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을 지켜본 4500세의 피라미드
가장 오랜 文明이 가장 어린 민주주의를 시작하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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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3大 피라미드는 카이로 시내와 사막 경계면에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평균 무게 2.5t인 석회암 230만 개를 쌓은 것이다. 총무게가 600만t이다.

 

 

세상이 바뀌다

 

무바라크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이집트 軍 최고회의 대변인은 국영방송을 통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제조약을 준수하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國政(국정)을 관장할 것”이며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통하여 民間(민간)정부가 나라를 통치하도록 허용할 것이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경찰과 협력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改憲(개헌)을 할 것인지, 헌법을 새로 만들 것인지, 언제 권력을 넘길 것인지 등 구체적인 사항은 밝히지 않았다. 무바라크를 몰아낸 기쁨을 나누면서 해방광장을 지킨 젊은 혁명가들은 아침이 밝아오자 청소에 나섰다. 18일간의 시위를 통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젊음과 혁명의 연대’ 대표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대가 광장을 떠나 生業(생업)에 복귀할 것을 호소하였다. 여성 대변인 게한 샤반은 “피플 파워가 정권을 바꿨다. 군대를 무조건 믿어선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그리고 이집트 국민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정부 시위대를 비난하고 무바라크 정권을 비호하던 國營(국영)신문 알 아흐람은 ‘시민들이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제목의 1면 기사를 실었다. 시위대를 ‘외국의 조종을 받는 暴徒(폭도)’라고 보도해왔던 국영방송은 ‘젊은 혁명’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하였다.

 

혁명을 지켜본 피라미드

 

이집트 혁명을 지켜본 역사적 건물은 피라미드였다. 사진에 많이 나오는 기자의 3大 피라미드는 카이로 시내에 있다. 도심이 끝나고 사막이 시작되는 곳이다. 주로 사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바람에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걸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크기, 정밀도, 예술성, 역사성 모든 면을 종합할 때 인류 최고의 건축물이란 데 異見(이견)이 없다. 약4500년 전에 만든 피라미드는 에펠탑이 생기기 전까지 4400년 동안 지구 最高(최고)의 건물이었다. 신전과 무덤의 기능을 겸한 이 피라미드는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물로는 지금도 세계최대이다.

준공당시 높이는 146.6m(지금은 137.15m), 정사각형 밑변의 평균 너비는 230.42m이다. 평균 무게가 2.5t인 230만 개의 돌(주로 석회암)로 쌓았는데, 총무게는 약600만t(정확히는 595만5555t)이다. 런던 도심지 건물을 다 모은 것보다 더 무겁다고 한다. 세계 3대 성당, 즉 로마의 성베드로, 런던의 세인트 폴, 밀라노의 대성당을 한꺼번에 이 피라미드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다. 30cm의 입방체로 쪼갠다면 지구 둘레의 3분의 2를 두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계산을 처음 해본 이는 1798년 이집트를 정복한 나폴레옹이다. 포병장교인 그는 수치에 밝았다. 기자 지구 3대 피라미드를 해체한 石材(석재)로 높이 3m, 두께 30cm의 石壁(석벽)을 만들면 프랑스의 국경을 둘러쌀 수 있다고 계산했는데, 거의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라미드의 진정한 驚異(경이)는 정밀성이다. 지진이 많이 나는 지역인데도 피라미드 바닥은 오차 2cm 범위 안에서 수평이다. 네 斜面(사면)의 각도는 모두 51도50분40초를 유지한다. 北面(북면)의 밑변은 230.26, 南面(남면)은 230.45, 東面(동면)은 230.39, 西面(서면)230.30m이다. 오차는 4.4cm 이내이다. 네 꼭지점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오차는 0.3도 정도이다.

 

殉葬이 없어던 古代

 

피라미드는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고, 가장 정밀하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기에 살아 남았다. 7대 불가사의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쿠푸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착공, 23년간 매일 약4000명이 동원되어 지은 것이다. 이 4000명은 누구인가? 흔히 노예들을 채찍으로 위협하여 건설했다는 추측을 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의 연구는 이 俗說(속설)을 부정한다. 이 4000명은 즐겁게, 賃金(임금)을 받아가면서 일을 했다. 이들은 기술집단이었다. 匠人(장인)정신이 투철하였다. 그 증거의 하나로 피라미드의 內外部(내외부)가 너무나 성실하게 마감된 사실을 든다. 보이지 않는 부분도 정성을 들여 손질을 했다. 이런 정직성은 강제로 만들어낼 수 없다. 종교적 열정만으로도 안 된다. 경제적 뒷받침이 안 되는 종교적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고대 이집트의 또 다른 神秘(신비)가 있다. 왕이나 주인이 죽으면 노예들을 죽여서 함께 묻는 殉葬(순장)의 풍습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초일류 국가를 만든 이들의 조상인 바이킹족은 서기 10세기까지도 殉葬(순장)을 하였다. 동서양의 고대에 거의 공통적이 순장의 풍습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집트인들의 종교와 사회와 문화가 가진 독특한 유전자를 암시한다. 인간존중, 너그러움, 다양성, 예술성 같은 것들이 아닐까?

 

가장 오랜 문명이 가장 어린 민주주의를 시작하다

 

기원 전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古代(고대) 이집트는 끝나고 외세의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2년 나세르 주도의 군부 쿠데타는 이집트인이 다시 主導(주도)세력으로 복귀한 사건이다. 이번 혁명기간에 왜 시위대가 “우리는 이집트인이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외쳤는지를 알 수 있다. 나세르 등 청년장교들이 시작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젊은이들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나세르-사다트-무바라크 노선의 부정이라기보다는 비판적 계승이 이뤄질 것이다.

코 앞에서 벌어진 18일간의 이집트 혁명을 지켜본 붉은 색 건물 이집트 박물관에는 세계 最高의 보물이 진열되어 있다. 서기 전 1327년에 죽은 투트앙크아몬 왕의 무덤에서 나온 방대한 유물들이다. 무덤은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 있었는데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있다가 1922년 하워드 카터라는 고고학자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길이 187cm의 內棺(내관)은 무게가 110kg이다. 이 유물들의 경이는 황금의 量(양)이 아니다. 진열된 수많은 장신구와 家具(가구)를 보는 순간 충격을 받는 것은 디자인이 너무나 현대적이란 점에서다. 백화점에 내어놓아도 전혀 어색하지도 촌스럽지도 않을 것 같다. “아, 요사이 디자인의 原型(원형)이 이집트에 있구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이집트를 마지막에 보라는 말도 이해가 간다. 이집트인들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해한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악해질 수가 없다는 믿음으로 나는 혁명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이번 혁명을 보도한 기자들도 시위대와 한 편이 된 것처럼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文明이 가장 어린 민주주의를 시작하였다. 민주화 과정은 소란스러울 것이다. 정치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인간을 감싸주는 게 있다면 文明(문명)이란 것이 아닐까?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하메드 알리가 지은 모스크. 알리는 알바니아人이었다.
 
 이슬람 모스크와 현대식 건물의 공존은 오늘날 이집트 사회의 斷面이다.
 
 
 카이로 시내에서 보이는 피라미드
 
 
 카이로 시내에서 보이는 피라미드
 

[ 2011-02-13, 13: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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