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尹潽善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0)/ 윤보선 대통령은 신파 출신인 장면 총리와는 원래 친밀하지도 않았지만 이즈음은 결코 한때의 정치적 동지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尹 대통령의 동기 가운데는 장면 총리에 대한 불신도 끼여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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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潽善의 불만
  
  육본 교육처장 張坰淳(장경순·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은 5월15일 오후 박정희로부터 “내일 거사야”란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장경순은 “그럼 저는 뭘 해야 하지요”라고 물었다.
  
  “장 장군은 장도영 총장과는 대학 동창이잖아. 그러니 혁명을 이끌어 달라고 설득해 주어야겠어. 또 하나 박치옥 공수단장도 동참하기로 했는데 공수단의 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져주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더 데리고 와도 좋습니까.”
  
  “알아서 하시오.”
  
  장경순은 아끼는 부하 권천식 소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경순은 일단 집에 들렀다가 “야간 비상 훈련에 참가하러 간다”고 아내에게 말한 뒤 밤늦게 친구인 한웅진 준장이 기다리고 있는 화신 옆 미화호텔로 향했다.
  
  혁명 전야의 밤이 깊어가고 있던 이 순간 군부 쿠데타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 청와대에서 장면 총리에 대한 불만을 가득 품은 채 살고 있었다. 실권이 약한 제2공화국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출신 尹潽善(윤보선)이었다. 신파 출신인 장면 총리와는 원래 친밀하지도 않았지만 이즈음은 결코 한때의 정치적 동지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서 윤보선은 ‘장면 총리의 배신’이란 표현을 써 가면서 그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윤보선이 나라가 총체적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1961년 3월22일 혁신계가 주동한 야간 횃불 시위 때였다. 이날 밤 윤보선은 서민으로 변장하여 지프를 타고 시위대를 뒤따라가면서 그들이 외치는 섬뜩한 구호를 듣고는 ‘색채가 수상하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윤보선은 청와대로 돌아와서 曺在千(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 장시간 대책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장면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데모 규제법과 반공 특별법을 제정하여 과격한 시위를 다스리려고 했다. 민주당 구파가 분당하여 만든 야당인 신민당도 내심으론 이 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리당략적 이해관계로 반대하여 정부는 이 법의 통과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즈음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부산에 다녀온 郭尙勳(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와서 위기감을 전달했다.
  
  “지금은 與(여)고 野(야)고 가릴 때가 아닙니다. 여야의 지도층이 한데 모여서 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급히 불러서 회의를 갖도록 합시다.”
  
  이날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소집한 원로는 장면 총리, 곽상훈, 白樂濬(백낙준) 참의원 의장, 金度演(김도연) 신민당 대표, 유진산 간사장, 현석호 국방장관, 그리고 梁一東(양일동), 趙漢栢(조한백) 의원이었다. 곽상훈이 부산에서 느낀 민심을 설명했다.
  
  “서울에 있으면 언론이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번에 부산에 가보니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상상보다 격심했소.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윤보선은 장면을 압박하는 발언을 했다.
  
  “중대한 사태를 수습할 소신과 방안이 없다면 거국 내각이라도 만들어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하지 않겠소?”
  
  장면 총리는 “좀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으나 거국 내각 이야기가 계속 제기되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윤보선 회고록).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 있겠소?”
  
  이 말에 윤보선은 발끈하여 이렇게 쏘아붙였다.
  
  “장 총리가 지금까지의 국내 失政(실정)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이날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으나 윤보선은 피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에게는 ‘이날 회동에선 신생활 운동에 대해서 논의했다’고 발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날 여당에선 윤보선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신민당 편을 들어 장면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성명이 나왔다.
  
  윤보선은 이 사건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사이의 정치적 결별’이었다고 썼다. 5월16일 아침 군사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윤보선 대통령의 동기 가운데는 장면 총리에 대한 불신도 끼여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 모의에 참가했으나 돌출적인 행동 때문에 마지막엔 소외되었던 유원식 대령은 임시정부 요인 柳林(유림)의 아들이었다. 그는 윤보선의 친구인 沈明求(심명구)를 통해서 윤 대통령과 접촉하려고 했다. 1961년 봄 심명구는 윤 대통령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군 일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책동하는 모양인데 들어 본 일이 있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나잇살이나 든 사람이 왜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가.”
  
  “지난 정초에 하례객으로 청와대를 다녀간 육군 대령이 그 거사를 모의하는 군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대통령을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싶어한다던데.”
  
  “자네 무슨 그런 부질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나. 큰 망신당하기 전에 입을 다물게.”
  
  그런 핀잔을 듣고도 심명구는 “그 육군 대령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고 대통령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더란 것이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면 어찌 내가 여기에 앉아서 만나야 되겠는가? 그런 소리 하려면 여기 오지도 말게나.”
  
  윤보선 대통령은 여러 경로로 군부 쿠데타說(설)을 접하고 있었으나 실권이 없는 그로서는 할 일이 없었다. 한번은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러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장 총리나 국방장관도 다 알고 있는 일인데 대수롭지 않은 역정보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병대와 공수단
  
  김포 주둔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5월15일 아침부터 출동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참모회의에서 김윤근은 “오늘밤 오정근 대대에 대해 차량을 이용한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하라”고 작전참모에게 지시했다. 이 기동 훈련이 실은 정권을 뒤엎기 위한 군 출동이란 것을 알 리가 없는 참모들은 “또 여단장이 오정근 대대장을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윤근 준장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참모장 朴成哲(박성철) 대령 일이었다. 박 대령은 해병대 사령관 金聖恩(김성은) 중장과 만주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닌 사이였다. 그런 박 대령에게 거사 계획을 털어놓으면 비밀이 샐 것 같아서 김윤근은 참모장을 따돌렸다. 막상 거사를 앞두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참모회의가 끝난 후 정기 외출을 나가겠다고 인사하러 온 박성철 대령에게 김윤근이 말했다.
  
  “혹시 외출을 연기할 수 없겠소?”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는데 제가 꼭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면 전화로 약속을 취소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별일도 아닌데.”
  
  김윤근은 참모장에게 귀띔해 줄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중대사를 앞두고 의심받을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박 대령을 잡아두지 않았다. 거사가 성공한 이후 박성철은 친구들로부터 “여단장으로부터 얼마나 불신을 받았기에 그처럼 따돌림을 받았느냐”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오전 11시 김윤근은 헌병대장을 불렀다.
  
  “각 부대장에게 통보해서 오늘 외출, 휴가를 가는 장병들은 늦어도 오후 1시까지 부대를 떠나고 오후 3시까지는 여단 검문소를 통과하게 하라.”
  
  여단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점심 식사를 한 뒤 김윤근은 여단본부 중대장 左炳玉(좌병옥) 대위와 여단 통신참모 文成泰(문성태) 중령을 따로따로 불렀다. 김윤근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개인적인 요청이다. 들어주면 고맙고 안 들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전제한 뒤 거사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여단장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행동을 같이 하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김윤근은 좌 대위에게 자신을 보좌할 지휘부의 조직을 맡겼다. 문 중령에겐 전방 지휘소와 후방 지휘소를 연결하는 무전 통신망의 구성을 지시했다. 아울러 비밀 유지를 위해서 오후 5시에 서울과 여단과의 전화선을, 밤 9시에 군단과의 전화선을 절단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3시가 좀 지나서 인사참모 崔龍琯(최용관) 소령과 군수참모 柳哲秀(유철수) 중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여단장을 찾아왔다.
  
  “출동 부대에 탄약 1期數(기수: 한 번 전투에 필요한 분량)를 보급하라고 했더니 병기참모가 말을 안 듣습니다. 기동 훈련에 무슨 탄약이 필요하냐고 하면서 막무가내입니다.”
  
  사실 기동 훈련에 탄약을 공급하라는 쪽이 무리였다. 그렇다고 정권을 뒤엎으러 나가는 부대가 비무장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윤근은 잠시 궁리를 한 뒤 병기참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기동 훈련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병기참모도 잘 알다시피 휴전 후에 입대한 장교와 사병은 1기수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있으니 이번에 휴대시켜 그 부피를 체험하게 해야겠어요.”
  
  “말씀대로 공급하겠습니다. 그러나 포장을 뜯으면 분실될 염려가 있으니 포장을 뜯지 말고 상자 단위로 휴대시켜 주십시오.”
  
  “나도 대대장에게 그렇게 지시하겠소.”
  
  오후 4시 해병 제2훈련소장 鄭世雄(정세웅) 대령이 출동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서 여단본부에 들어왔다. 김윤근은 정세웅과 함께 수송 중대와 오정근 대대를 둘러보았다. 수송 중대는 출동에 대비한 차량 점검과 정비로 분주했다. 강화도에 건너가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오정근 대대에 들르니 타 부대에서 도착하는 보충 병력과 탄약 분배로 북적이고 있었다.
  
  김윤근은 자신이 출동 부대와 함께 나간 뒤 이 여단을 지킬 여단장 대리를 지명하려고 2연대장 朴承道(박승도·해병소장, 사단장, 구미공단 이사장 역임) 대령과 작전참모 鄭台錫(정태석) 중령을 불렀다. 김윤근은 비로소 두 사람에게 거사 취지를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상기되더니 ‘부재 중의 여단 지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주시고 우리는 거사 부대와 행동을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김윤근은 두 사람을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두 사람이 협력해서 뒤를 맡아 주어야 내가 마음 놓고 출동하지 그렇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설득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김윤근은 잠을 자두기로 했다. 부관 洪京植(홍경식) 소위에게 밤 11시에 깨우라고 지시한 뒤 숙소에 가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5월15일, 약 600명의 병력을 가진 공수단은 도봉산과 안성에서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김제민 대대장은 훈련을 받으러 나가는 장교들에게 밤까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귀대하라고 지시했다. 이 훈련은 미군 공수부대 고문관들의 지도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김제민 중령은, 이들 미 고문관들이 타는 자동차의 바퀴 바람을 빼버리더라도 공수부대원들이 귀대하는 것을 막지 못하도록 하라고 시켰다. 이날 낮에 오치성 대령과 옥창호 중령이 박치옥 단장을 찾아왔다. 두 장교는 “출동시간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박 대령은 “차량만 제때에 보내 주게”라고 응수했다.
  
  공수단 차지철 대위는 이날 특별히 바빴다. 14일 밤 도봉산으로 출동했던 차지철은 15일 아침엔 시내로 나가 박종규와 함께 장면 총리 체포에 대비하여 반도호텔 정찰을 실시하고 오후 2시쯤 도봉산으로 돌아와 지상에서 낙하 훈련을 유도하였다. 2개 중대 병력의 공수단 훈련 부대는 이날 밤 도봉산을 출발, 밤 10시15분쯤 김포의 본부로 돌아왔다. 낙하 훈련에 지친 이들은 돌아오자마자 쿠데타를 위한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부대에 남아 있었던 김제민 대대장은 이날 밤 팀장들을 불렀다. 그들에게 거사계획을 털어놓았다. 해병대가 동참할 것이고 장도영 참모총장도 이 쿠데타를 지도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박치옥과 김제민은 그때까지도 박정희의 말을 믿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지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팀장들은 모두 거사에 찬동했다. 김제민은 박치옥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장님이 내려오셔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박치옥은 팀장들을 집합시킨 뒤 거사의 당위성에 대해 일장 훈시를 했다고 한다. 김제민 대대장은 이제 6관구 사령부에서 스리쿼터 수송대를 보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2011-02-24, 11: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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