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기념일 시위 不發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4)/ 朴正熙,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여 적극적인 계획으로 돌려라”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4·19 기념일 시위 不發
  
  박정희 소장이 거사일로 결정한 1961년 4월19일이 다가오자 주체 세력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4월12일: 종로 4가 술집에서 박정희, 박치옥 공수단장, 문재준 6군단 포병단장,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김종필 등이 만나 6군단 포병단을 출동부대로 삼기로 결정했다.
  
  ▲4월13일: 공수단 차지철 대위는 전날 명동 미도파 백화점 앞길에서 우연히 만나 시국 이야기를 나누었던 박종규 소령과 재회했다. 에어 코리아社(사) 앞에 있는 日本(일본)식당에서 두 사람은 사회의 혼란상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박종규와 차지철은 미국에서 공수 훈련을 함께 받은 사이였다. 박 소령은 차지철을 포섭하기로 결심하고 이날 저녁 7시에 명동 사보이호텔 지하 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기서 박종규는 사복을 입고 나온 김종필을 차지철에게 소개해 주었다. 박종규는 다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키 작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분이 박정희 장군이다”고 했다.
  
  잠시 후 박종규와 차지철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육사 9기 강상욱 중령 집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20여 명의 혁명 주체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車(차)대위에게는 놀랍게도 직속상관인 공수단 대대장 김제민 중령이 와 있었다. 차지철은 별실로 불려 들어갔다. 박정희 소장 옆에는 김종필, 오치성 중령이 배석했다. 박정희는 차지철에 대한 일종의 면접 시험을 실시한 것이다. 박정희는 “장면 정권은 지금 4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매수 작전까지 펴고 있다. 이런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은 넘어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날 차지철 대위는 공수단의 營內(영내) 다방에서 동료 장교들을 불러 모아 혁명 동지로 포섭했다고 한다.
  
  ▲4월15일: 2군 사령부가 있는 대구에서는 이주일 참모장 중심으로 혁명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밤 참모장 관사에 공병참모 朴基錫(박기석) 대령, 통신참모 朴升圭(박승규) 대령이 불려왔다. 세 사람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일 시위로 인해 전국에 계엄령이 펴질 때 2군이 취할 조치를 확정했다. 대구에 있는 3개 공병대대와 3개 통신중대를 동원하여 경북도청, 경찰국, KBS 대구 방송국, 도지사 관사, 대구역을 점령하기로 했다. 동시에 대구 전신전화국의 전화선을 절단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키기로 했다.
  
  ▲4월16일: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에 반대하는 이한림 1군 사령관 예하의 참모 부서에선 작전처의 육사 8기 장교들을 중심으로 혁명 주체 조직이 형성되었다. 11명의 장교들은 이날 朴龍琪(박용기) 중령 집에 모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면 군사첩보대와 235수송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한림 장군의 숙소와 사무실을 포위하고 특공대를 편성, 그를 체포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4월17일: 월요일인 이날 박정희는 군용기편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오후 명동 입구 아스토리아호텔 객실에서 박정희는 행정반과 작전반의 대표들인 김종필, 오치성,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을 만나 이틀 뒤로 다가온 거사 준비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복잡한 계획보다는 간단하면서도 실천이 가능한 방법을 선택하라”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명동 강상욱 중령 집으로 옮겨 출동 부대 대표들을 접견했다. 박정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내 악수를 하면서 “잘 해 봅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박정희는 대구로 내려갔다.
  
  ▲4월18일: 박정희는 대구에서 광주 육군항공학교 교장인 李元燁(이원엽) 대령을 불렀다. 이 대령은 강풍이 불어 다음날 가기로 했다.
  
  ▲4월19일: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실에서, 서울의 주체 세력 장교들은 종로 부근 은성이란 음식점을 통째로 빌려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이 대규모 유혈 폭동으로 발전하여 장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 출동하게 되어 있는 폭동 진압 부대를 그대로 쿠데타 부대로 전환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시나리오는 이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 김종필, 박종규가 공작한 비밀 학생 조직원들이 시위를 선동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엔 ‘경찰은 民統系(민통계) 학생들이 4·19 기념 행진 때 反정부 시위를 선동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 특별 경비 태세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박종규 소령은 이날 국제호텔 내의 ‘정글’이란 바, 서울 시청 앞 한일다방을 연락처로 정했다. 포섭한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킨 뒤 박 소령에게 연락을 주면 박 소령은 김종필에게 보고하는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날 기념식은 화창한 봄 날씨에 약 3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4·19 기념행사 학생준비위원회가 주최하고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가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학생 대표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민족 분열의 책임은 김일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가슴속에서 그 책임을 느껴야 한다. 동족상잔을 극복할 한국적 이념을 만들어내야 한다. 경제적 자유가 없는 곳에 정치적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에 의존하는 조건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현 정부는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고 있다>
  
  기념식을 마친 학생들은 광화문을 향해서 시가행진을 했다. ‘이 이상 못살겠다, 장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시위 행렬은 질서 있게 행진했다. 이 군중 속에는 약 2000명의 사복 경찰관들이 박혀 있었다. 비공개 자료 <5·16 혁명실기>는 이렇게 묘사했다.
  
  <광화문에 도착한 행진 대열 속에서는 데모를 더 하려는 세력과 만류하는 세력 사이에서 트러블이 발생했다. 사복 경찰관들의 물 샐 틈 없는 포위 속에서 학생들의 행동은 제약되었고 봉쇄되고 말았다. 당시 정부는 4월 위기설을 극복하기 위하여 2억 환의 돈을 뿌렸다. 매수된 학생 간부들의 데모 방해는 광화문에 이르러서 눈에 띄게 나타났다. 사전에 인쇄하여 놓았던 2만 장의 삐라는 한 장도 뿌리지 못하고 말았다. 오후 5시가 지날 무렵 경찰이 비밀 조직의 학생 간부들을 체포하려 한다는 보고가 박종규에게 들어왔다.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학생 훈련 공작을 맡았던 박 소령은 크게 실망하고 학생들의 무기력을 한탄했다. 하루 종일 거사 본부로 삼은 은성을 들락날락하던 장교들은 허전한 마음을 어디 비할 곳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들은 ‘이제는 학생들을 믿을 수 없으니 우리 힘으로 初志(초지)를 관철시키자’고 다짐했다>
  
  美 CIA는 알고 있었다
  
  비공개자료 <5·16 혁명실기>는 4월19일의 데모 유치 계획이 실패한 데 대하여 아주 감상적인 묘사도 하고 있다.
  
  <광화문 거리에는 낮의 긴장을 풀어 주는 듯 봄비가 죽죽 내리고 있었다. 그때 이 비를 맞으면서 김종필 중령은 혼자서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박종규 소령도 울분을 발산할 수 없어 광화문을 거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줄 것은 술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술집으로 들어갔다. 狂想的(광상적)인 관현악이 귓전을 어지럽게 하는 바였다. 술은 비통에 젖은 눈물을 삼켜주었다.
  
  “내일엔 또 새로운 길이 시작될 테지.”
  
  술에 흠뻑 젖은 채 김종필은 박 소령과 헤어지고 화신 쪽으로 걸어갔다. 희다방에 들어갔다. 장태화가 거기에 있었다.
  
  “장 형,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오.”
  
  “울지 맙시다. 모든 것을 끝마치고 난 다음에 실컷 울어 봅시다.”
  
  김종필은 동지들의 연락처 은성으로 가려고 했다. 동지들은 술로써 눈물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지금 술 기분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소. 오늘은 이대로 서로 헤어져야 합니다.”
  
  장태화가 만류했다. 두 사람은 한없이 보도를 거닐었다. 빗방울도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한편 박정희는 이날 대구 2군 사령부에 L─19 경비행기를 대기시켜 놓고서 서울로부터 “일이 터졌으니 상경하십시오”란 연락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때는 이원엽 육군항공학교장과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광주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대구에 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혁명 계획을 설명하고 거사한 사실이 방송에 보도되면 항공기로 전단을 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오늘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다. 장면 정권이 학생들을 상대로 매수, 무마 공작을 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박정희는 부사령관실에서 혼자 기다렸다. 오후 3시 이주일 참모장이 박승규 통신참모, 박기석 공병참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박정희가 말했다.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는 모양이군. 다음 기회를 만들어 봅시다.”
  
  4월20일 서울에서 김종필, 이석제, 길재호가 대구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여 적극적인 계획으로 돌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정희 소장은 또 병력 동원 계획도 재정비하고 출동 부대 지휘관들로 하여금 지형 정찰을 해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거사일은 5월12일로 잠정 결정했다.
  
  김종필은 다음날 형 김종락의 약수동 집에서 행정반, 작전반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4월23일엔 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이자 쿠데타 작전반장인 박원빈 중령 집에 작전반원들이 모였다. 여기서 거사 출동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키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6관구 사령부가 먼저 예하 부대와 배속 부대에 대해서 비상 훈련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통보해 두기로 했다. 그렇게 해놓고 12일에 비상을 걸면 야간 비상 훈련을 가장한 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1단계 비상 훈련은 5월4일부터 10일까지 부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다. 2단계 훈련 계획은 5월11일부터 30일 사이에 날을 잡아 실시하는데 6관구 사령부에서 불시에 비상을 걸면 각 부대는 ‘출동 차량에 기름을 넣고 출동 병력을 차량에 승차시킨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비상 훈련 계획으로 위장된 쿠데타군 출동 계획은 박원빈 중령이 작성,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30사단, 33사단, 공수단에 내려 보냈다.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모의는 이 무렵 미군 정보기관과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당시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 보좌관은 짐 하우스먼 대령이었다. 국군의 창설 때부터 간여해 온 하우스먼은 한국군 수뇌부와 장면 총리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그에게 “군사관계의 자문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우스먼은 매그루더에게 이 요청을 전달했는데 매그루더는 그 부탁을 거절하라고 지시했다. 하우스먼은 박정희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8군 사령관 옆방을 쓰고 있었다. 길만 건너면 육군본부. 박정희 소장이 육본 작전참모부장일 때는 가끔 부장실에 들러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하우스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61년 3월1일 한국군 내에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매그루더 대장에게 보고했다고 썼다. 매그루더 대장은 적어도 한 차례 이상 장도영 총장에게 이 정보를 전해 주면서 “주의하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장 총장은 “한국군에 관한 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약간 반발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기자가 문서로써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쿠데타 관련 미국 측 정보 보고는 4월21일자이다. 이날 미국 CIA 계획국 극동과가, 서울 지부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정보 보고의 요약문은 이러했다.
  
  <4월21일: (비밀이 해제되지 않아 한 문장 삭제) 진행되고 있는 두 갈래의 쿠데타 모의 중 하나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범석 전 국방장관과 민족청년단[약칭 族靑(족청)] 단원들에 의해서 모의되고 있다. 사단장들을 비롯한 한국 육군 전체에 걸쳐서 쿠데타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육군 수뇌부 인사들은 현 정치인들을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경멸하고 있으며 그들이 군대를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상처받도록 환경과 조건을 조성하거나 허용했다고 믿고 있다.
  
  4월21일: (비밀이 해제되지 않아 한 문장 삭제)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에 대한 요약. 명백한 위협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치의 안정, 폭력과 무질서의 진정, 경찰력의 증강은 쿠데타 기도를 저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4월23일 CIA 극동과는 두 가지 보고서를 작성하여 알렌 덜레스 부장에게 보고했다.
  
  <4월23일: (비밀이 해제되지 않아 한 문장 삭제) 진지하게, 또 활발하게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는 무시 못 할 집단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었다. 이 집단은 울분에 차 있고 과격하며 목표 의식이 확고하고 전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4월23일: 이 쿠데타 모의는 육군, 학생 집단, 그리고 개혁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박정희가 지도자인 것으로 추측되며 서종철 6관구 사령관도 가까운 지원자인 것 같다>
  
  이상의 CIA 정보 보고는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이범석과 족청계 장교들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는 첩보는 장태화를 비롯한 박정희 소장 측에서 퍼뜨린 역정보에 넘어간 때문으로 추측된다.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은 쿠데타 모의를 모르고 있었다. 6관구 참모장(김재춘)과 작전참모(박원빈)가 모의 과정에 깊숙이 참여한 것을 서종철 사령관의 지지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 2011-02-16, 10: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