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번 革命을 자랑스럽게 여길 날이 있을 것”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47)/ 김종필 중령, 매그루더 美 8군 사령관에게 “혁명파 장교들은 미국의 각종 학교에 유학하여 민주주의가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이번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혁명은 미국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주면 주었지 손상시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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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 공동 성명
  
  김종필 중령의 설명에 대하여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은 이런 입장을 밝혔다.
  
  매그루더: “신정부가 공포한 목표에 대하여 본인이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방법이 다릅니다. 이는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견 차이는 속도에 있습니다. 귀하의 방법은 좀 성급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한국전쟁 당시 훌륭한 통솔력을 발휘했던 선배 장교들을 잃게 됩니다. 새로 등장한 장교들은 깨끗하기는 하겠지만 전투 지휘경험이 적습니다. 본인은 군인입니다. 북으로부터의 침략이나 국내 공산 세력의 전복 활동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 본인의 임무입니다. 이것을 알면 본인이 취한 모든 행동을 이해할 것입니다.
  
  혁명군이 본인의 이런 방어 임무를 위태롭게 한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그들은 본인의 동의 없이 나의 작전 통제권하에 있는 부대들을 출동시켰습니다. 둘째, 그들은 지휘관에게 불복하고 혁명군에게 충성하는 장교단을 포섭하였습니다. 셋째, 그들은 본인의 동의 없이 고급 장성들을 해임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군이 본인의 한국 방어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면 그 범위 안에서 혁명군에 반대하지 않고 신정부와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출동 부대의 원대 복귀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한국군 고위층의 人事(인사)에 대한 본인의 동의권입니다. 이 권한을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어떤 한국군 장교도 본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한림 장군처럼 체포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한국군) 지휘관들에게는 본인이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귀하도 한국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 알다시피 강력한 경제력 없이는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미국의 원조, 특히 軍援(군원)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미국이 원하는 목적을 귀국이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원조액이 책정될 것입니다.
  
  이틀 전 본인이 박정희 소장을 만났을 때 우리는 공동 성명을 내기로 합의했습니다. 박 장군이 마음대로 일선 부대를 동원할 수 있다면 본인에게는 약간의 작전 통제권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군 인사에 대해서 본인과 협의해 준다면 본인은 약 50~60%의 통제권을 가진 셈이 됩니다. 해임된 고급 장교들이 원직에 복귀한다면 본인은 100%의 통제권을 가진 셈이 됩니다.”
  
  김종필: “만사는 귀하가 혁명과 신정부를 승인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본인은 이번 혁명으로 미국 사람들의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도왔고 물질과 생명을 바쳤습니다. 혁명파 장교들은 미국의 각종 학교에 유학하여 민주주의가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이번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혁명은 미국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주면 주었지 손상시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모범이 되고 있는 미국이 이번 혁명을 자랑스럽게 여길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회담 직후 매그루더 사령관이 美 합참의장 렘니처에게 올린 전문에 김종필 중령을 평하는 대목이 있다.
  
  <김종필은 4월 혁명 직후 선배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했던 청년 장교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16명의 장교들을 조종하여 최영희 육군 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한 장본인이었다. 나는 김종필을 군에서 추방하려고 지난 한 해 줄곧 애써왔는데 그가 선동의 1인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 사복을 입고 왔지만 중령으로 복직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종필은 어제 만약 내가 혁명을 진압하는 데 작전지휘권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나와 박정희가 합의한 성명서 초안이 최고회의에서 통과될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알려 왔다>
  
  매그루더와 김종필의 세 번째 회담 바로 다음날 한·미軍(군)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1)국가재건최고회의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모든 작전지휘권을 복귀시켰음을 玆(자)에 성명하며 유엔군 총사령관은 공산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함에 있어서만 작전지휘권을 행사한다.
  
  2)유엔군 총사령관은 현재 서울 시내에서 근무 중인 제1해병여단 및 제6군단 포병단의 원대 복귀를 지시하였다. 이는 전에 수행하던 전선방어 군사력을 복귀시키기 위함이다.
  
  3)유엔군 총사령관은 제30사단, 제33사단, 제1공수전투단 및 전방부대로부터 추가적인 5개 헌병 중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통제하에 둔다.
  
  1961년 5월2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유엔군 총사령관 매그루더>
  
  이 성명서는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 지휘권 범위 중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의 한국 방어’란 대목을 삭제하여 오로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방어로 한정시켰다. 유엔군 사령관이 국내 문제에 개입하여 한국군을 동원하는 길을 차단한 것이다.
  
  미군이 이런 식으로 5·16 혁명을 추인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軍心(군심)이었다. 5·16 주체 세력뿐 아니라 한국군 전체의 여론이 ‘장면 정부 반대, 혁명 지지’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압 명령이 내려가더라도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정치 성향이 강한 장교들뿐이 아니었다. 정치엔 무관심하고 전투에만 관심이 있는 채명신 5사단장 같은 장군도 적극적인 혁명파가 되었다.
  
  미군이 혁명군에 대한 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도 포천에 주둔하던 5사단의 2개 전투연대가 18일 오전에 혁명 지지를 선언하면서 서울로 들어온 때문이었다. 5월16일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채명신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대 출동 금지’를 지시했는데 채명신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군 사령관 각하, 야전군은 당신 개인의 군대가 아닙니다. 우리끼리 싸우면 좋아할 사람은 김일성뿐입니다.”
  
  다음날 매그루더 사령관이 또 채명신 준장을 설득하려고 사단본부를 찾아왔더란 것이다. 채명신은 한 시간 반 동안 이런 논리로 매그루더를 설득하려고 했다고 한다.
  
  “우리 군은 내부의 親(친)공산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어서야 했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이 내부로부터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 임무도 있는 게 아닌가. 나처럼 공산당을 피해 남하한 사람들이 600만이나 된다. 이들은 공산화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채명신 사단장은 출동 직전에 중대장급 이상 전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혁명 지지 여부는 자네들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 지르더란 것이다.
  
  “우리는 사단장님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습니다!”
  
  혁명 內閣
  
  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사무실을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민의원) 건물로 옮겼다. 최고회의 의장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부의장은 박정희 소장.
  
  이날 오전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한다. 그는 최고회의 측에 이 결심을 통보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날이 저물도록 아무도 청와대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날 밤 8시 尹(윤) 대통령은 하야 성명서를 등사하여 언론사에 돌림으로써 성명서를 대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금번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 사람들은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국민 여러분도 적극 협조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장도영은 이 하야 성명이 방송으로 보도된 이후에야 이 중대 사실을 알았다. 5·16 이후 장교들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긴장된 가운데 정신없이 이리 저리로 쫓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의 하야하겠다는 연락도 이런 가운데 장도영에게 닿지 않고 실종되어 버릴 정도였다. 장도영은 하야 성명을 알게 되자 청와대로 올라가려고 맞은 편 박정희 방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대통령이 사임하면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니 지금 청와대로 같이 올라가서 만류합시다.”
  
  “그만둔다면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장도영은 어이가 없어 말없이 박정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만둔다는 것을 저희들이 어떻게 합니까.”
  
  장도영은 언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여보, 당신 지금 혁명을 바로 하려는 것이오? 이 시기에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없어지면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이오?”
  
  “지금 대통령이 있으나 없으나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이 말을 할 때 표정은 ‘냉소적’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소. 빨리 나하고 올라갑시다.”
  
  박정희는 말없이 장도영을 따라나섰다. 박정희는 이왕 혁명을 하는 마당인데 실권 없는 대통령을 장식물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장도영은 사태 수습에 대통령의 권위를 빌리려 했으니 두 사람의 혁명관은 하늘과 땅 사이만큼 컸다.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은 윤 대통령에게 飜意(번의)를 간청했다.
  
  “각하께서 떠나시면 당장 대외 관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혁명이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유일한 헌법 기관인 대통령께서 물러나시면 수교국과는 물론이고 유엔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외교관들의 견해입니다.”
  
  장도영은 밤늦도록 설득을 계속했다. 그러는 사이 박정희는 혼자서 돌아가고 말았다. 장도영의 그런 설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윤보선은 장도영에게 물었다.
  
  “민정 이양은 언제 할 거요.”
  
  “아직 완전한 합의는 못 보았지만 석 달 내지 반 년 정도 잡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마음에 드시지 않더라도 민정 이양 때까지는 대통령으로 계시면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윤보선은 장도영의 성의 있는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이 물러나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사람은 장도영인데 그가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야를 만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했다. 다음날 오후 2시쯤에는 金溶植(김용식) 외무차관이 대통령을 찾아와서 국제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하야를 말렸다.
  
  “각하께서 사임하시고 난 후 당장 북괴군이 남침해 와도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국가로 승인을 못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유엔이나 자유 우방 국가에 호소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김용식은 대통령이 하야하면 우리 정부가 54개국과 수립해 놓은 국교가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윤보선은 이날 오후 장도영과 박정희가 배석한 가운데 하야를 번복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 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수반 겸 국방부 장관은 장도영(39), 외무부 장관은 金弘壹(김홍일·57) 예비역 육군 중장, 내무장관 韓信(한신·40) 육군소장(국방연구원), 재무장관 白善鎭(백선진·40) 육군 소장(육본 군수참모부장), 법무장관 高元增(고원증·41) 육군 준장(국방부 법제위원장), 문교부 장관 文熙奭(문희석·40) 해병 대령(해병대 작전교육국장), 부흥부를 대체한 건설부 장관 朴基錫(박기석·34) 육군 대령(2군 공병부장), 농림부 장관 張坰淳(장경순·40) 육군 준장(육본 교육처장), 상공부 장관 丁來赫(정래혁·38) 육군 소장(국방연구원), 보사부 장관 張德昇(장덕승·44) 공군 준장(공군의무감), 교통부 장관 金光玉(김광옥·36) 해군대령(해군대학 총장), 체신부 장관 裵德鎭(배덕진·38) 육군 준장(1군 통신부장), 국무원 사무처장 金炳三(김병삼·40) 육군 준장(육본 일반참모비서실장), 공보부장 沈興善(심흥선·36) 육군 소장(육본 인사참모부 차장).
  
  이들 14명 중 50대는 한 사람뿐이었다. 40대가 7명, 30대가 6명이었다. 장면 내각 장관들보다도 20세 가량이 젊어진 것이다. 거의 한 세대의 연령 차였다. 이 세대교체는 5·16 쿠데타가 혁명으로 진행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목표 달성과 효율성, 그리고 책임감과 추진력으로 무장한 30, 40대가 60대의 민간 정치인들을 대체하고 국가 지도부를 차지한 것이다.
  
  젊어진 국가 지도부는 그 젊음 그대로 전광석화 같은 개혁 조치들을 연일 터뜨리기 시작한다. 패기만만한 장교단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면적인 접수와 개조 작업이 발진한 것이다. 중앙정부부처, 국영기업체, 경찰, 지방행정기관의 장과 간부로 나간 장교들은 현대적 조직 경영을 경험한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선진된 세력이었다. 당시 한국군 장교단 약 6만 명 가운데 약 10%가 渡美(도미) 유학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비율은 당시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 2011-03-22, 13: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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