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동하는 쿠데타의 꿈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5)/ 장면 총리는 박정희를 의심하고, 육군 방첩대도 쿠데타 모의설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박정희를 근접 감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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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관념
  
  김안일 육본 작전참모차장은 미군이 최경록 총장을 통해 박정희 작전참모부장을 예편시키라는 압력을 넣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박정희 소장이 총장실로 불려 들어가더니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김 준장도 퇴근을 미루고 직속 상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두워진 뒤 박정희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총장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듯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한참 있더니 박정희는 김안일에게 말했다.
  
  “내 문제는 김 형이 좀 설명해 줄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말은 박정희가 소령 시절 좌익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 육본 정보국 특무과장으로서 박정희의 생명을 구해주는 데 기여했던 김안일이 8군 사령관에게 가서 “박정희는 지금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해명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김안일은 그런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영어를 잘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통역을 데려갈 처지가 아니었다. 김안일은 “박정희 장군은 그때 쫓기는 입장이었다. 군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사단장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민주당 소장파의 지도자 李哲承(이철승) 의원에게도 救命(구명)을 부탁했다. 박정희와는 육사 2기로서 동기인 韓雄震(한웅진) 준장은 이철승과도 친구였다. 한 준장이 찾아와서 대신 부탁을 하더니 나중엔 박정희가 직접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러 왔다.
  
  “6·25 때 실컷 고생했는데 이런 식으로 쫓아내도 되는 겁니까.”
  
  국회 국방위원장이던 이철승 의원은 한때는 국방장관이 되고 싶어했다. 군대를 잘 아는 그가 장관이 되었더라면 5·16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철승은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를 위한 변호를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 내보내면 반발이 커집니다. 내보낼 때는 훈장이라도 주어 내보내야 합니다.”
  
  당시 이철승 의원의 당내 영향력은 장면 총리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이철승은 “장면 총리가 내 말을 듣고 박정희 장군의 옷을 벗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5·16 뒤엔 그들의 탄압을 받아 최장 기간 정치 규제에 묶여 있게 되었지만…”이라고 했다.
  
  이 무렵 육사 교장 이한림 중장이 장면 총리의 부름을 받고 서울 반도호텔의 총리실로 갔다.
  
  “이 장군, 항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군인들이 혁명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내막을 알고 있소? 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시오.”
  
  이한림도 박정희 소장과 족청계 출신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설을 듣고 있었다.
  
  이한림은 바싹 긴장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머리를 속히 회전시켰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회고록 《세기의 격랑》).
  
  “저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육사에 있고 보니 정보가 어두워 확실한 보고를 드리지 못하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총리께서는 총장 이하 고위 장성들, 그리고 정보기관을 통해서 잘 단속해야 하실 것입니다.”
  
  이한림은 문약한 장면이 선비처럼 정치를 하고 있는데 크나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떤 위기의식 같은 그런 불길한 감이 방안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정말 답답한 순간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육사 교장인 나에게 사정하듯 물어 보니 난들 어떻게 하랴 싶었다. 그의 주변 인물들 중에는 문민 통제를 앞세워 군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매우 심했다.
  
  나는 정치인의 그런 풍조를 매우 염려했다. ‘정치는 힘인데 정치인이 군 장성을 무시한다면 군의 힘이 정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이 사람들이 정치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기의 격랑》)
  
  특무대의 後身(후신)인 육군 방첩대도 끊임없이 쿠데타 모의설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박정희를 근접 감시하기 시작한다. 이낙선 소령이 쓴 《정의의 수난》이란 기록을 인용한다.
  
  <하루는 난데없는 군고구마 장수가 박정희 장군의 신당동 집 앞에 자리 잡았다. 조그마한 골목길에다가, 더욱 고참 장수가 버티고 있는 곳에 격에 맞지 않는 풋내기 장수가 대담하게도 들어앉았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 백 환을 든 박 소장은 아기(朴志晩·박지만)를 데리고 고구마를 흥정하는 척하면서 고구마 통을 굽어보았다. 불 없는 통 위에는 익은 고구마가 몇 개 뒹군 채 서글프게 놓여 있었다. ‘이것 수상하구나’라고 박 소장은 판단했다. 마침 그때 박 장군 댁을 방문했던 나는 사진기를 들고 나가 풍경을 찍는 척하고 돌려보다간 틈을 타서 초점을 장수에게 맞추었으나 슬쩍 고개를 숙이거나 電柱(전주) 뒤에 허리를 굽히거나 해서 통 찍을 순간을 주지 않았다.
  
  나는 박 장군의 어린 딸(朴槿瑛·박근영을 가리키는 듯)을 데리고 나가 고구마 장수 옆에 세워두고 그 자의 사진을 찍었다. 박 장군은 육사 2기 동기생인 헌병감 沈興善(심흥선)에게 연락하여 고구마 장수를 연행하도록 했다. 취조를 시작하자마자 506 방첩대장의 지시를 받아 잠복근무 중임이 밝혀졌다. 서울지구를 관할하는 506 방첩대 李幸柱(이행주) 중령이 빼앗다시피 가짜 군고구마 장수를 인수해 갔다>
  
  1960년 가을에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장교들과 박정희의 마음에서는 쿠데타의 꿈이 다시 태동하고 있었다. 양쪽은 곧 김종필의 매개로 연결된다. 김종필 그룹은 16인 항명 사건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는 입장에서, 박정희는 미군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입장에서 군사 혁명이란 하나의 탈출구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타도를 위한 계획을 추진하다가 4·19 혁명으로 목표가 사라진 뒤에는 군부 숙청을 새 목표로 하여 뛰었으나 이것이 반격을 부른 것이다. 親美的(친미적)인 장면 정부가 자신의 예편을 요구하는 미국 측 압력을 언제까지나 막아줄지도 자신이 안 서는 대목이었다. 박정희는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 처지로 몰린 것이다. 더구나 시국은 박정희의 그러한 생각을 충동질할 만한 상황을 보이고 있었다.
  
  9월26일 경북 도내 교원노동조합 산하의 교사 8500여 명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교원노조 소속 교사 수천 명이 중구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 와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 金善太(김선태) 무임소 장관으로부터 따귀를 맞았다고 해서 경찰관들이 데모를 하기도 했다. 9월30일엔 철도 태업이 발생했다. 기관사들이 기차를 고의로 徐行(서행)시켰다. 이날 서울시청으로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난입하여 서울시경 경비과장을 때리고 밟아댔다. 市(시)가 불하하려는 대지에 무허가집을 짓고 사는 주민들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
  
  10월8일, 서울지방법원은 3·15 부정선거에 관련되어 구속기소 되었던 郭永周(곽영주) 전 대통령 경호책임자 등 피고인들에 대해서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선고, 석방했다. 그 3일 뒤 4·19 부상 학생들이 문제의 판결에 항의한다면서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본회의는 중단되고 국회의원들은 피했다. 부상자들은 의장 단상을 점령하고 목발로 단상을 치면서 난동을 부렸다.
  
  “너희들은 다 나가라! 우리가 정치를 하겠다.”
  
  “정쟁 국회는 해산하라!”
  
  郭尙勳(곽상훈) 국회의장은 사임서를 제출하고 내무장관이 물러났다. 국회는 소급 입법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소급 입법의 전통은 5·16 후와 5·17(1980년) 후 정치인을 규제할 때, 그리고 1996년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벌할 때도 되풀이되었다.
  
  장면 정부를 무능하게 보이도록 한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언론의 무책임한 정부 亂打(난타)였다. 장면 총리는 얻어맞으면서도 週例(주례) 기자회견을 계속했다. 20대 총각 기자가 맨 앞줄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질문을 던지는데 담배연기가 60대 총리의 얼굴에 사정없이 뿜어졌다.
  
  당시 장면 총리의 공보비서는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 송원영. 그는 ‘마치 언론 자유는 장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 언론이 민주 정권을 독재 정권보다도 더 가혹하게 두들겼다’고 개탄했다(송원영 씀 《제 2공화국》).
  
  <당시 언론기관이 얼마나 막강했는가는 장면 내각의 제1차 국무회의에서 기자단 대책을 논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洪翼杓(홍익표) 내무장관은 “기자단에서 총회를 한다면서 협조를 요청하는데 얼마나 내면 좋겠는가”고 문제를 제기했다. 말이 기자단 총회이지 그것은 걷은 돈을 나눠 가지는 모임이었다. 그런 총회가 1년이면 대여섯 번씩 있었다>
  
  국영방송 KBS도 정부 공격에 가담했다. 송원영이 어느 날 라디오를 들으니 프로그램 진행자가 한다는 말.
  
  “춥고 배고픈데 음악은 들어서 무엇하느냐고요? 글쎄,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방송국장에게 항의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서울 일일신문의 연재만화에는 ‘勉(면)이와 暻根(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란 글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장씨 종친회에서 장면 총리와 입원 치료 중 일본으로 달아난 자유당 실세 장경근이 장 씨란 점에서 창피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만화였다.
  
  총리와 3·15 부정선거 사범을 같이 취급하는 태도에 격분한 송원영은 李寬求(이관구) 사장을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 사장은 “쯧쯧… 이건 너무했는걸!” 하면서 윤전기를 세우게 하더니 만화를 지워 주었다. 송원영은 ‘KBS, 서울신문, 그리고 장면 총리와 가깝던 신문까지 時流(시류)를 따라 총리를 공격하니 장 총리는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고 썼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국가 건설을 위한 몸부림은 이어지고 있었다. 9월 장면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정부 시책으로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부흥부의 李基鴻(이기홍) 기획국장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 시절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적이 있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을 기초로 하여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자유당 때 成案(성안)된 장기 경제개발 계획안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아니 불구대천의 원수 스탈린의 방식을 따르자는 것인가”라고 힐책하여 이 계획은 묵살되었으나 이기홍, 이한빈(당시 재무부 예산국장) 같은 미국 유학파 경제 관료들은 하나의 불씨처럼 그 꿈을 간직해 오고 있었다.
  
  장면 정부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재정 지원을 미국에 요청했다. 장면 총리는 ‘원조 요청 각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면서 內政(내정) 개혁의 단행, 국방비 부담의 축소, 對日(대일) 국교정상화를 약속하고 1961~1965년간 소요될 4억2000만 달러의 지원을 요청했다. 10월 초엔 김영선 재무장관이 미국을 방문, 직접 설명에 나섰다. 김영선 장관을 수행했던 당시 예산국장 이한빈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귀로의 비행기 안에서 김영선 장관은 이 국장에게 “혹시 박정희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한빈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김영선은 “워싱턴에 있는 동안 어떤 미국 인사가 ‘그 사람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귀띔을 해 주더라”고 했다. 이한빈은 하도 어마어마한 이야기라서 그냥 듣기만 했다.
  
  5개년 계획을 만들면서 정부는 미국 아시아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미 국방부의 연구소인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찰스 울프 박사를 초청, 자문을 받았다. 울프 박사를 주로 상대한 사람은 부흥부 이기홍 기획국장과 이한빈이었다. ‘울프는 5개년 계획 작성 작업은 국방을 포함한 장기적인 국가 경영 전략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어서 작업은 내실 있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이한빈 회고록 《일하며 생각하며》).
  
  이기홍 국장은 1960년 10월 수색의 국방대학원에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국토 건설 사업’, ‘미국 원조의 효율적 운용 방안’ 등을 주제로 하여 세 차례 강의를 했다. 그는 장교들의 의욕과 진지한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강의가 끝나면 교수 요원들이 심도 있는 질문과 토론을 이어갔다. 이기홍 국장은 “이 젊은 장교들이 왜 이처럼 열성적인가 하고 의아했다”고 한다.
  
  “민간 동료 공무원들은 5개년 계획이나 국토 건설 사업에 무관심이거나 냉소적이었는데 오히려 군인들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교수부 장교들은 강의 준비상 필요하다고 사무실과 집으로까지 찾아와서 질문하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강의 주제엔 들어 있지 않았던 경제개발부 창설안에 대해서도 물어보곤 했습니다. 이들 장교 대부분이 5·16 이후 최고회의와 기획위원회에서 활약했습니다.”
  
  이기홍 국장이 기획하여 실시한 것이 국토 건설 사업이었다. 실업자 구제, 미국 원조 양곡, 그리고 낙후된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연결시킨 발상이었다. 식목, 治水(치수) 사업, 도로 건설에 인력을 동원하여 그 대가로 밀가루 등 양곡을 지급하는 사업의 규모는 1000만 달러 가량의 미국 원조 물자를 포함한 총 4000만 달러 정도였다. 이 사업의 핵심 요원으로 쓰려고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국토 건설 대원들을 모집해 2066명을 뽑았다. 이 발상은 김영선 재무장관이 낸 것이다. ‘4·19의 젊은 정열을 새 시대에 흡수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 2011-01-31, 13: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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