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비밀, ‘朴正熙에 의한 혁명 모의’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9)/ “술에 젖은 기자들의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소’로 시작되는 농담 속에 은근히 군부 거사를 부추기는 言中有骨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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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한 ‘혁명 모의’
  
  1군 사령부 작전처장 李秉衡(이병형) 준장은 1961년 4월 초 미국으로 미사일 관련 교육을 받으러 가기 위해 이한림 사령관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이한림 사령관은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글쎄, 박정희가 군사 혁명을 한대.”
  
  ‘이런 중대한 시기에 작전참모가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이병형 준장의 직속 부하로 있던 작전처의 육사 8기 출신 네 과장 曺昌大(조창대), 嚴秉吉(엄병길), 李鐘根(이종근), 沈怡燮(심이섭) 중령은 몽땅 김종필 측에 포섭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이병형 준장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박정희에 의한 혁명 모의’는 장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는 그런 ‘반란 모의’에 대해 들은 많은 장교들이 신고도 하지 않고 속으로는 ‘성공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2군단장은 민기식 중장. 그는 민주당 구파 徐珉濠(서민호) 의원이 6·25 전쟁 중 현역 장교를 사살한 사건의 군사재판장을 맡았던 이였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는 ‘사형 선고를 내려라’는 압력이 왔지만 정의감이 강한 민 장군은 무기징역을 선고하곤 피신해 버렸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민기식 군단장에게 인사차 찾아온 서민호 부의장을 환영하는 술자리가 있었다. 2군단 소속 사단장들과 대령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12사단 부사단장 鄭昇和(정승화·육군참모총장 역임) 대령의 기억에 따르면 한 대령이 서민호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더라고 한다.
  
  “지금 후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태를 보니 머지않아 우리나라는 공산화가 될 것 같군요. 그렇게 되면 우리 군인들이 제일 먼저 맞아죽을 테니 살기 위해서라도 쿠데타를 해야겠습니다.”
  
  서민호는 이런 요지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쿠데타는 원래 최후 수단으로 하는 겁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이 그것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자유당과 민주당 신파가 다스리면서 망쳐 놓았는데 나 같은 구파는 아직 健在(건재)하고 있어요. 우리 구파가 정권을 잡고 일하는 것을 보아야지요. 구파까지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요.”
  
  12·12 사건 때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은 “5·16은 국민과 군인들의 지지를 업고 당당하게 혁명이라고 선언한 쿠데타였고 12·12는 합법을 위장한 반란이었다”고 비교했다. 박정희 장군은 모의 단계부터 거사를 혁명이라 성격 규정했다. 5·16이 성공한 다음 이한림 장군 등 혁명에 반대했던 장군들, 즉 불법인 혁명을 합법적으로 진압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反(반)혁명’이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혁명의 본질이 기존 헌법 질서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기에 이런 ‘세상 뒤엎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민심과 軍心(군심)을 업지 못한 12·12 사건의 주역들은 ‘우리는 혁명을 했다’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고 ‘우리의 행동은 불법이 아니었다’는 변명조의 守勢的(수세적) 입장을 취하다가 법률의 해석권을 가진 정치 권력이 바뀌자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1961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장교들이 부대 내 식당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면서 대놓고 “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한대”하는 말들을 할 정도였다. 모의자 가운데서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우리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혁명을 준비하고 있으니 참여하라’는 식으로 광고를 하고 다니는 이들도 생겼다. 어쨌든 민심과 맞물려 있는 군심은 反정부 쪽으로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박정희의 모의는 여러 번 누설되었으나 적극적으로 신고하려는 사람이 적어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무렵 김종필과 함께 혁명 모의에 핵심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이석제 중령(당시 육본 군수참모부 근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심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 무교동의 술집에 자주 들렀다. 기자들과 중견 회사원들이 단골인 술집이었다. 내가 군복을 입고 나타나면 술에 젖은 기자들은 농담을 하곤 했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소’로 시작되는 농담 속에 은근히 군부 거사를 부추기는 言中有骨(언중유골)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공공연한 포섭 공작이 진행되는데 육군 방첩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박정희 2군 부사령관과 至近(지근) 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2군 사령부 방첩부대장 李熙永(이희영) 대령이었다. 박정희가 2군 부사령관이 되어 대구로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방첩대장 朴昌錄(박창록) 준장으로부터 그에게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여 1주일에 한 번씩 동태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 대령은 ‘또 사상 문제로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희영은 또 박정희와 인연이 오래였다. 1954년 박정희가 2군단 포병사령관일 때 이희영은 군단 파견 특무대장이었다. 훗날 장도영 일파 反혁명 사건의 주모자로 몰렸던 李晦榮(이회영) 대령은 군단 병기참모였다. 두 이 씨는 육사 5기생으로서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일 때 생도였으니 일종의 사제 간이었다. 박정희는 이 두 후배들을 데리고 개고기를 안주로 막걸리 잔을 자주 기울였다. 이희영은 계급을 떠나서 스스럼없이 지냈던 그 박정희를 부사령관으로 다시 모시고 있었다. 1961년 1월 어느 날 박정희가 이희영을 관사로 부르더니 편지봉투를 내놓으면서 꺼내 보라고 했다.
  
  육영수가 써 보낸 편지와 함께 군고구마 장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 자들이 나를 빨갱이라고 감시를 붙여 놓고 있는 모양인데 이 대령이 방첩대에 이야기를 해서 이런 일 안 하도록 해주시오”라고 간청하듯 말했다. 이희영은 서울로 올라와서 방첩대장 박창록 준장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정 위험한 인물로 보이거든 옷을 벗기시죠. 그러지 않고 장성을 내놓고 감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박창록 준장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라고 했다고 한다. 육본 수뇌부를 지목하는 말이었다. 대구로 돌아온 이희영 대령이 박정희를 찾아가 박창록 준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하면서 보고를 올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박정희의 반응은 약간 의외였다고 한다.
  
  “흥! 저희들이 내 옷을 벗겨?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도 먼저 옷을 벗게 될걸.”
  
  방첩대장에 혁명 권유
  
  1961년 1월 하순 박정희 2군 부사령관은 2군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에게 “영천 정보학교에 함께 다녀오자”고 했다. 정보학교장은 한웅진 준장. 이 대령은 이때 모르고 있었지만 박, 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거사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영천을 오가는 차중에서 이희영을 한번 떠보려고 했다. 부사령관 승용차 안에서 박정희는 방첩대장 앞에서 할 화제가 아닌 정치 이야기로 始終(시종)했다.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오. 이 대령, 아시겠소.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버마식 쿠데타라니요. 그게 어떤 식의 쿠데탑니까.”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 정부에 정권을 넘겨 주는데 민간 정부가 군의 의향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것이에요.”
  
  이희영은 이 말을 듣고는 비로소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왔다. 이희영은 ‘방첩대장인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이면 장도영 사령관하고도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기회를 봐서 장도영 사령관이 쿠데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장 장군은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고 최경록 참모총장이 2군 사령관으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이 무렵 자신과 장도영의 관계에 대해서 증언한 적이 있다. 5·16 직후에 있었던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한 증언이 그것이다. 그 요지는 이랬다.
  
  <혁명에 관해서는 과거(편집자 注: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 박정희가 이승만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모의할 때) 장 장군으로부터 실망을 느껴 보았으나 가까운 사이이고 하여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어 동조할 것을 권고했다. 어떤 때는 동조하는 듯하다가 또 반대도 하였으며 그 태도가 분명치 않아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장 장군은 우리가 암만 설득해 보았자 선두에 나서서 일할 만한 결단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성공하여 같이 일하자고 하면 반대할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장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었을 때 나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사람을 배치할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에 올 때마다 장 장군을 찾아가서 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동조할 것 같기도 하다가는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말머리를 돌려 회피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군사 혁명을 준비하면서 ‘버마식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는 김종필이 초안을 잡아온 5개항의 혁명 공약에 6항을 직접 써 덧붙였다. 그것이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문장이었다.
  
  박정희는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뒤에도 군대는 정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정치를 감독하는 大兄(대형)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 이외에도 터키의 군부가 국가 이념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파당적인 정치가들을 감시,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 파샤에 심취했던 박정희는 이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그런 생각은 조선 시대와 광복 이후 한국을 지배해 온 양반─문민 정치세력보다 군대가 더 실용적·애국적·자주적이며 선진된 집단이란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박정희 근대화 이념의 핵심인 그의 역사관을 이해하지 못한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하여 경제발전에 주력했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군사 혁명에 대한 그런 죄책감(또는 열등감)을 아예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조선조 양반 세력, 광복 후의 한민당, 자유당, 민주당 세력을 同類(동류)의 봉건적 정치세력으로 보았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 이런 문장이 있다.
  
  <4·19 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후엔 군인이 일단 정권을 넘겨주면 내부 단결이 깨져 정치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고 판단하고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버마식, 터키식의 군부개입을 포기한다.
  
  쿠데타 계획을 전반적으로 지휘하는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종필을 중심한 8기 중령급 장교들로써만은 정권을 뒤엎는 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8기생들은 거의가 사단, 군단, 군사령부의 참모로 있었고 實兵(실병) 지휘관이 아니었다. 채명신 5사단장, 朴春植(박춘식) 12사단장, 朴致玉(박치옥) 공수단장, 文在駿(문재준) 6군단 포병단장 같은 수도권의 실병 지휘관들은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으로서 가르친 육사 5기 출신들이었다. 이들 5기 그룹을 포섭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의 대리인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었다. 1961년 2월 하순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김 대령을 모 요정으로 불러 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중요한 합의를 했다고 한다.
  
  ‘4·19 기념일에 학생 시위가 발생하면 정부는 수도권 부대를 진압 부대로 동원할 것이다. 그때 서울로 들어오는 이 부대를 혁명군으로 이용하여 서울 시내의 정부 기관을 접수해 버린다’는 시나리오였다. 진압군으로 위장한 혁명군이 합법적으로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선 4·19 그날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정부가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편 다음 진압군을 동원해야 한다.
  
  이 진압 작전 계획을 입안할 사람은 수도권을 관할하는 6관구 작전참모 朴圓彬(박원빈) 중령이었다. 육사 8기인 그는 이미 여러 가지 인맥을 통해서 박정희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를 작전참모로 데리고 온 김재춘 참모장, 자유당 말기부터 박정희와 혁명을 모의했던 유원식 대령, 그리고 육사 동기로서 김종필 그룹에 속해 있었던 옥창호, 김형욱 중령으로부터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하는 혁명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있었던 것이다.
  
  박원빈은 거사일엔 혁명군 출동 계획으로 둔갑할 이 폭동 진압 계획을 ‘비둘기작전’이라 이름 붙이고 세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3단계로 되어 있었다. 1단계 폭동에 대해선 서울 시내 5개 헌병대로 대처한다. 시위가 2단계로 악화되면 서울 근교의 제30, 33사단과 제1201건설공병단 병력을 동원한다. 제3단계에선 야전군(1군) 산하의 1~3개 사단을 서울로 불러들인다. 나중에 해병대와 공수단이 포섭되자 박원빈은 이들 부대도 동원 대상으로 계획에 집어넣었다.
[ 2011-02-09, 11: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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