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伯林 사건 연루 親北인사 윤이상·이응노를 ‘평화 통일 운동가’로 美化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주)미래엔 컬처그룹 ② / 사실관계와 배경설명 없이 동백림 사건 자체가 정치적으로 기획·조작된 것처럼 교묘하게 서술

趙成豪(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조갑제닷컴은 (주)미래엔 컬처그룹(舊 대한교과서)이 발행한 2011년 한국史 검정교과서의 통일방식에 관한 설명이 편향적으로 기술돼 있다고 3월3일 보도한 바 있다. 그런 기술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대한교과서는 9단원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 364페이지, ‘그 때 그 사건’에서 ‘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3선 개헌을 위한 의석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 천상병이 장애인이 되는 고문수사로도 이들의 간첩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정치적 의도로 사건이 확대·과장되었음을 밝히고, 불법 연행과 가혹 행위에 대해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하였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現 국가정보원)의 발표로 알려졌다. 1957년부터 북한은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서독과 유럽에 거주 중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포섭 공작을 펼쳤다. 당시 유럽의 남한 유학생과 장기체류자들이 포섭됐으며 그 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평화통일방안 선전과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에서 ‘革新인사를 지지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67년 12월3일 재판부는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은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6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 활동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7년 10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동백림 사건에 대하여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67년 4월14일 西獨주재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이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 취재차 체코 입국 이후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中情(중앙정보부)은 1967년 4월24일 한국여자농구선수단 이재학 감독을 통하여 최초로 李 기자 실종사실을 확인했다. 이 사건을 접한 임석진(당시 국내 대학교수)은 북한이 李 기자를 납치한 것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對北접촉 前歷(전력) 노출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돼 자수를 결심했다. 그는 이 사실을 평소 알고 지내던 홍세표(朴正熙 대통령의 처조카)에게 설명했다. 홍세표는 朴 대통령과 임석진의 만남을 몰래 추진했으며 1967년 5월17일 2시간가량 면담이 진행됐다. 朴 대통령은 임 교수로부터 유럽 유학생들의 對北 접촉상황을 듣고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수사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임석진에 대한 조사를 통해 對共혐의자 40여명에 대한 명단 및 對北 접촉 내용을 파악,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6·8국회의원 선거 이전(1967년 5월17일)에 임석진의 진술을 통해 유럽 유학생들의 간첩 의심활동을 알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밝힌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는 내용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사실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부정선거 여부와 관계없이 중앙정보부에 對共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동백림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부정선거 여론 차단이 아닌 한 기자의 행방불명과 그것을 북한 소행이라고 직감한 한 대학교수의 자수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 설명 없이 교과서가 기술한 문맥만 보면 중앙정보부가 정치적 의도만 가지고 간첩사건을 조작한 것처럼 판단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한교과서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윤이상과 이응노를 ‘평화 통일 운동가’로 왜곡하고 있다.

 

윤이상(1917~1995)은 親北反韓인사로 활동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김일성의 75회 생일 때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노래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김일성이 사망하자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統一(통일)의 앞길에 매진할 것을 확신 합니다”라고 美化·찬양했다. 김일성 역시 윤이상을 칭찬하며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올렸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2000년《김일성 敎示集》)”라고 추켜세웠다.

 

윤이상은 1963년 처음 訪北(방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이수자 씨는 그의 첫 방북 이유를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2006년 <한겨레신문>을 통해 밝힌 적이 있다. 방북 당시 윤이상은 북측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으며 동백림 사건 때 이 혐의가 인정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당시 중앙정보부 수사에서 윤이상은 금품수수 등 실정법 위반은 인정했으나 간첩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979년 이후부터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과 잦은 만남을 갖고 親北 행보를 가속화한다. 이 무렵 김일성은 윤이상에게 “민족의 재간둥이 윤이상 선생”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윤이상의 실체는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발표한 ‘入北자수간첩 오길남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1985년 윤이상의 권유로 가족과 입북한 오길남 박사는 북한의 선전요원으로 활동하다 1986년 탈출에 성공하였다. 당시 그의 아내와 두 딸은 탈출하지 못한 채 오 박사만 독일 등지를 전전했다. 그 무렵 윤이상은 오길남 박사에게 협박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다시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 … 왜 北을 욕하는 거요. 가족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겠소? 통일운동에 나서라고 하지 않았소? 왜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지 않소?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알라.” (오길남 著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中에서)

현재 오길남 박사의 아내와 두 딸은 북한의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韓國畵의 巨匠’이라 불리는 이응노(1904~1989)도 부인 朴仁京(박인경)과 함께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2010년 11월 출간된 尹應烈(윤응렬) 장군의 회고록 《상처투성이의 영광》에서 尹 장군은 동백림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백림 사건 연루자들의) 위반 정도가 약했다는 것은 매우 恣意(자의)적인 해석이다. 지금 잣대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당시의 급박한 대치상황에서는 중대한 反국가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6·8 총선 이전에 위법 행위 당사자의 제보로 수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애당초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동백림 사건의 수사를 일부 담당했던 尹應烈 장군의 회고록 내용과 대한교과서에서 기술한 동백림 사건의 내용을 비교하면 사실관계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다.

 

尹 장군은 당시 駐佛공사로 재직하면서 이응노·박인경 부부를 서울로 압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중앙정보부 본부로부터 ‘李·朴 부부가 간첩 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亂數表(난수표)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베테랑 수사요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물증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그것은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golois)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영광》中에서)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고 한다. 尹 장군은 당시 中情 요원들이 난수표 뿐 아니라 세포조직 명단과 검거에 대비해 마련한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확보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대한교과서는 이러한 사실관계는 생략한 채 윤이상과 이응노가 무고하게 연루된 것처럼 적고 있다. 교과서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윤이상과 이응노가 정확하게 어떤 활동을 해서 간첩 사건에 연루됐는지 알 수 없으며 ‘이들의 간첩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2003년 7월호《月刊朝鮮》에서 禹鍾昌(우종창) 기자는 ‘이응노·박인경 부부는 白建宇(백건우, 피아니스트)·尹靜姬(윤정희, 영화배우) 부부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대한교과서는 객관적 사실은 배제한 채 윤이상·이응노의 입장에서만 기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의 올바른 판단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들의 反체제·親北활동이 마치 평화 통일 운동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교과서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과거사위)는 정치적 의도로 사건이 확대·과장되었음을 밝히고, 불법 연행과 가혹 행위에 대해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당시 과거사위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 “관련자들이 북한 공작원들과 접촉하면서 동베를린(50명) 및 북한 방문(12명), 北側(북측) 인사로부터의 금품수수(17명) 등을 통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맞다. 과장은 됐지만 조작은 아니다”라며 실체가 있는 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내용을 대한교과서는 아예 다루지 않았으며 정부가 일방적으로 조작한 것처럼 기술했다.

[ 2011-03-09, 17: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