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과중한 국방비 부담, 韓美日 공조체제 때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실패한 北천리마 운동-붉은기 쟁취 운동 성공한 것처럼 서술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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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로 발간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만성적인 북한경제의 고립과 파탄문제를 언급하면서 북한의 실패한 사회주의 건설 운동인 '천리마 운동'과 '붉은기 쟁취 운동'에 대해 우호적인 기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 역사 교과서 가운데 (주)미래엔컬처그룹이 발행한 교과서의 경우 "북한이 1980년대 이후 합영법 등을 통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고자 했으나, 핵 개발 등 무력 도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가해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해 북한 경제의 파탄 원인을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아래와 같다.
  
  ▲“한미일 공조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과중한 국방비의 부담과 에너지의 부족, 사회 간접 시설의 미비, 기계 설비의 노후화 등의 문제가 북한 경제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았다. 1980년대 말부터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에 힘입어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건설 등 남한과의 경제교류가 확대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관리개선·개조조치(2002)’를 발표하여 기업소 경영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생필품 교류를 위한 시장을 허용하는 등 시장 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주)미래엔컬쳐그룹, 389페이지>
  
  ▲“북한은 1957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천리마 운동이 시작되었다. 천리마 운동은 사회주의 경쟁 운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후 북한 전역의 생산 현장에는 속도전과 경쟁이 지배하였다……. (중략) 1970년대에는 천리마 운동의 뒤를 이은 3대 혁명 운동과 3대 혁명 붉은기 쟁취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북한은 경제 부분에서 국제적 시야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여러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자신들의 경제 성장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물들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천재교육, 391~392페이지>
  
  ▲“1956년 말부터 시작된 천리마 운동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이라는 구호 아래 인민들을 일치단결시켰다. 이때의 경이적인 속도를 ‘천리마 속도’라고 불렀다 한다. 평양시 건설 때는 14~16분에 한 채씩 주택을 조립하였기 때문이었다. 1974년부터는 ‘속도전’이라는 용어가 사회주의 노력 경쟁의 공식 구호로 채택되었다.” <(주)삼화출판사, 330페이지>
  
  ▲“북한은 6.25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았다. 먼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복구 및 경제 건설 3개년 계획(1954~1956)을 추진하였다. 목표를 초과 달성한 북한은 이어서 추진한 제1차 5개년 계획(1957~1961)도 1년 앞당겨 완료하였다……. (중략) 북한은 전후 복구와 경제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영화·집단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수도 평양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선전하는 상징도시로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되었다.” <(주)지학사, 284페이지>

  
  북한은 6.25전쟁이후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한다는 미명하에 경제재건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주민들이 절대 빈곤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경제건설의 중점을 군사력 건설에 두었다. 이에 최창익(崔昌益) 부수상은 “기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반대했다. 김일성은 최창익을 수정주의자로 낙인찍어 숙청했다.
  
  김일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57년~1961년 기간 동안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웠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스탈린식 강제 대중동원으로 ‘천리마운동’이라는 생산독려 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는 1958년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이 추진했던 ‘대약진운동’과 유사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을 통해 철강생산량 2억 톤, 곡물생산량 5억 톤을 생산해 급진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인민공사’를 만들어 야심에 찬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일례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당시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모기·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중국의 모든 주민들이 동원됐다.
  
  당시 참새를 쫓기 위한 모택동의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되어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소리를 쳐서 쫓아냈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문제는 경제 문외한(門外漢)인 김일성이 모택동의 야심 찬 생산운동을 모방하면 경제건설의 목표가 쉽게 달성될 것으로 믿고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기계와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노동력만으로 경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결국 ‘천리마운동’은 집단이익을 위해 주민들의 희생만 강요한 운동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끝으로 끝날 것 같았던 북한의 경제 실패는 이후 1961년~1967년 사이 진행된 제1차 7개년 계획에서 또 다시 나타났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후 대립을 거듭하던 중국과 소련은 이 시기 적대적 관계가 됐다. 그 결과 소련은 대(對)중국원조협정을 파기시켰으며 1969년에는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빚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어느 편에 서야 되나 고민하다 중국과 소련간의 등거리외교(等距離外交)를 지향 했다. 겉으로는 등거리외교였지만 김일성은 내심 중국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김일성을 비판하게 되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게 됐다. 그 결과 북한은 중소양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됐다.
  
  기대했던 경제원조가 불가능하게 되자 제1차 7개년 계획의 목표달성은 실패로 이어졌고, 북한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소위 자력갱생을 경제 건설 노선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무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전군(全軍)의 현대화를 위한 첨단무기 개발은 물론 부족한 기계설비와 원재료를 보충하는 데도 실패했다. 국내자원개발에 있어서도 노후화된 채광 설비를 개선할 수 없어 철광과 석탄 생산도 목표달성에 실패했다.
  
  이와 함께 에너지 부족으로 생산 공장의 가동에 차질을 가져와 기간을 3년씩이나 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했던 경제 목표를 전혀 달성할 수 없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중노동과 경노동의 차이해소 ▲농업노동과 공업노동의 차이해소 ▲여성의 가사노동 해방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6개년 계획(1971~1976)을 내세우게 된다.
  
  이 계획의 실행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대중동원을 위한 ‘백일전투’라는 슬로건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경제계획수행에 대중동원 이외에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이 계획기간에 7·4남북공동선언(1972년)이 합의되면서 남북고위관리가 남과 북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북한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보고 초조해진 나머지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플랜트(생산시설 및 공장) 수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북한 수출품의 주종인 아연 등의 국제가격이 폭락해 자금 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중동의 오일쇼크로 극도의 에너지 부족과 원자재가격의 상승 등 불리한 여건이 조성되면서 북한은 외화부족으로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외채상환과 수입대금의 지불이 곤란하게 되어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게 됐다. 1975년 북한은 5억 5천만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1977년에 이르러서는 대외부채가 30억 달러에 달했다.
  
  결국 김일성은 1977년 신년사를 통해 철강시멘트 등의 생산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으며, 수송부문의 부진 등으로 6개년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이로써 북한은 3번의 경제 계획을 연달아 실패했다.
  
  북한은 1978년부터 1984년 기간 동안 또 다시 제2차 7개년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서 수립된 계획으로 목표는 경제의 자립 및 과학화, 운송부문의 현대화와 더불어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인민들의 소득을 1.9배로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농산물 생산목표는 1천만 톤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임야개간과 간척사업이 실시됐다. 계획의 슬로건은 ‘속도전’이었는데 이는 목표의 초과달성을 위한 것으로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김일성의 70세를 기념하기 위해 거액을 투입해 170미터 높이의 주체사상탑을 건립하는 등 비효율적인 부문에 자금을 집중함으로써 경제적 곤란이 더욱 가중됐다.
  
  이 시기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외자도입을 위한 ‘합영법’(合營法)의 제정이다. 합영법은 1984년 공포됐으나 자본의 도입은커녕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1985년 2월에 이 계획의 성과 발표도 없이 제2차 7개년 계획의 종료를 선언했다.
  
  북한은 그러나 재차 제3차 7개년 계획(1987~1993)을 세웠다. 이 계획은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그리고 과학화를 계속 추진한다는 것을 과제로 정한 것으로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중국의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시기에 수립됐다.
  
  이 당시 국제정세는 사회주의를 고집하는 북한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면서 자유화의 시대가 전개됐고, 1991년에는 소련도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이 같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북한의 경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물론 이 시기 수립한 7개년 경제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원인은 대(對)소련 무역 격감과 무역결제방식의 변화에 있었다. 과거에는 우호적 가격에 의한 무역방식으로 거래를 해오다가 소련이 개방경제가 되면서 경화를 통한 결제방식으로 바뀌면서 외화부족으로 허덕이는 북한으로서는 소련과의 무역거래를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제3차 7개년 계획은 1993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종료하게 된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북한 경제상황의 악화를 보고했던 강성산(姜成山)이 전력·철강·화학섬유 그리고 농산물 생산의 부진을 시인하고 3차 7개년 계획의 3년 연장을 발표했다.
  
  북한은 그러나 이 같은 연장계획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1961년 이래 한 번도 북한의 계획경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후 북한의 경제악화는 더욱 심화되어 극도의 곤란에 직면하게 됐고, 주민들의 생활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1983년 6월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일은 6월 15일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한 견학결과 보고를 통해 “중국공산당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없게 됐다. 오직 있는 것은 수정주의 뿐”이라고 혹평했다.
  
  김정일의 보고내용을 전해들은 중국의 등소평(鄧小平)은 분노했다. 혁명 활동에서 비교상대도 되지 않는 김정일이 자신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켰기 때문이었다. 등소평은 수차례에 걸쳐 경직된 북한의 경제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일례로 1993년 5월 30일 등소평은 산동성 청도에서 북한의 강성산 총리와 가진 회담에서 “북한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7, 8년 후에는 남한에 흡수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등소평은 또 “경제가 파탄나면 공산당은 집권할 자격이 없다”며 북한에 대해 개혁·개방을 권유했다.
  
  등소평의 충고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장례의식 조문사절로 장관근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보내 상주(喪主)인 김정일에게 경제개혁을 권고했다.
  
  이와 함께 등소평은 자신의 비서인 왕서림(王瑞林)을 북한에 보내 △경제발전과 국가건설 △조선반도의 비핵화 △휴전선에서의 군사 활동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대북정책 6개항을 김정일에게 전달했다.(1994년 7월22일자 홍콩신보)
  
  이 같은 중국 지도자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이 사회주의 왕조체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한 김정일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북한의 개방을 반대했다. 이와 관련, 노동신문은 1994년 11월1일자 보도에서 김정일의 논문을 소개하며 동구권사회주의의 붕괴를 비난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으로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아니고,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수정주의자들의 파산을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수정주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슴 아픈 곡절을 겪고 있지만, 과학성·진리성에 의해 반드시 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
  
  이처럼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한 개혁·개방을 말도 안 되는 수정주의로 치부해버린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권좌에 앉아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채우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런 김정일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시작한 것이 ‘고난의 행군’이다. 이 운동은 아사지경에 빠진 북한 주민들의 동요를 막고 김정일 일인 독재체제 존속을 위한 대중동원 운동이다. '고난의 행군'은 성격상 경제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이다. 그러나 정치운동으로 피폐한 북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위기와 빈곤이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등소평은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 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경제를 살찌우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이다. 등소평주의자들은 모택동의 절대적 평등주의를 반대한다. 이유는 현대사회의 운영에는 조직의 관리자와 고도의 기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수입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했는지 북한은 2002년 7월 배급제 폐지, 물가·임금·환율의 현실화 및 기업의 자율권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경제 관리 개선조치를 추진했다. 김정일은 그러나 핵(核)을 부둥켜안고 경제회생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다. 북한 경제는 지금보다 더 심한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 2011-04-05, 21: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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