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거주 교포와 긴급통화!
"죄수들 탈출. 이집트 박물관에 폭도가 들어가 유물을 약탈. 빈곤층과 청년층이 가담. 민주화가 아니라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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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 10여 년 간 여행업에 종사하는 40代 한국 교포 李모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 30일 새벽 두 시, 카이로 시간으론 저녁 7시였다. 그는 通禁 조치 때문에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카이로 교외의 주택가인데, 한국인들과 외교관들 및 상류층이 많이 사는 곳이다.
  
  “조금 전에 집 바깥에서 총성이 10여 발 들렸습니다. 감옥에서 죄수들이 탈출하였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주민들이 일종의 自警團을 조직, 칼과 쇠파이프 같은 걸 들고 순찰을 돌더니 보이지 않는군요. 저도 두렵습니다. 경찰이 숨어버리니 약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알자지라 방송에 이집트 박물관 약탈 장면이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폭도들이 이 세계적 박물관에 들어가 유물이 들어 있는 유리상자를 깨고 보물들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특히 그 유명한 투트앙카아몬 왕릉에서 나온 유물도 훼손된 것 같다고 했다. 박물관으로 군의 특공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 앞 해방광장은 시위대가 모이는 중심이다.
  
  지금은 이집트 여행철이다. 李씨는 자신이 안내하기로 하였던 여행단의 한국 출발을 중지시켰다고 했다. CNN의 보도에 따르면 외국 여행객들은 카이로 공항에 묶여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는 것이다. 많은 항공사들이 카이로행을 취소시키고 있다.
  
  李씨는 이번 시위로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심이 사라진 것이 가장 놀라운 사태전개라고 했다.
  
  “경찰은 권력층의 앞잡이로서 국민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이들에 대한 분노가 이번 시위의 한 요인인데, 시위대가 與黨 당사를 불지르고, 경찰서를 습격을 하면서 국민들이 용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내무부 청사를 공격하다가 총을 맞고 죽은 시민의 屍身을 국기로 덮어 이고 다니는 장면이 알자지라 방송에 보도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우리는 두렵지 않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공포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사태는 아무래도 오래 갈 것 같습니다.”
  
  그는 시위를 촉발시킨 것은 빈곤이라고 했다.
  
  “자유나 평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도 청년층과 함께 빈곤층이 많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충분히 먹지 못하여 배고픈 국민들이 10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실업률은 9%라고 발표되지만 실제론 30% 정도 될 것입니다. 월급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데 이들이 들고 일어나 무바라크를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든 셈입니다.”
  
  요컨대 이집트 국민들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부르짖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시위대가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이슬람 극단세력의 선동에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李씨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100명 이상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면서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에 이어 유명한 유적 도시 룩소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고 했다.
  
  “정부가 오늘 아침부터, 어제 불통시켰던 휴대 전화를 다시 열었지만 인터넷은 열리지 않습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킨 게 오히려 국민들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시위 사태가 장기화되고 경찰이 無力化되면 약탈사태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公共건물만 공격을 받지만 은행이나 부자촌이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회질서가 무너지면 군대가 사태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李씨와 통화해보니 카이로 사태가 CNN과 BBC를 통해서 본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광범위한 소요라는 느낌이 들었다. 82세의 老독재자가 극복하기엔 너무 큰 사태가 아닐까? 불똥이 중국이나 북한까지 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독재자들이 떨고 있다. 독재자들의 치명적 약점은 물러나면 죽거나 감옥行, 또는 망명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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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에서 혁명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軍 장갑차를 에워싼 군중이 함성을 지르고 장갑차 위에 올라가도 군인들이 속수무책이다. 1960년 4.19 학생혁명 때 보았던 장면과 흡사하다.
  趙甲濟
  
   CNN은 카이로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夜間 시위를 생중계하고 있다. 전국에 통행금지가 선포되고 군대가 배치되었는데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軍 장갑차를 에워싼 군중이 함성을 지르고 장갑차 위에 올라가도 군인들이 속수무책이다. 1960년 4.19 학생혁명 때 보았던 장면과 흡사하다. 그때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펴지고 출동한 군대와 戰車를 시민들이 에워싸고 환영하면서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군인들은 발포를 하지 못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경찰은 싫어하지만 군인들에겐 우호적이다. 시위대는, "국민과 군대는 하나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카이로 시내에 있는 여당 국민 민주당의 본부 빌딩이 불타고 경찰서가 공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총성도 들린다. 4.19 때도 어용신문사가 불타고 경찰서가 공격을 받았으며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집이 습격을 당하였다. 힐러리 클린턴 美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이집트 보안군과 경찰이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것을 우려한다"면서 이집트 정부에 대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혁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하였다. 1979년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후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을 많이 지원하였던 미국이 한 발 빼는 모습이다.
  
   새벽 3시 현재 CNN, BBC는 카이로 사태만 다루고 있다. 이집트 당국은 反정부 시위를 막기 위하여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켜버렸다. 이집트에 사는 한국인 知人에게 국제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30년간 鐵拳통치로 이집트를 이끌었던 82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곧 對국민연설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 연설이 그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군대는 가장 잘 조직된 세력이며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군대가 前面에 나서서 무바라크 대통령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 사태를 수습할 가능성이 있다. 바햐흐로 카이로에서 혁명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中東 최대국가가 요동치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슬람권 혁명이 어디까지 번져갈지 주목된다. 김정일도 떨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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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가 흔들리면 세계가 요동친다!
   오늘도 최대규모의 시위가 예고되어 있다. 30년간 독재를 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1960년 李承晩 대통령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
   趙甲濟
  
   카이로를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反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도 최대규모의 시위가 예고되어 있다. 30년간 독재를 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1960년 李承晩 대통령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
  
   불만이 많은 失業상태의 청년층이 시위를 주도한다. 대통령은 80세를 넘어 결단력이 약해졌다.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경제난이 결합되어 국민불만이 퍼지고 있다. 시위가 격화될 때 군인과 경찰이 발포명령을 들을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독재정부는 진압군이 발포를 거부하면 무너진다. 前 IAEA(국제원자력 기구) 사무총장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오스트리아에서 귀국, 시위에 참여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가 反정부 시위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내심 親美노선을 충실히 걸어온 이집트의 안정을 원하지만, 무바라크 몰락 이후를 겨냥한 路線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 시위에 학생들이 가담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1908년에 開校한 카이로 대학은 학생수가 20만 명에, 교직원수가 1만2000여 명이다.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한다. 중동의 人材 양성소이다. 만약 카이로 대학생들이 무바라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다면 큰 변혁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카이로 대학의 유명한 졸업생으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 야셀 아라파트 PLO 의장(사망), 배우 오마 샤리프,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사망), 전 국제원자력 기구 사무총장 엘바라데이, 알카에다의 2인자 알 자화이리 등이 있다.
  
   전략적 영향력면에서 가장 중요한 중동 국가인 이집트의 政情불안은 중동뿐 아니라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집트는 외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중동의 지도국이라 할 만하다. 인구도 9000만 명에 육박, 중동 최대국가이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사다트, 무바라크를 거치면서 60년간 이집트를 이끌었다. 한때 제3세계 운동의 지도국이었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세 번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도 선두였다. 중동이 극단적으로 기울지 않도록 중심을 잡은 나라이기도 하다.
  
   중동 여러 나라의 지도층을 양성한 親美국가이면서도 이집트 사회는 알카에다, 무슬림형제단 등 과격세력의 사상적 온상이 되었다. 거대한 역사, 문화, 인구,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이집트의 政變은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처럼 세계사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1973년 10월에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기습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이 석유파동을 불러 한국의 進路에도 결정적 작용을 했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동 과격세력의 모태인 무슬림 형제단이 이번 시위에 가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세력이 정권을 잡는 사태가 발생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물론 오늘의 이집트는 개방적이고 다양하여 호메이니식 神政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은 낮다.
  
   이집트는 북한과 친했지만 한국과 수교한 뒤엔 다방면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요사이는 이집트 관광철이라 많은 한국인들이 이집트를 찾고 있다. 이집트 사태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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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정부 시위 격화, 카이로에서 느낀 것
  
  
   높은 청년 실업, 권력층의 부패, 선거부정은 봉기를 부른다.
   趙甲濟
  
   지난 25일 오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조용하였다. ‘경찰의 날’이고 공휴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8일간의 이집트 여행을 끝내고 공항으로 달렸다. 전날 극심한 교통 停滯(정체)를 목격한 터라 한 시간 이상 걸릴 줄 알았는데, 30분만에 도착하였다. 이날 카이로에서 무바라크 집권 이후 최대 규모의 反(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CNN의 추산으론 약 2만 명이 모였다. 경찰이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진압에 나섰다. 카이로에서 한 명(경찰관), 수에즈에서 세 명(시위자)이 죽었다.
  
   北(북)아프리카의 투니시아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23년간 장기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이 달아난 뒤 인근 아랍(이슬람) 국가들의 政情(정정)이 불안해진 가운데 이집트에 불똥이 튄 셈이다. 이집트는 세계 最古(최고)문명을 바탕으로 아랍세계의 정신적, 사상적 흐름을 주도해온 나라이다. 학생수가 20만 명이나 되는 카이로 대학 졸업생들이 아랍세계의 엘리트층에 많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무슬림 형제단(MB=Muslim Brotherhood)은 아랍세계로 퍼져 하마스와 알카에다 같은 극단적 세력의 人力(인력)공급원이 되었다.
  
   이집트는 사다트 대통령의 결단으로 1978년 이스라엘과 화해, 전쟁에서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되찾고 親美(친미)국가가 되었다. 사다트는 1981년에 암살되고 공군사령관 출신의 부통령이던 무바라크가 권력을 승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바라크는 집권 30년 동안 이집트를 지도하면서 이 나라의 국제적 位相(위상)을 높였다. 미국은 이집트에 매년 1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하고 있다. 미국은 1975년 이후 230억 달러를 이집트에 지원하였다. 中東(중동)에서 미국정책을 지지해준 대가였다. 무바라크는, 군대와 경찰을 이용한 鐵拳(철권)통치로 反정부 활동을 억제하였고 미국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집트도 이란, 파키스탄처럼 이슬람 공화국을 표방하나 이란 같은 神政(신정)체제와는 많이 다른 개방성과 다양성을 보장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 마가가 시작한 세계最古의 기독교 宗派(종파)인 콥트 교도는 全(전)인구의 10%를 차지한다.
  
   문제는 나세르가 시작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이다. 무바라크 정부는 계획경제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높은 인플레, 財政(재정)적자, 실업률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성패를 좌우하는 제조업의 기반도 약하다. 특히 청년실업자가 많다. 직장을 갖지 못한 청년들의 불만은 정치적 변혁 운동의 불씨가 된다.
  
   8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이집트는 매년 불어나는 130만 명의 인구를 감당해야 한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며칠간의 여행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인구가 2300만 명이나 되는 카이로의 도로엔 車線(차선)도,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없다. 車, 사람, 당나귀, 오토바이, 자전거가 公有(공유)하는 도로이다. 세계에서 가장 혼잡스러운 도로일 것이다. 교통정리는 경찰관들이 수신호로 한다. 신호등을 만들면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집트의 가장 큰 외화수입원은 관광이다. 정부는 관광경찰을 두어 외국 관광객을 보호한다. 23명의 한국인 여행객이 탄 버스엔 두 명의 이집트인 가이드가 배치되었다. 나일강 크루즈船(선)에도 관광경찰이 총을 들고 탄다. 관광버스가 아부 심멜 신전 등 유명 관광지로 갈 때는 무장한 경찰이 소형 트럭을 타고 앞장을 선다.
  
   反정부 시위대는 무라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5選(선)의 무바라크는 출마하지 않고 아들을 출마시킬 것이란 예상이었는데, 이번 시위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이집트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6300달러이다. 정경유착으로 貧富(빈부)격차가 심하다. 특히 무바라크 측근들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이번 시위의 한 원인이었다.
  
   北아프리카 국가들의 政情불안을 몰고 온 투니시아의 경우도 벤 알리 대통령 一家(일가)의 부정 부패가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낸 主(주)원인이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지난 20여년간 투니시아를 가장 성공적인 아프리카 국가로 만든 사람이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09년에 투니시아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나라로 뽑았다. 1인당 국민소득도 8000달러를 넘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최상위급이었다. 벤 알리 대통령은 16세까지의 의무교육, 여성의 사회참여 장려 등 개혁조치도 성공시켰다.
  
   이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一家의 부패, 청년층 실업의 증가, 분신자살,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알리 대통령을 國外(국외)탈주자로 만들었다. 권력자들의 부패는 毒藥(독약)이다. 가장 부패한 권력자인 김정일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 2011-01-27, 07:58 ] 조회수 : 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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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東격변의 주동자는 '화 난 젊은층'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무장.
   趙甲濟
  
   정치적 激變(격변)을 부르는 원동력은 '화 난 젊은 층'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1960년의 4.19 학생혁명, 그 1년 뒤 청년장교들이 주도한 5.16 군사혁명, 광주사태, 1987년의 6월 대시위. 지금 이슬람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시위 열풍도 그렇다. 20여년의 독재정부를 몰아낸 튀니지 민중봉기, 이집트를 뒤흔드는 거리 시위도 젊은 층이 주인공들이다.
  
   카이로 시내를 달려보면 거리가 사람으로 넘친다.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특히 젊은 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하루 하루를 헛되이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어느 나라든 청년층 失業은 가장 큰 정치불안 요인이다.
  
   中東 청년층은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니 자연히 정부에 불만이 많다. 최근엔 이 불만을 조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트위트, 페이스북, 인터넷 등 이른바 '소셜 미디어'가 시위를 기획, 홍보, 실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카이로에선 오늘 대규모 시위가 예보된 상태이다. 정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접속을 차단하였지만 實效가 별로 없다. 시위를 홍보하고 있는 한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8만 명이 넘는 '팔로워'가 등록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찰에 의하여 맞아죽었다는 한 시위자를 추모하는 페이지엔 순식간에 2만 명이 등록하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시위를 미리 알리고 현장을 생중계한다. 기자들이 가기 어려운 지방의 시위소식을 동영상과 함께 생생하게 알려준다. 누가 경찰에 붙들려 갔다는 속보도 재빨리 유통된다.
  
   이집트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젊은층이다. 가장 잘 조직된 反정부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은 이번엔 구경만 하다가 뒤늦게 시위 참여를 선언하였다. 새로운 언론환경이 정치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2012년 한국의 총선과 大選에서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는 도태된다.
   [ 2011-01-28, 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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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으로 요약한 이집트 5000년 역사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인, 그 뒤 2500년간은 외국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趙甲濟
  
   이집트는 흔히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여러 민족과 종교가 이 땅을 스쳐갔다. 5150여 년 전 최초의 통일국가가 일어나고,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 4700년 전 古王國 시대부터 계산하면 고대 이집트인, 아시리아인, 페르샤인, 그리스인, 로마인, 비잔틴 사람들, 아랍인, 맘루크(투르크계의 노예 戰士), 오스만 투르크인, 프랑스인, 알바니아인, 영국인이 잇따라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였다. 종교도 자주 바뀌었다. 고대 이집트 종교, 그리스-로마의 多神敎, 기독교, 이슬람이 交代하였다. 지금은 약90%가 이슬람, 10%가 기독교인(콥트)이다.
  
   고대 이집트가 역사에 등장한 서기 전 3150년부터 페르샤의 屬國이 된 기원 전 525년까지 약2600년 간 이집트는 外勢의 침략을 막고 매우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아시리아가 서기 전 670년에 쳐들어왔지만 곧 토착세력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26세기에 걸친 안정된 문명은 人類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 기간에 이집트는 가장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문명을 유지하였다. 이집트의 문화재가 많은 이유도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길었던 덕분이다. 그렇게 많이 약탈당하고도 이집트에 남은 遺跡과 유물은 찬란하고 방대하다.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페르샤에 정복된 기원 전 525년 이후 약2500년간 이집트는 外勢통치를 겪었다.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인, 그 뒤 2500년간은 외국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 장교단의 쿠데타로 알바니아계 王家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건은 서기 전 6세기 이후 25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집트인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뜻하였다.
  
   시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연애를 하고, 기원 전 30년에 독사에 물려 자살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이 아니고 그리스인이다. 이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미 王朝의 마지막 왕이었다. 프톨레미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다. 대왕이 죽은 뒤 이집트를 차지, 王朝를 세운 뒤 서기 전 305년부터 서기 전 30년까지 275년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그리스인이었지만 이집트化 하여(북방 민족이 중국을 차지한 뒤 중국화 하듯이) 古代 이집트의 전통을 이어갔다. 왕도 고대 이집트처럼 파라오로 불렸다. 이집트의 중요 유적을 복원, 재건한 것은 프톨레미 王朝였다. 당시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로 만든 이 도시에는 수많은 학자, 예술인들이 모여 들고 古代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들어서는 등 그리스-로마 세계의 학문적, 사상적 중심이 되었다.
  
   기원 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옥타비우스(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패전, 자살한 사건은 古代 이집트의 종언을 뜻한다. 이집트는 로마영토가 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는 4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기독교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였다.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마가복음을 쓴 마가가 이 도시로 와서 교회를 세웠다. 이 신도들을 콥트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이들이다. 자신들을 세계 最古의 기독교라고 여긴다. 三位一體 등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이 발전시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공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집트는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자 동로마제국(비잔틴) 영토가 되었고, 아랍족이 이슬람으로 무장,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쳐들어와 비잔틴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점령한 7세기 초까지 기독교 국가였다. 7세기 초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는 이슬람.
  
   이집트를 사람 몸에 비유하면 下體는 古代 이집트, 허리는 그리스-로마, 가슴은 이슬람, 머리는 西歐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多인종, 多문화, 多종교 사회이다. 이런 복잡성을 구현하는 도시가 카이로이다. 피라미드, 모스크, 교회가 공존한다. 지금의 이집트는 1400년간 계속된 이슬람 세력 통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겉으로는 이슬람 문화이다.
  
   1400년간의 이슬람 통치 기간중에 아랍족이 지배민족이었던 시기는 짧았다. 1250년 경 투르크 노예戰士 집단인 맘루크가 쿠데타로 집권, 王朝를 세워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特記할 만한 사건은 서구, 중동으로 밀려들던 몽골 騎馬군단의 進軍을 저지한 것이 맘루크의 騎馬군단이었다는 사실이다. 1260년 이집트의 맘루크 기마군단은 바이바르스 장군의 지휘 하에 지금의 이스라엘(당시는 이집트 영토)에 있는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대와 결전, 승리하였다. 맘루크는 몽골의 騎馬術과 비슷한 戰法을 익힌 집단이었으므로 유럽의 기사들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를 원정, 일시 점령하였다. 교양 있는 이 영웅은 수백 명의 학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집트의 유적과 문화를 조사,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앞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4000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고 연설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왕의 방’을 구경하고 나왔는데 큰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창백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을 유럽에 알리는 데는 나폴레옹의 이 원정이 결정적 계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 문명을 지켜냈고 나폴레옹은 잊혀진 그 문명을 다시 드러냈다.
  
   오스만 투르크 치하의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알리가 1805년에 이집트의 총독이 되더니 사실상 독립국처럼 다스렸다. 이집트 사람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알리가 지은 모스크는 카이로 시내를 내려다 보고 멀리 피라미드까지 보이는 언덕 위 요새 시타델 안에 있다. 이 모스크엔 그의 무덤이 있다. 모스크로 올라가는 길목은 골목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맘루크의 잔존세력이 최후를 맞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근대화 개혁을 반대하는 맘루크 귀족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면서 소집하였다. 400명이 넘는 맘루크 귀족들이 골목을 지날 때 양쪽에 매복하였던 군인들이 총을 쏴 沒殺시켰다.
   무하마드 왕조의 이집트는 1882년엔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집트는 1922년에 정식으로 독립하나 영국 군대는 1954년까지 이집트에 주둔하였다.
   1952년 민족주의 열정으로 무장한 자유 장교단이 나세르의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바니아 계열의 마지막 왕 파루크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집트가 서기 전 6세기 페르샤에 망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인이 지배세력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 군부가 배출한 세 사람이 나세르, 사다트, 그리고 무바라크이다.
  
  
  
  
  
  
[ 2011-01-30, 03: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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