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이집트와 1987년의 한국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全斗煥의 역할을 부통령 슐레이만이 盧泰愚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집트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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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어제 테헤란에서 설교를 한 뒤 이집트의 시위사태가 1979년 이란 혁명의 연장선상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무하는 '반역적 독재자'라고 비난, 타도를 선동하였다.
  
  이집트 시위를 관통하는 국민들의 욕구는 민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호메이니 神政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말살한 1979년 이란 혁명보다는 2009년 이란의 反정부 시위를 더 닮았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선 수백 만의 이란 국민들은 혁명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침묵하고 말았다. 이집트 시위가 테헤란에서 일어났다면 하메네이는 발포를 명령하였을 것이다. 이집트 군대는 어제 평화적 시위를 보호하였다. 이란의 군대와 이집트의 군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란과 이집트의 차이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차이이다. 독재는 시민의 私생활에 대하여는 간섭을 하지 않지만 전체주의는 시민들의 양심과 사상과 일상생활까지 통제한다. 이집트의 시위는 1987년 6월 한국에서 벌어졌던 대시위와 닮은 면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강력한 군대의 존재, 다양하고 개방적인 사회라는 점에선 닮았지만, 이집트엔 한국에서 있었던 두꺼운 중산층과 강력한 야당이 없다. 6월사태는 6.29 선언을 계기로 改憲과 선거를 통한 평화적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집트 사태를 보면서 새삼 1987년의 한국인이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였음을 확인한다.
  
  
  집권세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 6.29 선언은 말의 힘으로 역사를 바꾼 좋은 사례이다. 6.29 선언이 민주투쟁 시대를 민주실천 시대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高潮(고조)된 국민여론을 업었기 때문이다.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자세를 낮추어 밀려오는 여론의 힘을 받아내면서 그 고삐를 잡아챙겨 자신의 승리로 만든 셈이다. 6.29 선언 3일 전에 있었던 대시위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全斗煥 정권의 공권력 또한 강력했다. 무교동 거리로 나서던 金泳三씨가 간단하게 경찰에 들려 닭장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 6월18일의 대시위에선 부산시청이 밤중에 몰려든 군중에 의해서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군부대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고 오후엔 "오늘 저녁에 비상계엄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언론계에 돌았다. 그러다가 릴리 미국대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親書를 전달하러 들어간다고 하더니 밤에 "비상조치는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권위주의 정권의 물리력이 거의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였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발표된 것이 월요일의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이 우선 야당과 국민들이 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全面的 민주화였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金大中씨 사면복권 등 거침 없는 약속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가장 미움 받던 사람이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변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29 선언과 兩金 분열 덕분이었다.
  
   이 6.29 선언은 盧泰愚 대표의 외로운 결단으로 알려졌으나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제안을 盧 대표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음이 月刊朝鮮의 취재로 밝혀졌다. 물론 盧 대표도 직선제 개헌 수용밖에는 사태해결의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全 대통령이 자신의 功이 될 수 있는 직선제 수용발표를 후계자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1, 2인자의 이런 콤비 플레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全斗煥, 盧泰愚 두 사람의 협력과 金泳三, 金大中의 분열이 대조되면서 盧泰愚 정부를 만들어냈다. 全斗煥 기획-연출, 盧泰愚 주연의 6.29 선언 합작은 5.16을 성공시킨 朴正熙-金鍾泌 콤비의 협력관계를 연상시킨다. 5.16 성공 뒤 朴正熙-金鍾泌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全-盧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盧 대통령이 인간적인 의리와 정치력과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全斗煥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는 쟁점이다. 1988년 3월 선거에서 與小野大가 된 날 나는 농담 삼아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야 하겠군"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全씨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고 山寺로 들어갔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 5년간이 나의 기자생활 37년간 가장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물태우'란 말이 나오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돌아갈 때 국내 신문을 읽으면 하늘에서 뛰어내리고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정치적 기사로 해서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된 적이 없는 첫 시기였다. 盧 대통령과 측근들은 비판적인 기자들을 누르는 대신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 5년간 盧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썼던 필자가 證人이다.
  
   6.29 선언의 탄생과정에 全斗煥 대통령의 역할이 컸지만 결국 그 선언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盧泰愚 대통령이었다. 김대중-김정일의 반역적 합작품인 6.15 선언은 그나마 실천도 되지 않았다. 6.29처럼 철저하게 실천된 정치선언도 달리 없을 것이다.
  
   민주화 세력은 盧泰愚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그를 찍지 않았으나 "국민의 선택으로 뽑힌 정부이므로 민주 정부,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일부 민주화 세력은 盧 정부를 군사정권의 연장이라고 해석하고 타도를 외쳐댔다. 그 속엔 친북좌익세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던지고도 무사했던 盧武鉉 전 대통령까지도 제6공화국을 민주정부로 이해하지 않는 듯한 논법을 자주 썼다.
  
   24년 전 새 시대를 연 6.29 선언, 그 주인공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금 世人의 관심권 밖에 있지만 역사에서 두 사람이 차지할 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전두환의 역할을 부통령 슐레이만이 노태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집트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 2011-02-05, 11: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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