 동기이고 金載圭(김재규)와 가까웠다. 형이 야당 의원이라고 진급에서 누락되어 4·19 이후에야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면 총리는 동생이 장성으로 있으니 그를 통해서 군대 사정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현석호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고 한다(현석호의 회고록).
  
  정부는 8월29일, 새 육군 참모총장으로 최경록 참모차장을 승진시켰다. 최영희 총장은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옮겼다. 9월3일, 정부는 육군 참모차장으로 김형일 군단장을 임명했다. 최경록 중장은 민주당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군의 수뇌부가 새로 짜여지고 있을 때 김종필 중령을 주축으로 한 정군파 장교들은 여러 사건들을 일으킨다. 이낙선의 《5·16 혁명사 증언록》을 기준으로 하여 날짜별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ㆍ9월9일: 김종필 등 장교 11명은 한강에서 놀잇배를 타고 ‘국방장관에게 3성 장군을 전부 예편시키고 2성 장군을 참모총장과 차장에 임명할 것을 건의하기로’ 합의.
  
  ㆍ9월10일: 이들은 국방장관실을 찾아갔으나 장관은 만나지 못하고 丁來赫(정래혁) 총무국장에게 자신들의 뜻을 전달. 정군파 장교들은 충무장이란 일본식 음식점에서 만나 구태의연한 민주당 정부에 더 기대할 것이 없으니 정군에서 혁명으로 투쟁 방법을 바꿀 것을 논의했다. 석정선, 石昌熙(석창희) 중령은 쿠데타를 반대했고, 崔俊明(최준명) 대령은 5사단 참모장으로 나간 뒤여서 행동을 함께할 수 없었다. 남은 아홉 명이 혁명 추진을 위한 기본 임무를 정했다.
  
  김종필: 계획 전반, 金炯旭(김형욱): 정보, 鄭文淳(정문순): 정보, 吳致成(오치성): 인사, 金東煥(김동환): 경제, 吉在號(길재호): 사법, 玉昌鎬(옥창호): 작전, 禹瀅龍(우형룡): 작전, 申允昌(신윤창): 작전.
  
  ㆍ9월 하순: 聯參(연참) 총장으로 옮긴 최영희 중장이 초청한 미 국방부 군원국장 파머 대장이 離韓(이한)성명에서 ‘군내에 일고 있는 정군 움직임은 전투 경험을 가진 장성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빚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최경록 총장은 ‘이 성명은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요지의 반박 성명을 냈다. 김종필 등 정군파 장교들도 발칵했다. 일부 장교들이 최영희 연참 총장을 찾아가 항의하려다 헌병대에 연행, 훈방되었다. 최영희는 이 장교들을 불러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16명의 장교들을 하극상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겼다>
  
  최영희 당시 연참 총장은 그해 10월6일 사퇴했는데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때 군에선 육사 8기생들에 대한 대책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6·25를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치르면서 엄청난 인명 손실(약 40%가 전사)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진급도 늦어 중령 계급장을 8, 9년째 달고 있어 상관들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김종필 중령은 그때 나이가 만 36세, 2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은 37세였다. 나이는 한 살 차이지만 계급은 중령과 중장 차였다. 8기생들은 엘리트 의식이 있어 상관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전투는 우리가 다 했는데 훈장은 저들이 독차지했다’, ‘별을 달고 있으면서도 讀圖法(독도법)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식으로 불만들을 표현했다.
  
  매그루더 사령관
  
  군부가 김종필 중령 등 8기생 장교들이 제기한 정군 문제로 시끄럽던 9월10일 최경록 신임 육군참모총장은 후속 인사에서 1관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불러올렸다. 이 직후 박정희가 남긴 두 편의 글이 있다.
  
  박정희는 편지를 많이 쓴 사람이다. 대통령에 있을 때도 그 바쁜 일정 속에서 수많은 私信(사신)을 보내 받는 이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는 지위의 高下(고하)나 신분의 貴賤(귀천)을 따지지 않고 꼭 답장을 했다. 1960년 9월23일 박정희가 부산 영남상업고교 李東龍(이동룡) 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예이다. 이동룡은 4·19 혁명 때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이승만 하야 뒤의 혼란기에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의 지시에 따라 질서 유지에 협력했다. 박정희가 李교사에게 보낸 답장의 요지는 이러했다.
  
  <형들의 힘으로 성취한 4·19 혁명은 이 나라, 이 겨레에 강심제를 놓고 활력소를 주입케 한 역사적인 혁신이었습니다. 혁명의 격동기에 형들과 동일한 공간성에 處在(처재)하였고 호흡을 같이 했다는 것을, 생애를 통해서 잊지 못할 인연이자 본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9월10일자로 다시 육본으로 전속 발령을 받고 지금은 減軍(감군) 문제 등 복잡한 시기에 본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에 오시는 기회가 有(유)하시면 必(필)히 往訪(왕방)하여 주심을 고대합니다>
  
  이 편지를 쓴 6일 뒤에 박정희가 자신의 잡기장에 쓴 글이 전한다.
  
  <만사가 이대로만 순환하고 진전이 없다면 명일의 사회는 여하히 될 것인가. 사월 혁명에 鮮血(선혈)을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찾으려고 선두에 서서 젊은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학도들이 또다시 거리에 나와서 생활 계몽을 호소하고 기성인들의 경각을 부르짖었다. 정열과 반응이 없는 사회의 무신경함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왕왕이 탈선도 한다. 이 나라의 지도층을 자처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近者(근자)의 무절제하고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데는 통탄을 不禁(불금)한다. 국민 대중은 신생 제2공화국의 혁신적인 시책과 국민 생활 향상을 위해서 지대한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관망하고 있다.
  
  然(연)이나 정국은 亂麻(난마)와도 같이 헝클어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露呈(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가고 있다. 亂(난)하면 악한 놈이 득세한다는 옛말대로 李(이) 정권하에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가도 가도 視觀(시관)이 보이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이러한 道程(도정)을 줄달음질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毒素(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회─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 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大精神(대정신)으로 돌아가자>
  
  이 무렵 씌어진 박정희 측근 이낙선 소령의 잡기장 속 雜文(잡문)도 정군파 장교들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조국아! 당신은 영영 시들려나.
  
  이 나라를 구하는 길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장면 씨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回心大悟(회심대오)하여 私心(사심)을 버리고 솔선수범을 하고 나서 일대 혁신 정책을 쓰는 방법. 둘째, 군에서 일대 혁신을 단행하여 국민에 모범을 보이고 秕政(비정)하는 정부를 강압적으로 시정시키는 방법. 셋째, 혁명으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
  
  이상 세 가지 방법에서 첫째 것은 장면 씨에게 새로운 사람이 되어 달라는 것인데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둘째 방법에는 군의 지휘관들 중에 앞장서서 대담하게 일할 사람이 없다. 그들도 정부 고관과 다름없이 썩었다. 썩지 않은 장군에게는 참모총장직을 맡길 리가 없다. 셋째 방법만이 한국의 살 길이다. 그리고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 학생들도 이젠 그들의 무기력을 노정시키고 말았다. 혁신계는 공산화할 위험이 있으며 족청계는 사심이 너무 크다. 忠誠無私(충성무사: 어느 정치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한 군인이 혁명을 일으켜 일정한 기간 군정으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만들고 건설은 智者(지자)에 넘겨주도록 해야 한다>
  
  1960년 가을, 박정희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군 수뇌부와 미 8군은 그를 김종필 중령이 주동한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의 해묵은 좌익 전력을 문제 삼아 예편시키려고 했다. 박정희는 16인 사건(최영희 연참 총장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연행된 사건)과는 관계가 없었다. 김종필 중령은 처삼촌이 오해를 받을까 하여 이 무렵 일부러 박 소장을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미군 측에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박정희를 예편 조치하라는 압력을 장면 정부에 넣었다. 매그루더 대장은 직접 현석호의 후임인 權仲敦(권중돈) 국방장관과 최경록 참모총장을 만나 그런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미군은 한국군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군파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히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다. 한국군에선 6·25 전쟁을 통해서 입증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사상 문제에 대해서 관대한 미군 측에서 오히려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金永善(김영선) 재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국방부 고위 관리가 박정희를 거명했다고 한다.
  
  “한국군의 작전참모부장은 공산주의자다. 체코슬로바키아도 공산화되기 전에 육군의 작전국장이 빨갱이였는데 그 사람이 주동이 되어 국가 전체를 공산화시켰다. 만약 한국 정부가 박정희 소장을 그 자리에 둔다면 우리는 원조를 再考(재고)하겠다.”
  
  김영선 장관은 귀국한 뒤 장면 총리에게 이 말을 전했고, 장 총리는 최경록 총장에게 미국 측의 뜻을 알려 주었다(이낙선의 《정의의 수난》). 매그루더는 1960년 11월18일 최경록 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현재 군법회의에 넘어가 있는 16인 抗命(항명) 사건을 엄격히 다루고 그 선동자들을 조종한 장군 두 명을 군에서 제거한다면 미 국방부의 태도는 한국 측에 유리하게 바뀔 것이다’고 했다.
  
  ‘조종한 장군 두 명’으로 지목된 것은 박정희와 인사참모부장 朴炳權(박병권) 소장이었다. 박정희의 당시 직속 부하는 공교롭게도 1948년 특무과장으로서 肅軍(숙군) 수사를 주도했던 金安一(김안일) 준장이었다. 작전참모부 차장이던 김 준장은 미군 측에서 박정희 작전참모부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불시에 미군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한국 방어 계획 문서를 점검하는 것이 무슨 약점을 잡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 2011-01-28, 12: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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