擧事(거사) 자금 문제로 밤잠 설치는 朴正熙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6)/ 1961년 4월 말, 불어난 모의 장교들의 모임이나 회식에 드는 비용도 적지 않게 필요했고, 특히 장면 총리의 체포를 책임진 박종규 소령의 공작에 돈이 적지 않게 들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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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비호?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소장 중심으로 쿠데타 모의가 진행 중이다’는 귀띔을 한 것은 총리, 미 8군 사령관, 그리고 현석호 국방장관이었다. 현 장관은 5·16 거사 열흘 전 국방부 조사대장 金在鉉(김재현) 장군으로부터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데 장도영 총장도 알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한다. 장관은 총장을 불러서 물었다. 물론 ‘장 총장이 비호한다는 말이 있다’는 부분은 묻어 두었다. 그런데 장도영 총장이 먼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박 장군에 대한 모략입니다. 심지어는 저도 가담했다고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까지 드러내 놓고 부인하니 더 추궁할 수도 없었다.
  
  “알았소. 5만의 미군이 있는데 누가 어리석게 자살 행위를 하겠소. 하지만 경계심을 가지고 한번 잘 조사해 보시오.”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일파의 反혁명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서 증언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증인(박정희)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계획 중이고 본인(장도영)도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말이 미 8군의 귀에 들어간 모양인데, 이 말이 장 총리 귀에도 들어간 것 같아서 본인(장도영)이 그것은 모략이라고 말하였다’ 운운>
  
  장도영 총장이, 장면 총리로부터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설이 있는데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박정희에게 그 사실까지 털어놓았다는 뜻이다. 김종필은 5·16이 성공한 뒤 장도영 중장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기자들에게 혁명 비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요지가 ‘혁명 경과보고’라는 문건으로 남아 있는데 이런 대목이 적혀 있다.
  
  <거사 계획 간에 별반 누구에게서나 의심은 받지 않았으나 정보가 여러 번 누설되었다. 참모총장에게 보고되는 우리들의 계획은 그때마다 묵살되어 위기일발로 모면되곤 하였고 8군 사령부에도 보고되었으나 참모총장께서 부인해 버렸다. 만일 장도영 장군이 아니었던들 우리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나라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쿠데타 모의를 탐지하는 임무를 갖고 있던 육군 방첩부대는, 부대장 이철희 준장과 서울 지구 506부대장 이희영 대령부터가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모의를 총장이 비호하고 있다는 정보에 영향을 받아 과감하게 수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기무사처럼 방첩대가 국방장관 휘하였으면 장관과 총리에게 直報(직보)가 가능했을 것이지만, 육군 총장 아래에 있는 방첩대로선 직속상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공개 자료집인 <5·16 혁명실기>에 따르면 이철희 준장은 1961년 4월, 모의 장교 중 한 사람인 육본 李鍾泰(이종태) 대령의 발설을 토대로 장도영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장도영은 “나와 박정희 소장에 대한 무서운 모략이다”고 극구 부인했다. 이 준장은 이로써 ‘장 총장이 쿠데타 계획을 알고 있구나’ 하는 心證(심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더 확대하지 말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4월 하순, 육군본부 통근 버스 안에서 이종태 대령이 옆자리의 張世顯(장세현) 중령(인사참모부 기획과)에게 과격한 말을 했다. 장 중령이 들어 보니 장면 정부에 대한 막연한 불평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출근하자 506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에게 전화로 통근 버스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이희영 대령은 이종태를 불렀다. 그는 머리를 썼다.
  
  “이 대령, 쿠데타는 장도영 총장과 박정희 소장이 손을 잡고 준비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안심하고 털어놔 봐요.”
  
  이렇게 하니 이종태 대령은 별다른 경계심 없이 자랑하듯 모의 장교들의 이름과 역할을 설명했고, 이희영 대령은 이를 토대로 조직도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철희와 이희영은 박정희系(계)의 조직도와 함께 족청계의 거사설에 대한 정보까지 정리하여 장도영 총장을 찾아가서 보고를 하니 총장이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미 내용은 잘 알고 있어. 설명할 것도 없어.”
  
  도표를 접어 들고 사무실을 나오려 할 때 장도영이 이희영 대령을 부르더니 “쿠데타 문제에 대해선 이 대령만 알고 있어. 누구한테도 발설해선 안 돼”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장면 총리에게 쿠데타 모의 정보를 제공한 요인 중에는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도 끼어 있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했던 그는 4·19 뒤 귀국했었다.
  
  4월 어느 날, 그의 방으로 3대 국회의원 宋宇範(송우범)이 찾아와 李成佳(이성가) 예비역 장군에게 들었다면서 한 장의 도표를 내놓았다. 명단 중에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한때 반공 검사로 유명했던 선우종원은 “이 장군을 직접 만나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선우, 송, 이성가 세 사람이 ‘남강’이란 일식점에서 회동했다. 이성가 장군으로부터 정보를 확인한 선우종원은 반도호텔의 총리실로 가서 이를 보고했다.
  
  이튿날 장도영 총장이 선우종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장도영은 총리한테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말을 들은 과정을 설명한 뒤 “왜 나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고 총리한테 보고하느냐”고 항의했다. 선우종원은 “아니, 그런 중대사를 총리한테 보고하지 않을 수 있소” 하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으나 왜 장면 총리가 자신의 이름을 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장도영의 되풀이되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증언은 너무나 많다. 한 5·16 주체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장도영 총장은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계획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박정희를 잡아넣을 배짱도 없었다. 당시 군내의 분위기에선 장도영의 지지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다. 그는 이기붕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젊은 장교들의 눈에는 정군 대상으로 비쳐졌다. 그도 이런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젊은 장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박정희를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박정희와의 氣(기), 勢(세) 싸움에서 이미 밀린 것이다.”
  
  장도영을 잘 아는 송원영은 이런 표현을 했다.
  
  ‘장도영의 군인답지 못한 태도가 박정희의 군인 정신에 휩쓸렸다.’
  
  白雲祥과 CIA 지부장 실버
  
  CIA 서울 지부장 피어 드 실버는 퇴직한 뒤 쓴 《서브로자(Subrosa·라틴어로 비밀이란 뜻)》란 제목의 회고록에서 미국이 5·16 前(전) 한국군 안에서 등장하고 있던 새로운 세력에 대해서 무지했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장성들을 부패시켰다. 골프, 테니스, 포커, 칵테일파티를 통해서 미국은 한국 장성들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한국인들의 소망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국군에선 미국 고위층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장교들이 있었다>
  
  최근 공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박정희 소장의 모의 과정을 늦어도 1961년 4월21일부터 추적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피어 드 실버가 1970년대 초에 쓴 회고록에선 5·16 며칠 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했다.
  
  <우리는 박정희 직속 참모의 일원인 어느 한국군 장교로부터 며칠 전에 군사 혁명에 관한 사전 제보를 받았다. 그 장교는 우리 지부의 요원과 친한 사이였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는 이 보고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당분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내가 장 총리에게 통보해 주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행동 개시 일자만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 주었다.
  
  장 총리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군사 혁명에 관한 루머들이 있었다. 군사 혁명의 가능성이 짙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사택 제2단지 내에 있는 내 집에 작은 송수신 무전기를 설치하여 대사관 건물 옥상에 있는 전용 통신실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통신실에는 2명의 무전사들을 배치하여 24시간 밤낮없이 근무하도록 조치했다>
  
  실버 지부장한테 이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가.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실버는 남겼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 전에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했던 한국군 장교는 불안해했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 망명처를 구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를 오키나와로 보냈다가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가족도 데려다 주었다. 얼마 뒤 고향이 그리워진 그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면책 보장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다>
  
  실버 같은 冷戰(냉전)의 戰士(전사)가 정보원을 사실대로 밝혔을 리는 없다. 그는 5·16 거사 며칠 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으나 공개된 CIA 보고서엔 ‘4월24일 전에 쿠데타 정보가 자발적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그의 記述(기술)엔 사실과 각색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혁명 주체 세력 가운데 미국으로 망명한 장교는 없다. 5·16 거사가 성공한 뒤 미군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장도영 총장을 찾아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에 대해서 보고했던 육군 방첩부대 부대장 백운상 대령. 5·16 직후 방첩대장으로 부임했던 김재춘(중앙정보부장 역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방첩대로 갔더니 백운상 대령이 며칠간이나 보이지 않아요. 미 8군 정보부대에 문의했더니 자신들이 백 대령을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시켰다고 실토하더군요.”
  
  백운상 대령은 육사 3기 출신. 키가 크고 미남인 그는 육군 방첩대의 전신인 특무대의 대장으로 일하다가 암살되었던 김창룡과 동기였다. 백 대령은 1948년 육본 정보국에 특무대의 전신인 특무과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근무한 방첩부대의 터줏대감이었다. 5·16 무렵 방첩부대장이었던 이철희 준장은 첩보부대에만 오래 근무한 때문에 방첩 업무엔 어두운 편이었다. 이 때문에 발이 넓은 백운상 대령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백 대령은 국군 수뇌부, 미군, 정치인들과 관계가 좋았다. 백운상은 장도영 총장에게 두 번이나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가 확실하다’고 보고했으나 ‘증거를 갖고 오라’는 말을 듣고 대구로 다시 내려갔다.
  
  이 무렵 2군 사령부 인사참모 부서에 근무하고 있던 육사 8기 全在球(전재구·유정회 국회의원 역임) 중령은 방첩대 출신이었다. 그에게 어느 날 백운상 대령으로부터 “대구에 볼일이 있어 왔는데 퇴근길에 호텔에 들러다오”라는 연락이 왔다. 동인호텔로 찾아가 방첩대 시절의 상관을 모시고 나온 전재구는 저녁을 함께 했다.
  
  백운상은 “박정희 장군이 요즈음 이상하지 않나”라고 캐물었다. 전재구 중령은 8기 동기생들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딱 잡아뗐다. 백운상이 “내가 이번에 단단히 결심하고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이 곧 강제 수사에 들어갈 태세였다. 전재구 중령은 “나도 방첩대 출신이라 좀 아는데 여기는 아무 일도 없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하곤 헤어졌다.
  
  1964년 정보부 국장이던 전재구는 미국에서 살고 있던 백운상 대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미군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건너온 경위를 밝히면서 한국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 백운상 대령의 행방에 대해선 ‘홍콩에서 봤다’는 첩보 정도이다. 백운상과 함께 미국으로 갔던 가족은 귀국이 허용되어 왕래가 자유롭게 되었으나 백운상은 끝내 조국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4월 말로 접어들면 박정희는 거사 자금 문제로 골치를 썩인다. 불어난 모의 장교들의 모임이나 회식에 드는 비용도 적지 않게 필요했고, 특히 장면 총리의 체포를 책임진 박종규 소령의 공작에 돈이 적지 않게 들게 되어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지원을 받기로 한 박 소령은 장면 총리가 사무실로 쓰던 반도호텔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 소령은 호텔 안에 무역 회사 사무실로 위장한 방을 하나 얻어 총리를 감시하려고 했다. 그는 대구로 내려와 박정희 소장에게 돈 문제를 의논했다. 박정희는 돈을 만드는 재주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5·16 혁명실기>는 ‘이즈음 각각으로 다가오는 시기의 성숙과 이에 대비해서 극도의 자금 조달 곤란이 박 소장으로 하여금 밤잠을 못 이루게 하였다’고 했다. 5월3일 박정희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대구사범 동기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을 송도 덕성관에서 만났다. 군수기지사령부의 참모장 김용순 준장을 데리고 온 박정희는 황용주를 옆방으로 불러내더니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는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급히 김지태 사장에게 부탁하여 500만 환만 융통해줄 수 없겠나.”
  
  황 주필은 난감했다.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에게 자신이 그런 부탁을 할 처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김 사장이 과연 성공이 불확실한 쿠데타 계획에 돈을 댈 것인지 자신을 가질 수도 없었다. 박정희는 대답을 망설이는 황용주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김 사장에게는 서울의 모 장성이 요청한다고 말하든지 그래도 반응이 없을 때는 쿠데타 계획을 약간만 비쳐 주어도 괜찮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이야기해 보지.”
[ 2011-02-18, 12: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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