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를 성공시킨 朴正熙의 3대 결심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35)/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을 알고도 신당동 집을 나와 진압군 측 헌병들이 기다리는 6관구로 향한 것, 혼란에 빠진 6관구에서 나와 실병력이 있는 공수단과 해병대로 간 것, 그리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의 결단.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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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있던 혁명파 장교들은 박정희 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위기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지도자를 쳐다보고 그 지도자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한다. 李錫濟(이석제) 중령도 박정희를 관찰하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 총무처 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뒤 지금은 천안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너무 긴장되니까 담배 피우던 사람들도 담배를 피우지 않더군요. 골초인 저도 그랬습니다. 출동 부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는 박정희 장군의 결단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총장과 나누는 대화를 우리는 옆에서 다 들었습니다. 그 분은 소파에 앉아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그때 이석제는 박원빈 작전참모 방에 들어갔다가 카빈총과 상자째 있는 실탄을 발견했다. 실탄 상자를 지프에 실어다 놓았다. 그는 권총을 두 자루나 품고 있는데도 카빈을 들었다. 이석제는 여차하면 한판 크게 벌이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박정희가 일어났다. 결심을 굳힌 듯 했다. 항공 점퍼를 입고 있었던 박정희는 지퍼를 내리더니 품안으로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냈다. 편지였다. 박정희는 김재춘 참모장에게 장도영 총장 앞으로 전하라면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김재춘은 6관구 작전처 宋正澤(송정택) 중위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 “지금 즉시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하고 오라”고 명령했다. 송 중위는 신의주 동중학교 출신으로서 장도영의 후배였다. 송 중위는 서울 시내로 들어가 지금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서울방첩대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서울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을 통해서 이 편지를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했다. 장 총장은 편지를 읽고는 이 대령에게 건네주었는데 지금 김재춘이 보관하고 있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런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 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一徹(일철)하여 결사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忖度(촌탁)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 완수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 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余不備再拜(여불비재배) 5월16일 소장 박정희>
  
  이 편지를 읽어 본 장도영은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 장군이 아직도 6관구에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전화를 바꿔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 소장이 전화에 나오자 장도영은 언성을 높이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회고록).
  
  “당신 편지 보았는데 그것은 범행이고 반동이오. 어서 정신 차려 빨리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체포하겠소.”
  
  박정희는 “부대들이 거사하기 위해서 출동했으니 이젠 중단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장도영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부대들은 내가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명해 놓았는데 무슨 출동이란 말이오. 체포되지 않으려면 빨리 돌아가시오.”
  
  이런 대화가 사실이라면 장도영 총장은 ‘반란군’을 출동시키려 하고 있는 ‘수괴’에게 아직도 ‘자진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5·16 혁명실기>엔 박정희가 이날 밤 두 통의 친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원래 계획은 쿠데타군이 주요 목표지를 점령한 다음 장 총장에게 尹泰日(윤태일), 宋贊鎬(송찬호) 준장을 통해서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었는데 그 전에 탄로가 나는 바람에 없애 버리고 다른 편지를 전달한 것이라고 한다. 소각해 버린 친서의 내용은 이러했다고 한다.
  
  <총장 각하.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를 明朝(명조)를 기하여 기어이 단행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다만 처음 계획으로서는 각하를 직접 모시고 이 성스러운 거사를 단행하려 했으나 만약 이 거사가 실패했을 때의 전 책임을 소관이 지고 각하에게는 폐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만으로 거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微忠(미충)을 양해하시고 또한 우리들의 충성된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이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 선두에 설 것을 굳게 믿는 까닭에 감히 거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글을 각하께서 받으실 때는 忠勇(충용)스런 각하들의 부하들은 서울에 진주를 끝마치고 중요한 목표를 점령하여 착착 진행시키는 시간일 것입니다. 속히 나오셔서 우리를 지도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5월15일 밤. 박정희 拜(배)>
  
  <5·16 혁명실기>는 이 편지가 이낙선 소령이 기안하고 박정희와 김종필이 加筆(가필)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 두 편지의 중대한 차이점은 전달된 편지엔 ‘각하의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한다’고 적혀 있고 소각해 버렸다는 편지엔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 운운’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석제는 “장 총장에게 전달된 편지의 의미는 ‘혁명에 실패하면 우리는 죽지만 당신은 빠져나가시오’란 면죄부였다”고 주장했다.
  
  김재춘은 새벽 2시 전 박정희 장군에게 “공수단으로 가셔서 부대를 직접 지휘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5·16 혁명실기>에는 박정희가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수단 行(행)을 강행했다고 적혀 있다.
  
  이석제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공수단과 해병대도 안심이 안 되는군. 내가 직접 가서 출동을 지켜봐야겠어”라고 말하며 6관구를 나섰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공수단으로 떠나기 전 김재춘에게 “참모장은 계속 여기에 남아서 지휘해 주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종필은 나중에 이날 밤 거사를 성공시킨 박정희의 3대 결심을 꼽은 적이 있었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을 알고도 신당동 집을 나와서 진압군 측 헌병들이 기다리는 6관구로 향한 것, 혼란에 빠진 6관구에서 나와 실병력이 있는 공수단과 해병대로 간 것, 그리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의 결단이 그것이다.
  
  金浦 街道
  
  5월16일 새벽 2시 직전 박정희는 6관구 사령부를 나와서 韓雄震(한웅진) 준장과 함께 지프에 올랐다. 이석제의 지프엔 李亨柱(이형주), 朴淳權(박순권) 중령이 타고 박정희가 탄 앞차를 뒤쫓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김포로 달리는 차중에서 앞자리의 박정희는 뒷자리의 한웅진 육군정보학교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타계한 한웅진 준장이 기자에게 남긴 증언에 따르면 이날 車中(차중) 대화는 대강 이러했다고 한다.
  
  ㆍ박정희: “지방에서는 지금 서울 상황을 모르고 있을 거야. 빨리 부대가 출동해야 하는데 말이야. 새벽 5시에 라디오를 들으라고 해놓았는데 방송이 나가지 않으면 호응하기로 한 부대에서는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ㆍ한웅진: “실패하면 빌어먹을 산 속에라도 들어가서 협상이라도 벌입시다.”
  
  ㆍ박정희: “병력이 나와야 협상이라도 하지. 라오스의 콩레 대위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부하도 살리고 다 사는 길이 될지 모르지.”
  
  ㆍ한웅진: “형님, 어쨌든 우리는 성공할 겁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해 거사했다고 하더라도 실패하면 만고역적이 되니까 끝까지 해봅시다.”
  
  박정희와 한웅진은 차중에서 담배를 계속 태웠다. 담배연기만이 두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날 차중에서 여섯 갑을 태웠다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 순간에는 초조했던지 라이터를 쥐고 있으면서 한웅진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재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웅진은, 그 12년 전 박정희가 군내의 남로당 조직원으로서 체포되어 전기 고문까지 당하고 무기징역 선고까지 받았다가 군복을 벗고 나서 불우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육본 특무과장이었다. 한웅진은 육사 2기 동기이지만 나이가 많은 박정희를 형님처럼 모시면서 인생의 나락에 떨어진 그를 가장 가깝게 지켜보았던 이였다. 이제 그는 또 한 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박정희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한편 공수단의 출동 부대 지휘자인 金悌民(김제민) 대대장은 6관구에서 보내 주기로 한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차량隊(대)는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쯤 늦은 밤 11시에 도착했다. 김 중령은 10대의 트럭을 몰고 온 운전병을 공수단 요원으로 바꾸었다. 6관구 운전병들은 부대 안에 격리되었다. 김제민은 대대 연병장 옆에 있는 공수 교육장에 트럭을 세워놓고 요인 체포 임무를 맡은 장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장교는 공수단이 서울로 들어간 이후 한 팀씩 지휘하여 총리, 장관들을 체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총리 체포를 책임진 朴鐘圭(박종규) 소령만 심야에 나타났다.
  
  한 주체 장교 출신 인사는 “그날 밤 거사가 탄로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피신하여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에 상황이 호전되자 나타난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김제민 중령은 차량이 도착한 뒤에도 박치옥 단장이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아 공수단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대대본부와 공수단 본부는 약 2km나 떨어져 있어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장님, 출동준비 다 되었습니다.”
  
  “어, 그래 잠시 기다려 봐.”
  
  김제민 대대장은 일단 부대원들을 트럭에 태웠다. 포섭된 팀장들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은 폭동 진압 훈련인 줄 알고 있었다. 김제민 대대장은 출동 시각이 지났는데도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초조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수단 정문에 박정희가 도착했다. 박치옥은 최근 증언에서 박정희가 도착했을 때는 공수단이 출동 준비를 끝내고 정문으로 나서려는 시점이었다고 한다.
  
  뒤차로 따라온 이석제가 보니 박정희는 박치옥을 정문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이석제는 차에서 내려 카빈총을 정문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박치옥에게 “빨리 출동하라”고 독려했다는 것이고 박치옥은 “왜 안내 장교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왜 차량을 늦게 보냈습니까” 하고 따졌다고 한다. 정문에서 대화를 나누고 지프 쪽으로 돌아온 박정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한다. 박치옥에 따르면 이때 박정희의 입에선 술냄새가 났고 자포자기한 마음을 술기운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석제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지프에 몸을 실으면서 “해병대로 가자”고 했다. 이석제의 지프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시오”라고 말한 뒤 떠났다. 김포 해병여단으로 달리는 차중에서 박정희는 뒷자리에 탄 한웅진 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해병대가 이 길을 진격하고 있을 때인데 도로가 캄캄하기만 하니 이상하지 않소. 해병대도 출동하지 않고 있다면 다른 부대는 예정대로 출동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끌고 나와야겠는걸.”
  
  지프가 길가의 경찰서 지서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내려서 지서로 들어갔다. “해병대가 이 앞을 통과했느냐”고 물었으나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서에 나와 있던 해병대 헌병에게 여단 본부로 전화를 해보도록 했다.
  
  “이미 30분 전에 부대를 떠났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도대체 어느 길로 갔기에 보이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지프를 한 1km쯤 더 달리게 했다. 맞은편에서 해병대 지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 지프를 세우고 물어보았다. 지프에 타고 있던 해병 헌병장교는 “우리 부대는 질러가는 길로 갔을 것이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차를 돌려 공수단 쪽으로 몰게 했다. 박정희 소장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석제 일행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해병대를 만나면 30, 33사단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해병대 측으로서는 육군이 출동한 것으로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동지 한 사람이 배반하여 기밀이 누설되었으므로 출동이 약간 늦어져 부득이 해병대가 앞장서게 되었다는 정도로 암시만 주도록 합시다. 상세한 이야기는 사기를 沮喪(저상)시킬 우려가 있으니 하지 말아요.”
[ 2011-03-04, 11: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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