革命軍의 당면한 문제점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0)/ 김종필은 장도영을 거세하지 않고는 혁명 과업을 순탄하게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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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5월25일쯤 중앙정보부 조직안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서정순 중령이 김종필에게 건의했다.
  
  “정보 전문가들이 만든 案(안)인데 아무래도 법률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할 것 같아.”
  
  김종필은 “하극상 사건 때 나를 도와준 분이 계셔. 최 동지가 모셔 와” 라고 했다.
  
  최영택은 서대문 근처에 있던 申稙秀(신직수)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중앙여관으로 모시고 왔다. 신직수는 군 법무관 시절에는 박정희 사단장 아래서 법무참모로 일한 적이 있었다. 신직수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법의 법률적인 검토를 해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일별하더니 말했다.
  
  “잘 하셨는데 이대로는 부족합니다. 손을 많이 대야겠습니다.”
  
  신직수 변호사는 김종필로부터 중앙정보부법 초안을 넘겨받아 집으로 가져갔다. 다음날 그는 말끔하게 고친 법률안을 들고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직수는 中情(중정) 법률고문으로 임명되고 1970년대엔 정보부장이 된다. 정보부 요원들은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뽑아왔다. 최영택 중령은 육본정보국 차장 崔澤元(최택원) 준장과 첩보부대장을 찾아가 정보요원들을 뽑아 왔다. 방첩대에서 오래 근무했던 이영근, 서정순은 방첩부대에서 수사 요원들을 많이 데려왔다.
  
  김종필은 5월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정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에게 가져갔다. 박정희는 내용을 일별한 뒤 만족해하면서 “두고 가면 의장 결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김종필이 다시 찾아갔더니 박정희는 “장도영 장군이 결재를 보류시켰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은 이때 육사 8기 동기생인 김종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하고 나가더란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장도영이가 정보부에 자기 사람들을 심으려는 것 같아. 우리끼리 해치워야겠어.”
  
  그때 김종필은, 장도영 의장이 동향인 인천지구 첩보대장 출신인 金日煥(김일환) 예비역 대령을 정보부장으로 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며칠 뒤, 즉 5월 말 김종필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장도영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빨리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재촉했고, 자신이 직접 장 의장을 찾아가 설명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받아온 결재 서류를 들고 온 김종필은 최영택 등 창설 요원들과 앉아 주요 인사를 결정했다. 부장 자리엔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행정관리차장에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에 서정순, 총무국장에 강창진, 해외 담당 제2국장에 석정선, 수사 담당 제3국장에 고제훈, 교육 담당 제5국장에 최영택, 통신실장에 김태진, 비서실장에 金奉成(김봉성), 고문에 신직수(법률담당)─장태화(정치담당)─김용태(경제담당)이었다. 완전히 김종필 인맥으로 구성된 중앙정보부는 군정 기간에 박정희 의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를 받으면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 군정 이후를 내다본 새로운 정부와 정당을 연구하고 조직하는 산파가 된다.
  
  6월10일에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은 全文(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이었으나 엄청난 권한을 담고 있었다.
  
  정보부의 기능은 ‘국가 안전 보장과 관계되는 국내외 정보 사항 및 범죄 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한다.’ 부장과 차장은 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어 의장이 임명한다. 전국에 지부를 두며 직원은 부장이 임명한다. 정보부는 소관 업무에 관한 수사를 할 때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의 직원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 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법안이 공포되기 전에 중앙정보부는 이미 기능을 시작한 상태였다. 최영택의 기억으로는 정보부에 최초로 보고해 온 곳은 치안국이었다고 한다. 치안국장은 육군 헌병감으로서 정군 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석정선을 강제 예편시킨 조흥만 준장이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흥만이는 자네 옷을 벗긴 사람이잖아. 왜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어?”
  
  “이봐, 과도기에는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성이 더 중요해. 이런 사람이 충성은 더 잘하지.”
  
  치안국이 올린 보고의 요지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온 여객기에 불법으로 입국한 재일동포 錢世鎬(전세호)란 자가 경찰에 검거됨. 이 자는 박정희 장군이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음. 거류민단에서 학생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해 왔는데 박 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서 귀국을 강행했다고 함>
  
  해외담당 국장이 된 최영택은 사보이호텔에 붙들려 있는 전세호를 만나러 갔다. 전세호는 민단과 조총련에 대해서 깊은 정보를 말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유태하 전 駐日(주일)대사를 꼭 데리고 오십시오. 일본에서도 귀국을 거부하고 있는 그분의 존재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자금을 써가면서 그동안 정계, 재계, 야쿠자 조직에까지 아주 넓은 인맥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분을 데리고 와서 이 인맥을 활용할 수 있다면 한일회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날 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물어 전세호가 제자임을 확인했다. 유태하 전 대사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에 귀국을 거부하고 있었고, 혁명정부도 그를 부정 축재자로 지목하여 수배해 놓고 있었다. 다음날 정보부에선 ‘유태하 대사 귀국 공작’ 회의가 열렸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혁명 구상 단계 때부터 혁명 이후엔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예상하고 이때 일본으로부터 돈을 꾸어 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종필 부장은 최영택에게 “전세호와 함께 일본에 가서 유태하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때 한일 두 나라 사이엔 국교가 없어 일본에 입국하는 데 편법을 써야 했다. 최영택은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 홍콩 비자를 얻었다. 홍콩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이틀간 체류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홍콩에 들어간 뒤 홍콩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일본 입국 비자를 얻었다. 전세호의 협조를 얻어 최영택은 한 20일 뒤 유태하 대사를 데리고 귀국할 수 있었다.
  
  以南 대 以北
  
  혁명 정권의 칼자루 역할을 하게 되는 중앙정보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종필은 장도영을 거세하지 않고는 혁명 과업을 순탄하게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장도영 거세에 있어서는 김종필을 필두로 한 8기 영관급 주체 장교들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육사 8기생들과 장도영 사이는 나이로는 2~3세, 군 경력도 2년 차이밖에 없었으나 계급은 중령과 중장 차이였다.
  
  중령 계급장을 6~8년간 단 8기생들은 선배 장성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김종필은 5월15일 혁명 방송문을 작성할 때도 박정희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이라고 써넣는 데 반대했었다. 장도영을 혁명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확답을 하지 않고 애를 먹인다고 생각한 일부 주체 장교들은 혁명 후에도 태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장도영을 처단해야 한다면서 날뛰었다. 그때마다 박정희는 “혁명에도 의리가 있다”면서 달랬다.
  
  여러 번 장도영한테 신세를 진 박정희의 입장은 의리와 인정 면에서도 30대 영관급과는 같을 수 없었다. 그런 장도영이 혁명에 무임승차한 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권한을 행사하려 한다고 본 김종필은 5월 말부터 장도영 거세 준비에 들어간다.
  
  장도영을 거세하지 않으면 혁명 정부가 분열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김종필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자료로는 그가 6월2일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만나 나눈 대화록이 있다. 김종필은 서두에서 “오늘은 우리 혁명군의 당면한 문제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해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전 역사를 통해서 두 차례 대혁명이 있었습니다. 600년 전에 일어난 첫 번째 혁명도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합니다. 저는 4·19에 대해서는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대혁명이 5·16입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많은 차별 정책으로 나라가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혁명의 主목적은 이런 분열 상태를 종식시키는 일입니다. 장도영 장군은 이북 출신이고 박정희 장군은 이남 출신입니다. 지금의 분열과 갈등은 이 점이 主원인입니다.
  
  장도영 장군의 태도는 혁명 전, 혁명 중, 혁명 후에 모두 달랐습니다. 장 장군이 혁명을 비호했음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모의 정보가 새나갔을 때도 그는 뜬소문에 불과하다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해 주었습니다. 박 장군은 거사 전에 최고회의의 조직 구성과 의장 문제까지 그와 상의했습니다. 장 장군은 최고회의를 이끌어갈 만한 적격자가 없다고 걱정까지 했다고 합니다. 혁명 당일 장 장군은 밤 9시40분에 30사단의 반란을 보고받고도 장면 총리에게는 다음날 새벽 2시에 보고했습니다. 왜 그토록 지각 보고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김종필은 이런 식으로 장도영 장군의 기회주의적 행동 사례를 한 20분간 자세히 설명해갔다.
  
  “박 장군은 18일 이후 장 장군에게 복종했습니다. 朴 장군은, 張 장군이 최고위원들과 내각을 임명했을 때 어떤 반대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이북 출신들이 많이 기용되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소장파들을 박 장군이 무마시켜야 했습니다. 24, 25일경까지 장 장군은 박 장군과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는 듯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걸핏하면 충돌했고 박 장군과의 상의를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장들을 임명했을 때도 朴 장군은 신문을 보고 나서야 알 정도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셨겠지만 장 장군은 오는 8월15일까지 정권을 민간 정부에 이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현재 모 신문은 신민당(야당)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장 장군이 간접적으로 이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모 신문의 편집국장도 장 장군을 지지하도록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韓美(한미)군 사이에 연락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張 장군의 직책이 네 개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런 중대한 직책을 네 개나 갖고 있는 탓에 우리 兩軍(양군) 사이에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부하들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인은 오늘 최고회의에 법안을 상정시켰습니다. 최고회의 의장, 부의장, 위원들은 겸직을 금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이 안건은 투표 결과 19대 12로 가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임육군 참모총장을 뽑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귀하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잘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뉴스위크>지에 ‘지금 한국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나’ 라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장도영 장군을 중심으로 단합할 것입니다.”
  
  장도영에 대한 많은 비판을 쏟아놓은 뒤에 김종필이 말한 ‘장도영 중심의 단합’을 매그루더는 하나의 修辭(수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매그루더는 “그러면 장 장군의 직책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최고회의 의장만 맡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도영 장군과 맺은 신사협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을 건널 때) 헌병대로부터 발포를 당한 박정희 장군은 ‘장도영이가 나를 죽이려 하는군’이라고 말했고 젊은 장교들은 장 장군을 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 장군은 ‘아니야, 우리는 장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돼’라고 말했습니다. 이남에서라도 남북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장 장군의 이북 출신 추종자들은 세력을 확대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 5000년 역사에 있어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장 장군이 지난번에 訪美(방미) 의사를 표명했을 때도 그것은 동료들과 합의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꼴이 정비되지도 않았는데 貴國(귀국) 대통령과 만나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현지 사령관인 귀하와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의 방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방미한다면 이곳 정세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에게 “각 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은 최고위원으로 계속해서 남는가”, “박정희 장군은 상임최고위원이 되는가”라고 꼬치꼬치 물었다. 김종필은 백지에다가 혁명 정부의 조직 체계도를 대충 그려나가면서 각 부서의 기능과 상하 관계를 설명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멜로이 8군 부사령관이 “사본을 한 장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물론입니다. 이 정부 조직 초안은 혁명 두 달 전에 작성한 것입니다.”
  
  매그루더가 “(조직안을 만드는 데) 고심을 많이 했겠군요”라고 하니까 김종필은 이렇게 받았다.
  
  “귀측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습니다.”
  
  미국 측이 한국군 장교들에게 가르쳐 준 조직 운영의 기술을 혁명에 써먹었다는 뜻이다.
[ 2011-03-25, 12: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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