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시대의 2대 조역, 李厚洛과 金鍾泌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56)/ 그들은 18년간 愛憎이 엇갈리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國政에 깊숙이 관여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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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과 李厚洛
  
  1978년, 코리아게이트 사건(朴東宣·박동선에 의한 로비 사건)을 파헤치던 미 하원 소위원회가 펴낸 <한미 관계 보고서>엔 이런 대목이 있다.
  
  <(5·16 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 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 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이후락은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 측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 몇 달 뒤 군사 정권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후락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미 CIA가 이 씨의 석방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봉기(대한공론사 사장, 유정회 의원 역임)는 김정렬 국방장관 아래서 준장급 문관으로서 특별보좌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이후락 및 혁명 주체들과 친했다. 6월 초 그는 미도파 건너편에 있던 희다방에서 우연히 김종필 부장을 만났다. 김봉기는 이후락을 석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김종필은 “며칠 안으로 석방될 거요”라고 하더니 “지금 대한공론사 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 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 줘야겠으니 이력서를 갖다 주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대한공론사는 정부 투자 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다. 김봉기는 며칠 뒤 이력서를 들고 김종필을 만나러 갔다.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Bar)로 갔더니 김종필은 안 보이고 한 구석에 이후락 씨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정보부 서울분실장 이병희 씨가 들어왔고 조금 있다가 김종필 부장이 합류했지요. 저는 김 부장과 따로 만나서 ‘대한공론사 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있는 이후락 씨가 적임자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 부장은 이후락 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런 시대에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라면서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대한공론사를 이후락 씨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이후락 씨가 신문사 사장이란 직함을 가지면 미국 측과 접촉하는 데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 이후락 씨는 대한공론사 사장, 저는 주필 겸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언론사 사장이 된 이후락은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었다고 한다. 정부 홍보 일변도에서 벗어나 객관 보도에도 힘써 한국 거주 외국인들과 외교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군사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코리언 리퍼블릭>의 신뢰도가 높아지자 혁명정부에선 이 신문을 이용하여 외국인들에게 군사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게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대한공론사의 운영에 있어서는 김종필 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 부족을 메우기도 했다. 이후락 씨가 몇 달 뒤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이후락 씨를 제가 잘 아는데 불러다 쓰시겠습니까” 하고 천거한 것도 자신이라고 한다.
  
  “사실은 이후락 씨가 갇힐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봐요. 단지 민주당 시절에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있었던 때문에 혁명에 방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후락 씨가 잡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다닐 때인데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후락 씨는 박정희 장군도 잘 알고 그분이 정보국 차장일 때 제가 과장으로 모신 적도 있고요, 그래서 내가 만났지요. ‘격동기가 되다 보니까 일이 잘못돼서 고통을 드린 것 같다’고 하고는 대한공론사를 맡겼던 겁니다.”
  
  박정희 시대의 2대 조역인 이후락과 김종필은 그 뒤 18년간 愛憎(애증)이 엇갈리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군정의 조기 종식과 정권의 조기 이양 문제로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던 6월4일 <조선일보>는 ‘군사혁명과 정권 이양─네 나라의 경우’란 제목으로 터키, 이집트, 프랑스, 버마의 예를 들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자 나세르는 만 5년 만에 형식적인 의회정치로 돌아가면서 헌법을 제정하여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로 갔다. 버마의 네윈은 쿠데타 3년 후 정권을 민간에 넘겨주었지만 군부의 실력자로 남아 있으면서 정치를 조종하고 있었다.
  
  1년 전인 1960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터키 군부는 가을에 정권을 민간 정부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한 가운데 군내의 갈등, 폭동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3년 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주둔군의 반란을 계기로 과도 정권 담당자로 추대된 드골은 항구적인 정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군부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알제리에 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전에는 버마식 군부 통치를 선호했으나 정권을 잡은 다음엔 군이 병영으로 돌아가서는 민간 정부를 조종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혁명 주체들은 드골 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규합한 드골과 프랑스의 안정된 권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최고고문으로 발탁되었던 유진오 고려대 총장은 6월1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드골 헌법과 유사한 권력 구조로서 정권 이양을 할지도 모른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었다.
  
  6월27, 2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정희 부의장의 특별 기고 ‘指導者道(지도자도)’에서 그는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수준은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했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他律(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다. 책임감 없는 자유가 방종과 혼란과 무질서와 파괴를 조장하였다. 인권 존중 사상이 토대가 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모략, 중상, 무고로 타락해 버렸다. 의무감이 박약한 권력층은 국민과 유리되어 권력을 남용하고 부패분자들과 결탁하여 巨富(거부)를 축적했다. 경제인들은 정치인과 결탁하여 부정 융자, 탈세, 밀수, 재산의 해외 도피 등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였고…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자나 특권 계층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대중 속에 뿌리박아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李(이) 정권과 張(장)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될 뿐만 아니라 조국을 소생시킬 방도를 잃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대중과 항상 호흡을 같이 하며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여 가장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고,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과 가장 가능한 방법에 대하여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협력을 자극하고 이끌고 나갈 용기를 가진 자이다>
  
  미국의 새로운 對韓 戰略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하자 이 기정사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계속하여 자신들의 국익을 한국에서 구현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이승만─장면 정부와는 전혀 다른 혈기왕성한 장교 집단을 상대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새로운 정책 논리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1년 6월5일 ‘한국 문제에 관한 대통령 직속 긴급조치반’은 백악관 내 국가안보위원회에 한국 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올렸다. 본문 38쪽, 부속 문서가 100쪽에 이르는 이 자료는 1981년 9월18일에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었다.
  
  이 보고서의 핵심인 ‘서문 및 건의’ 부분을 쓴 것은 그때 주한 대사로 내정되어 있던 새뮤얼 버거였다. 이 긴급조치반의 책임자는 前 주한 미국 대사 월터 P. 매카나기였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을 붕괴시킨 힘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좌절하여 불만이 쌓여 가던 민족주의 의식, 젊은 세대의 불만, 국가적 목표의 상실, 국민들의 좌절감.’
  
  이 보고서는 또 ‘5·16 쿠데타는 소수의 군인들이 잘 짜인 계획을 세운데다가 장면 정부가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에 대한 신뢰감을 국민들로부터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과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이 젊은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 힘을 통합하여 경제 개발과 사회 개혁으로 돌리도록 미국 정부가 지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계속해서 혁명적인 코스를 밟게 될 것이다. 그런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면 북한 공산당과 합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군사 정권을 지원하여 한국에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승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 미국의 국가적 위신, 그리고 남한의 전략적 가치, 즉 西(서)태평양과 일본의 방어에 사활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점. 이 보고서에는 미국에 고분고분하던 장면 세력과는 달리 박정희 세력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으로 무장하고 있어 다루기 어렵다는 우려가 깊게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장교단이 정부 기관에 효율성을 불어넣고 부정부패를 청소할 것이란 기대도 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예언적인 전망도 했다.
  
  <진취적인 지도력, 동기 부여, 사회적 통합, 그리고 확실한 국가 목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열정이 조직된다면 한국인들은 현재의 좌절감과 자학 의식을 청산하고 경제를 향상시켜 안정된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시대적 낡은 전통의식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문화적 가치 체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 보고서가 對韓(대한) 정책의 새로운 기본 틀로 제시한 것은 장기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과 실천이었다. 야심만만하고 주체성이 강한 정치 장교단을 다루는 데는 과거처럼 군사 원조 중심의 틀로써는 어렵고 경제 협력이란 새로운 틀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하여’란 항목에서 이 보고서는 이런 요지로 지적했다.
  
  <미국의 힘과 권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란 수단을 동원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국가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인에 대하여 보호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동등하게 상대해야 한다. 우리는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 실천에 한국인을 대신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독립 주권국가의 시민으로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경제 개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그쳐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이어서 앞으로 한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수단을 주로 동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 개발 계획은 미국의 對韓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 대표들은 계획과 예산의 수립 과정에 상담을 해줌으로써 이 계획의 실적과 원조를 조건부 관계로 연결시킨다. 원조 액수를 줄이거나 지급을 일시 보류하는 방법으로써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 對韓 정책 건의서는 한국의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 교육이 너무 유교적인 전통에 빠져 있어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 분야를 중시하고 자연과학, 공학, 행정, 사회과학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술, 직업 교육을 강화하여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이것이 박정희의 근대화 계획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한국인의 좌절감과 목표 상실감을 자신감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는 장기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해야 하고 그래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이 보고서의 기본 인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효율적인 행정의 필요성, 부패 추방,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의 교육 개혁은 박정희가 추진하려던 방향과 같았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20일 만에 워싱턴과 서울에서는 우연히도 똑같은 ‘한국의 비전’을 다듬고 있었다. 쿠데타에 의한 불편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또 박정희의 오기 서린 自主(자주) 노선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한·미 관계가 기본적으로 같은 궤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국가 목표와 그 발전 전략에 대한 공감대가 양국 수뇌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이 보고서는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보고서를 읽어 보면 미국 정부는 박정희·김종필 세력의 도전을 계기로 한국을 대하는 태도를 우월적인 후견인의 시각에서 대등한 동반자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자각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군의 청년 장교단이 미군에 도전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보는 눈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는 미국이 태평양전쟁으로 해서 일본과 아시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힘의 대결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은 당돌한 도전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다.
[ 2011-04-04, 11: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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