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교과서, 두 차례 北核실험 언급 없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北核문제 해설 한 단락 넘지 않아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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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核)실험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들 교과서는 북한의 핵개발을 ‘핵 개발 의혹’으로 표현하는 등 왜곡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법문사 발행 교과서의 경우 북한 핵개발 문제에 대한 기술(記述)이 전무하다.
  
  6종 교과서 모두 북핵 문제에 대한 기술이 한 단락을 넘지 않는다.
  
  천재교육은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왜곡된 제목과 함께 “선군정치의 방침에 따라 북한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강성대국을 목표로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400페이지)”면서 선군정치와 핵개발을 옹호하는 듯한 서술을 했다.
  
  (주)미래엔컬쳐그룹의 경우 1980년대 이후 북한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합영법을 제정, 나진-선봉 자유무역을 설치했다고 밝힌 뒤, 그러나 “핵 개발 등 무력 도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가해져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389페이지)”고 서술했다.
  
  북한이 경제개혁을 시도했으나 미국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학사의 경우 ‘북한의 통일정책’을 소제목으로 “북한은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 설정하고 해외 세력을 포섭해 대대적인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 정책은 핵무기 개발 문제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326페이지)”면서 북핵 문제를 다뤘다.
  
  (주)삼화출판사의 경우 383페이지에서 ‘비핵화 공동 선언’(1992년)을 설명 한 뒤, “그러나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서 탈퇴하자, 한반도에도 다시 긴장이 감돌았다”면서 북핵실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비상교육이 발행한 교과서는 “핵 개발 의혹을 받아 오던 북한이 핵 확산 금지조약(NPT)을 전격적으로 탈퇴하자 남북관계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6년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국제 사회가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핵 위기에서 벗어나려 하였다(382페이지)”는 내용만 기술했다.
  
  북한 核개발의 실체
  
  강석주(姜錫柱)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2002년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
  
  이어 2006년과 2009년 북한은 플루토늄을 사용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했다.
  
  2010년 11월에는 미국의 핵(核)과학자인 헤커(Hecker) 박사를 초청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역사가 꽤 길고, 舊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북한은 핵물리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세워진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핵실험실이 있었다. 1964년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켜 ‘중국 핵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핵물리학자 왕감창(王淦昌) 등 중국의 주요 핵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다.
  
  1956년 연구소의 설립 이후 1990년 북한과 러시아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후 1960년대부터 북한은 핵물리학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핵물리학원을 설립해 핵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 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핵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영변 핵시설에 사용한 핵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핵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북한의 초기 핵 연구는 도상록(都相錄), 한인석(韓仁錫), 이승기(李升基) 등 월북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1903~1990)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다.
  
  한인석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현재 핵개발 핵심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 인력 3,000명,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9천여 명의 핵과학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핵물리학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핵물리학, 화학, 수학 등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외에도 평양고등물리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정말 핵무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핵무기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이다.
  
  원자로 기술과 핵무기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핵분열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핵무기는 짧은 시간에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핵무기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핵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수기식 계산으로 개략적인 계산을 하여 설계했으나 특이한 문제점은 없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원자로를 설계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핵계산 코드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핵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으며,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을 가지고도 핵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대다수 핵(核)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핵개발은 김정일 정권이 각종 합의를 위반하면서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것을 요구하는 위협이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총 13회에  걸쳐  ‘독재’라고 표현하였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記述이 가장 심한 좌편향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북한 체제를 ‘독재’라고 쓴 횟수는 3회에 불과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남한 정부(이승만ㆍ박정희 정부)를 총 9회 독재라고 표현했으나 북한 정권을 독재라고 칭한 횟수는 2회뿐이었다.
  
  
  
  
  ‘1ㆍ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 사건(1968)’,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1968)’, ‘美 EC-121機 피격 사건(1969)’, ‘8ㆍ15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陸英修 여사 피살 사건)(1974)’, ‘아웅산 폭탄 테러(1983)’, ‘KAL기 폭파(1987)’, ‘천안함 爆沈(폭침)(2010)’ 등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일곱 개 주요 도발사건의 교과서 本文(본문) 수록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교과서는 본문에서 위의 사건 중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천재교육)
  
  올해부터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부 검정에서 통과된 미래엔컬처그룹 발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92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6월 민주항쟁으로 통일운동이 활발해져,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 등이 북한을 방문하였지만 노태우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364페이지, ‘그 때 그 사건’에서 ‘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3선 개헌을 위한 의석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6ㆍ25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였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이었다. 좌익혐의자에 대한 대량학살은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천재교육 327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44페이지에는 프랑스 공산당원이던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反美(반미)선동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싣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에스파냐의 화가 피카소는 6·25전쟁 중 양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맨몸의 여성과 어린아이를 총과 칼로 공격하는 모습은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 있다. 6·25전쟁 중 북한 측은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행했고. 남한 측은 수복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처벌하였다. 점령과 수복의 과정에서 처벌과 보복이 자행되어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경남 거창, 충북 영동의 노근리, 황해도 신천 등지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344페이지)>
  
   (주)미래엔컬처그룹이 만들어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6󈽕 전쟁이 발발하다’란 제목의 글 시작에 ‘역사학자 김성칠, “역사 앞에서”’에서 따온 글을 올렸다. 첫 문장은 이렇다.
   <남의 장단에 놀아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42페이지)>
  
  
   <(제네바 정치협상 결렬) 이후 북측은 평화통일론을 앞세우며, 전후 복구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반면 남측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주력하였다.>
   천재교육이 올해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330 페이지 上記 기술은 문제가 있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공산당이 주동한 1946년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 ‘저항운동’이라고 美化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同格으로 취급,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위반하였다.
   이 교과서의 318페이지 제목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고 320 페이지는 ‘북한 정부의 수립’이다. 본문에선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로 되어 있다.
  
  천재교육에서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북한 핵문제’ 항목엔 놀랍게도 北이 2006년과 2009년에 핵실험을 두 번 했다는 기록이 없다. 책 뒤에 붙은 ‘역사 연표’에도 실려 있지 않다. 북한 정권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국제법을 위반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한 비핵화 선언을 깼고, 우라늄 농축방식의 핵개발을 새로 시작하였다는 사실들도 명시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상당한 진전을 보이다가 “새로 출범한 미국의 부시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로 지목하는 등 강경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한 뒤 곧 바로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서 동결하기로 한 원자로를 재가동시켰고… (중략) …북‧미 관계는 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갔다”고 기술하였다.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주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의 가동률도 크게 떨어졌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이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 획득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천재교육 400페이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誤導할 수 있는 記述이 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공수부대원들을 집단 학살범으로 왜곡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도록 추천하였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광주시민군 궐기문’을 실었는데 이 문장 속에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다.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는 문장은 사실과 다르다. 계엄당국은 ‘무차별 발포’를 명령한 적이 없다는 것이 5ㆍ18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확정되었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었을 때 국방부는 이 영화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영화사에 항의도, 국민들에게 진실도 알리지 않았다. 이 영화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을,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 친위대처럼 묘사해놓고는 ‘이 영화는 사실에 기초하였다’고 설명했다. 국방부가 방치한 이 왜곡된 영화가 이젠 교과서에까지 등장, 학생들에게 추천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재교육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6종 교과서 가운데 가장 많은 8명의 필진(교수, 교사)이 참여했다.
  
   5명의 교수출신 집필자 가운데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국사학과 교수,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임성모 연세대 사학과 교수 등 4명이 ‘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 서중석)의 연구위원 및 연구원이다. 이들 가운데 주진오, 박찬승 교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반대해온 학자이다.
  
   교사출신 집필진(총3명)으로는 경규칠(세화여고), 송옥란(신현고) 2명이 전교조 출신이다. 교수 출신 집필진 가운데 주진오 교수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근대화를 긍정한 ‘교과서포럼’(대표 박효종)의 대안교과서를 끊임없이 비판해온 인물이다.
  
  주)미래엔컬쳐그룹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6명으로 이 가운데 교수 출신이 2명, 교사 출신이 4명이다.
  
   교수출신 집필자인 한철호(韓哲昊) 동국대 교수와 김기승(金基承) 순천향대 교수는 2008년 10월8일 역사교육연구회 등 21개 단체와 함께 교과부의 좌(左)편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을 거부했던 학자들이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인 韓 교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분단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이제 겨우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정부와 한나라당은 1940년대 냉전시대의 산물인 좌·우편향을 얘기하고 있다”면서 “역사가 퇴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韓 교수는 2004년 10월27일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 교수 일천인 성명’에 참여했으며,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주도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 김기승(金基承) 교수와 함께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김기승 교수는 ‘한국근현대 사회사상사 연구-배성룡의 진보적 민족주의론’, ‘조소앙이 꿈꾼 세계-육성교에서 삼균주의까지’, ‘배성룡과 안광천의 국가건설 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0집’ 등 사회주의 계열 인물들을 주로 연구해왔다.
  
   4명의 교사출신 필진 가운데 김인기(등촌고, 고려대 사학과卒), 조왕호(대일고, 고려대 사학과卒)는 2006년 보수성향의 뉴라이트 진영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년)을 내놓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같은 시기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았다.
  
  지학사가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5명으로 교수출신이 1명, 교사출신이 4명이다.
  
   교수출신 집필자인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2000년 7월18일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 주도한 국보법 폐지 성명에 75개 대학 1472명의 교수들과 함께 서명했다.
  
   민교협은 좌파성향 교수들의 협의체로 ‘국보법폐지국민연대’, ‘민중연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등 좌파 단체와 연대해왔다.
  
   단체는 2002년 5월30일 250개 단체 공동성명에서 김정일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해 온 한총련, 범민련에 대해 “애국애족과 조국통일의 한길에서 한 결 같이 걸어온”,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치하를 해도 모자랄 판”, “일신의 안락을 마다하고 오직 조국사랑과 민족사랑에 의거하여 한발 한발 걷고 있는” 운운하며 합법화를 주장했다.
  
   정 교수는 현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으로 2005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과정에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그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등 교수 3단체가 주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 파기 촉구 성명에 1008명의 교수 및 연구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지학사의 교사 출신 필진 4명 가운데 장종근(경기교) 교사는 전교조 회원이며, 오창훈(반포고) 교사는 교총 출신이다. 나머지 교사들의 교원단체 가입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 비상교육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7명으로 교수 출신이 1명, 교사 출신이 6명이다.
  
   교수출신 필진으로 현대사 부분 집필에 참여한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교과부의 좌(左)편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을 거부해온 학자다. 그는 2008년 11월11일 역사학자 676명이 참여한 ‘전국 및 해외 역사학자 선언문’의 서명 및 모금 운동을 주도했다.
  
   교과부의 수정권고 조치에 대해 선언문은 “교과부의 수정 권고는 정부가 원하는 오직 한 가지 역사만 서술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헌법적 가치인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도 교수는 고은(시인), 백기완(사회주의자),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등과 함께 남로당 수괴(首魁)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편집위원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강정구(前 동국대 교수), 이종석(前 통일부장관)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비상교육 교과서의 경우 6명의 교사출신 집필자 가운데 2명이 교총출신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교사 출신 필진의 교원단체 가입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올해 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다수의 좌파(左派)성향 교수 및 전교조 출신 교사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교과서 가운데 법문사와 삼화출판사 발간의 역사 교과서에는 민중(民衆)사관 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금성출판사)의 필진으로 참여했던 2명의 교사가 포함됐다.
  
   ■(주)삼화출판사가 발행한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6명의 일선교사로 이 가운데 5명이 전교조 및 전교조의 연대 단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이하 '전역모') 회원이다.
  
   구체적으로 박중현(양재고, 전역모), 박범희(중앙고, 전역모), 김쌍규(잠실고), 정행렬(도봉고)은 전교조 회원이며, 이인석(문정고)은 전역모 회원이다.
  
   이 가운데 이인석은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집필에도 참여했다.
  
   전역모는 전교조의 전신(前身)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시기와 비슷한 1988년 ‘역사교육을위한교사모임’으로 창립되어 199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전역모는 현재 2천여 명(전체 역사교사의 1/3)의 역사교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거대 조직이다.
  
  
  북한 인권 문제를 기술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가장 왜곡(歪曲)이 심한 것은 천재교육이다.
  
   문제의 교과서는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400페이지)’라는 왜곡(歪曲)된 제목과 함께 북한의 기아와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단지 “1990년대 중반 북한은 극심한 자연재해,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였다.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 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면서 북한의 기아문제를 자연 재해 등 외부 요인 탓으로 돌렸다.
  
   반면 북핵(北核)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강성 대국을 목표로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나섰으며,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국력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핵개발과 군사력 증강을 옹호하는 듯 한 서술을 했다.
  
   천재교육은 또 ‘단원탐구’(402페이지)에서 남북한의 인권차이를 설명하면서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의 ‘남북한 인권에서 코리아 인권으로’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남북한 사이에는 인권관의 차이가 있다. 첫째, 인권을 대하는 관점에서 남한은 보편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북한은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둘째, 남한은 개인주의적 인권관을 갖는데 비해 북한은 집단주의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셋째, 남한이 시민 정치적 권리를 중시하는데 비해 북한은 사회 경제적 권리를 중시하고 있다.”
  
   서보혁(現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이대 연구교수)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은 '북한인권법안'에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및 국보법 폐지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서 씨는 2009년 4월 ‘한나라당 북한인권법안: 문제점과 대안 모색’이란 제목의 논평을 통해 “북한인권법안이 북한인권 개선에 기여한다는 취지를 바탕으로 정부와 민간의 북한인권 개선 노력을 구체화하고 있지만, 구체적 사항을 보면 정부의 기존 관련 정책을 재구성하거나 신규 사업의 경우 정책의 경직성과 북한의 반발을 살 것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인권법안은 결국 민간단체의 북한인권개선운동 지원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동 법안 제14조 민간단체의 비정치성,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면서 “최근 대북 삐라살포에서 보듯이 자칫하면 법안의 취지와 달리 남북갈등, 국내여론 분열만 초래하고 북한인권 개선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2010년 10월20일자 참여연대 칼럼(제목: 천안함 사태 이후 한반도 정세)을 통해 “한국 정부가 발표한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의혹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서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군사적, 심리적, 외교적 방법을 총동원하여 대북 제재에 나섰다”면서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爆沈)을 부정하는 듯 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남한정부의 남북 합의 이행 무시와 북한의 선(先)핵포기 요구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천안함 사태로 최악의 상태를 지내고 있다. 이제 출구 전략을 찾을 때이나, 명분과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지 않고 있는 형국”이라며 시종일관(始終一貫) 북한을 옹호하며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또 2007년 10월17일 코리아연구원 주최로 열린 ‘차기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및 사회통합정책 방향’ 포럼에 참석 남북경제공동체 수립, 남북한 군비통제, 남북연합단계 준비를 골자로 하는 통일 정책과 비핵화 평화체제 수립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서 씨는 “안보에서는 국제질서와 남북관계의 변화 등을 고려해 한미군사동맹 위주에서 다자안보협력으로 확대하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이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개폐, 합동 군사연습 중단, 주한미군의 동북아 기동군으로의 변경 움직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평화외교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정책 효과를 제고하고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공고화와 연결 짓기 위해 국보법 개폐, 징병제 운영의 투명성 강화 및 복무기간 단축 등의 병역제도 개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발맞춰 모병제로의 전환을 준비할 것”등을 주장했다.
  
   국보법 폐지론자인 서 씨는 200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 60년 각계 선언’(총 6728명 서명)에서 학계인사(민교협/교수노조)자격으로 국보법 폐지에 서명했다.
  
   천재교육은 또 ‘단원탐구’(402페이지)에서 ‘역사문제연구소’ 기획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를 인용, 아래와 같이 북한 인권 문제의 본질을 흐려 놓고 있다.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식 인권의 주요 특성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물질적 보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인권을 설명할 때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 신앙의 자유, 거주 여행의 자유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보다 완전 고용, 무상 치료, 무상 교육, 무상 주택, 의식주 보장, 문화시설 보장, 남녀평등 등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강조한다. 인민의 물질적 기초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가진 자들의 자유와 권리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위 책의 저자인 김성보(충북대 사학과 교수), 기광서(조선대 정외과 교수), 이신철(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은 모두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연구위원,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신철은 천재교육 역사 교과서 집필진이다. 주요 저서로는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우리 역사를 의심한다’ 등이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강만길, 임헌영, 박원순, 이종석 등의 친북인사들이 각각 고문, 운영위원, 감사, 연구위원 등으로 참여하고 있는 단체다. 이들 가운데 임헌영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등 수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남민전은 남한 내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戰線)기’를 제작하고, 공작금을 마련키 위해 ‘혜성대(彗星隊)’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벌집 강도 등을 하기도 했다. 임씨는 1983년까지 복역한 후 대통령 특사로 출소,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와 함께 박원순은 2008년 2월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고문 실태에 대해 “정보가 제한돼 있어서, 워낙 폐쇄적인 국가라 알 수 없다”고 했던 인물이다.
  
   변호사 출신인 박원순은 ‘국가보안법1·2·3’ 등의 저서를 통해 국보법 폐지와 좌파적 역사관 확산에 앞장서왔으며, 2000년 이후 줄곧 ‘아름다운재단’(이사장 박상증 참여연대 공동대표)의 총괄상임이사로 활동하며 친북-좌파단체를 후원해왔다.
  
   올해 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 역사 교과서는 전체 6종의 교과서 가운데 4종의 교과서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누락시켰다.
  
   다만 (주)미래엔컬처그룹이 펴낸 교과서에 북한의 식량난, 인권실태에 대한 서술(敍述)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 교과서도 정치범 수용소 등의 인권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생존을 위한 북한 이탈 주민 문제"라며 논점을 흐렸다.
  
  
  
  
  
  
  
  
  
  
  
  
  교과서 쿠데타: 엽기적인 現代史 왜곡 !
  
  국가 檢定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분석 보고
  
  
  
  “李明博 대통령은 정부가 反헌법적 교과서로 亡國的 교육을 시키고 있는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상당수 교과서의 왜곡, 편향, 날조는 반역 수준이다. 대한민국 세력(국가-국군-미군-건국대통령-건설대통령)에겐 反感을, 從北세력에겐 好感을, 김일성-김정일에겐 동정심을 가르치는 국가 檢定 교과서로 배운 미래 세대는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趙甲濟(조갑제닷컴)
  
   李明博 정부 新刊 교과서의 現代史 왜곡은 거의 반역 수준!
  
   작년에 교과부가 검정해주고 올해부터 선택 과목으로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種 중 천재교육과 미래엔컬처그룹(舊 대한교과서) 교과서의 한국 현대사 記述(기술)은 거의 반역 수준이다. 온갖 궤변과 조작과 왜곡으로,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가꾸어온 세력을 일방적으로 비방하면서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을 감싸고 선전한다. 이런 교과서로 현대사를 배운 학생들은 애국심, 정의감, 그리고 진실을 잃게 될 것이다. 李明博 정부는 국민세금을 들여 공무원들을 시켜서 反국가적 교과서로 亡國的 교육을 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교과서가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한 조사 및 수사가 있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천재교육에서 간행한 ‘고등학교 한국사’는 韓國戰(한국전)에서 일어난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轉嫁(전가)하였다.
   <6ㆍ25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였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이었다. 좌익혐의자에 대한 대량학살은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천재교육 327페이지)>
   이 대목은 거짓이고 왜곡이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보도연맹원들이 아니고, 기습당한 국민이고 국군이었다. 6월28일 서울에 들어온 북한 공산군은 숨어 있던 좌익들의 협조를 받아 경찰ㆍ군인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부상당하여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국군 장병들을 집단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후퇴하던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는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自衛的
  6·25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국군부상병·민간인들을 기리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
   (자위적)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서울대병원 영안실 옆 언덕배기에는 碑(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1963년 6월20일에 건립된 ‘이름 모를 自由戰士)의 碑’의 碑文(비문)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50년 6월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國防部(국방부)가 편찬한 韓國戰爭史(한국전쟁사) 제1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서울대학병원에는 100여명의 我軍(아군)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1개 소대의 아군 경비원들이 병원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敵(적)이 시내로 들어오자 이들은 뒷산으로 올라가서 敵을 저지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고 한다. 지휘관은 중령이라고 하는데 누구인지 지금까지 알 길이 없다. 敵兵(적병)들은 병실에 마구 난입하여 부상 환자들에게 따발총으로 난사하는 蠻行(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가운데는 시민들도 끼어 있었는데 구별조차 하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는 것은 天人共怒(천인공노)할 노릇이다.〉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당한 것은 북한군의 南侵에 근원적인 책임이 있고, 공산군과 남한 좌익들이 軍警 가족과 부상병을 학살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교과서는 인민군 治下에서 일어난 良民학살이 國軍의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북한군의 만행을 두둔하였다. 국방부가 국군을 욕보이는 이런 記述에 대하여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自衛의지가 없는 집단이란 생각마저 든다.
  
   공산당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로 美化한 교과서
  
   한국은 단일 민족이 오랫동안 모듬살이를 한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 많이 있었던 종교 분쟁, 종족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 同族(동족)끼리의 대규모 학살은 2000년간 한 번도 없었다. 1946년 10월1일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공산 폭동은 일단의 한국인이 계급적 증오심을 품고서 다른 한국인을 학살한 최초의 사건이다. 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4 페이지 ‘남과 북의 체제 정비’란 小제목하에서 이렇게 썼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대구 10월 폭동을 봉기로 묘사한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刊)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10월 폭동’(또는 ‘대구 폭동’)으로 통용되던 단어를 ‘10월 봉기’ 및 ‘농민 저항운동’으로 바꿨다. ‘폭동’을 ‘봉기’, ‘저항’으로 바꾸면서 폭동 주동자인 공산주의자들을 기록에서 빼버렸다. 민족반역적 惡行을 덮는 정도가 아니라 美化하였다. ‘봉기’와 ‘저항’이란 낱말을 결합시키면 민중이 不義(불의)를 참지 못하고 용감하게 들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교과서는, 공산당이 주동한 폭동이란 사실뿐 아니라 경찰관과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을 묵살하였다.
  
   사실은 이렇다
  
   공산당의 선동에 속아 넘어가 10월 폭동(대구 폭동)에 가담하였던 학생의 증언을 소개한다.
   김계철(金桂澈)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월북,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 1994년 44년 만에 귀향한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특별하게 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金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金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잠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日給制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하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흰 가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이용한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극렬세력은 同族을 상대로 한 살육의 祭典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 식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加虐(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해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 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사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 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 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 50년’).”
   이날 10월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 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全身(전신)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1946년 10월13일자).>
  
   실패한 北 토지 개혁은 성공한 것처럼, 성공한 남한은 비판적으로
  
  <미군정은 쌀 공출제를 폐지하여 곡물의 자유 시장제를 실시하고, 소작료를 3분의 1로 낮춘 3.1제를 채택하여 농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은 토지 개혁, 소작료 추가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중략) 38도선 이북에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전신이었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광복 당시 남북에서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였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천재교육 314페이지)>
   올해 새로 발간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천재교육 교과서 이외에도 거의가 남북한의 토지‧농지 개혁 문제와 관련해 실패한 북한의 토지 개혁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 성공적인 남한의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비판적인 논조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토지 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이므로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 집필자가 토지 私有制(사유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높게 평가할 순 없다.
   1946년에 남한보다 한발 앞서 실시한 북한의 토지 개혁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私的(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즉 토지를 국가나 협동조합의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토지에 대한 私的(사적) 소유권을 인정한 남한의 개혁과 그것을 부인한 북한의 개혁을 비교하여,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으므로 북한의 개혁이 더 성공적이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도록 교육할 위험이 있다.
   북한 정권은 개인에게 주었던 경작권도 1950년대 말에 회수, 협동농장으로 일원화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떨어진 것이 1990년대 수백만의 떼죽음을 부른 원인이었다.
   반면 6ㆍ25 남침 직전에 단행된 李承晩의 농지개혁은 地主(지주)계급을 없앰으로써 민주화의 기틀을 만들었고, 地價(지가)증권은 산업자본의 씨앗으로 전환되었다. 세계적 성공사례를 비판하고, 세계적 실패 사례를 칭찬하는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
  
   김구, 김규식의 建國방해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美化
  
   올해 李明博 정부가 채택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김구, 김규식이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한 것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고 美化하였다. 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생각 열기>란 항목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김구, 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란 感傷的(감상적) 문장을 소개하면서 ‘김구, 김규식은 왜 남북협상에 나섰을까?’라고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 이 교과서는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사실을 소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평양회담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란 제목 하에서 記述(기술),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만난 것처럼 왜곡하였다. 네 金씨의 회동은 대한민국의 建國을 방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관하였다.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赤化를 위한 노력’이었다.
   李承晩의 建國(건국) 노선에 반대한 金九(김구), 金奎植(김규식)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建國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兩金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ㆍ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북한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공산당이 주동한 1946년의 10월 폭동을 ‘10월 봉기’, ‘저항운동’이라고 美化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을 同格으로 취급,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위반하였다.
   이 교과서의 318페이지 제목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고 320 페이지는 ‘북한 정부의 수립’이다. 본문에선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로 되어 있다.
   ‘북한 정부’란 말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語法이다. 우리 정부와 언론은 헌법정신에 따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북한 정부’라고 하지 않고 ‘북한 당국’ ‘북한 정권’이라고 쓴다. 정부는 국가를 의미한다. 당국과 정권은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과서는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불법 점거한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북한정권을 ‘정부’라고 호칭, 국가로 인정한 셈이다.
   한반도엔 정통성 있는 국가는 하나밖에 없다. 유엔도 建國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한 대한민국뿐이다. 이 교과서처럼 한반도 안에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영구 분단으로 가게 된다.
   이런 교과서로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이나 김정일 정권이나 똑 같은 자격을 가진 정부라고 가르친다면 정의감과 애국심의 기준 및 통일의지의 근거를 무너뜨리게 된다. 교과서를 심의한 李明博 정부측 인사들이, ‘북한정부의 수립’이란 反국가적 용어를 바로잡지 않은 것은 이른바 ‘중도실용’ 정신에 충실하였기 때문인가?
  
   대한민국을 ‘남측’이라 표현
  
   <(제네바 정치협상 결렬) 이후 북측은 평화통일론을 앞세우며, 전후 복구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반면 남측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주력하였다.>
   천재교육이 올해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330 페이지 上記 기술은 문제가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美 국무장관 사이에 서울에서 가조인되고, 1953년 10월1일 미국의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1954년 11월18일부터 발효되었다. 제네바 정치협상은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시작되었으므로 韓美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것은 그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다.
  
   교과서는 북한정권은 평화통일과 戰後 복구를 추진한 데 반하여 한국은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주력하였다고 대칭시킴으로써 학생들에게 김일성 정권은 긍정적인 일을 하고 李承晩 정부는 부정적인 일을 한 것처럼 그릇된 인상을 심을 가능성이 크다. 평화, 통일, 복구 같은 낱말과 동맹강화, 군사력 보강 같은 낱말이 주는 인상은 北에 유리할 것이다.
   이 교과서는 '북측' '남측'이라고 적었다. 이는 헌법정신 위반이다. 한반도엔 합법성과 정당성을 가진 민주공화국은 대한민국뿐이다. 북한정권은 대한민국 영토를 강점하고 남침전쟁을 일으킨 '反국가단체'이다.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과 북한정권을 同格으로 놓아선 안 된다. 특히 한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이 가진 정통성과 정체성을 헌법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과 反국가단체를 同格으로 놓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國格을 폄하하고 북한정권을 대한민국 수준으로 추켜주었다. 북한정권에 유리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일종의 利敵행위이다. 이 교과서는 建國 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북한 정부 수립'이란 표현을 써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 즉 국가가 두 개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북한 정권'이라고 해야 하는데 '정부'라고 호칭함으로써 집단을 국가로 승격시켜 준 것이다.
   역사적 영향력에 있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북한정권의 거짓 평화통일 전술과 대칭하여 설명할 수준이 아니다. 戰後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韓美동맹이란 울타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하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자유와 번영을 지켜주는 생명선이다. 韓美상호방위조약에 의한 韓美동맹 확보는, 李承晩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고, 민족사의 가장 성공적인 외교활동이다. 이 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李 대통령은 단독 北進論을 펴고, 1953년 6월18일에는 反共포로를 석방하여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압박하는 등 처절한 노력을 다하였다.
   이 교과서는 햇볕정책이란 利敵행위는 김대중의 이름을 들어 美化하고 韓美동맹 구축이란 偉業(위업)은 주인공 李承晩의 이름을 '남측'으로 대체하여 그 의미를 축소하였다.
   '김대중의 햇볕정책' 설명은 30줄이 넘고, '남측의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은 한 줄이다.
   민족사의 가장 큰 쾌거중 하나인 韓美동맹을 '남측'군사력 보강' 운운하면서 애써 그 의미를 흐리고, 폄하한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이나 대한민국 건설세력에 유리한 사건은 축소 내지 묵살하고 북한정권에 유리한 사건은 과장하고, 불리한 사건은 축소 내지 묵살하는 좌편향성을 일관성 있게 보인다. 문제는 '남측'이란 反헌법적 용어를 삭제하지 않고 검정해준 李明博 정부의 敎科部이다.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남측', 북한의 민족반역정권을 '북측'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정의감, 애국심, 통일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교과서들이 묵살한 김일성과 북한 정권의 恥部(치부)
  
   李明博 정부가 올해 채택, 고등학생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북한정권의 출범과정에서 일어났던 反민족적, 反민주적 사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을 소련 군대가 조종한 사실, 김일성이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결정된 사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사실, 북한 정권의 國號 및 헌법도 스탈린이 만들어준 사실 등을 교과서에 싣지 않는 것은 북한 정권의 反민족성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李承晩이 한 역할을 格下시키려고 애쓰면서 김일성이 한 못되고 못난 짓들은 덮어주었다.
  예컨대 아래 사실들이 한국사 교과서에서 거의 묵살되고 있다.
  
   1.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 기관지 기자 출신 하기와라 료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2.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 정부는,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 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미 국무부를 화나게 했었다.
   3. 냉전이 끝난 뒤 공개된 舊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지역에 '민주 정권', 즉 단독 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1945년 9월20일이었다. 스탈린은 그해 8월 초순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反蘇的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미국과의 대결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에서 공산 정권을 공고화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당국은 김일성을 시켜 북한에서 행정 조직과 군대를 만드는 등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 단독 정권 수립 방침에 따라 소련군은 군사관할 분계선에 불과한 38선을 사실상 국경선으로 만들어 한민족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시킨다. 남북 분단의 全的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이 져야 한다. 李承晩이 남한에서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스탈린의 分斷 결정 그 1년 뒤였다.
   4. 1945년 11월23일 신의주에선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소련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공산당 타도’ 시위를 벌이다가 보안군과 소련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23명이 죽고 700여 명이 다쳤으며 2000명이 체포되었다.
   5. 1945년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소련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 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산당 세력은, 民心을 거역하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6. 金學俊 前 동아일보 회장(前 서울대 교수)이 쓴 <북한의 역사>(1, 2권)는 東西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문서를 바탕으로 연구한 책이다.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일종의 면접시험을 치게 한 뒤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선택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이 책에 따르면 “스탈린은 우선 金과 朴에 대해 조선반도의 정세, 남조선의 정세, 북조선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시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레베제프는 이 경우에 대비해 이미 김을 ‘꼼꼼하게’ 준비시켰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한 뒤 예상되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미리 마련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金에게 특히 군사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특히 “군사 및 전략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완벽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라고 레베제프는 회상했다.
   박헌영의 통역을 맡았던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상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朴이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자신의 학생처럼 대하면서 강의하고 지시했다. 통역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군사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金을 감동시키면서 戰爭史(전쟁사)로부터 예들을 자주 인용했다. (…) 金은 진심에서 우러난 감격과 환희를 나타내며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들었다.” 레베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金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金은 열광적인 단어를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커다란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에 대하여 아부하였고, 박헌영은 깐깐한 자세였던 듯하다. 김일성은 생전에 黃長燁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하더라고 한다.
   한편 李承晩 대통령은 1954년 미국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국 측이 韓日 수교를 압박하자 "내가 살아 있는 한 수교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李 대통령은 그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국 대통령에게 호통친 한국 대통령과 소련 독재자에게 아부한 북한 지도자의 차이가 오늘의 남북한 차이이다.
   7.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 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 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5월 총선으로 구성된 制憲국회가 열띤 토론을 거친 끝에 만든 것이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가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북한 정권은 스탈린에 의하여 제조되었고, 대한민국은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출범하였다. 한국의 정통성은 民意에 의하여 탄생한 국가라는 점에 있고, 북한 정권의 이단성은 외국인 독재자에 의한 被造物(피조물)이란 데 있다.
  
   北이 불리할 때마다 兩非論 등장!
  
  
  남북한에 대해 양비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실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
  
  편향과 왜곡투성이 교과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불리한 사실은 이를 덮으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데, 덮기엔 너무나 무리가 많은 사안인 경우엔 대한민국과 미국을 끌고 들어가 兩非論(양비론)으로 흐려버린다.
   (주)미래엔컬처그룹이 만들어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6󈽕 전쟁이 발발하다’란 제목의 글 시작에 ‘역사학자 김성칠, “역사 앞에서”’에서 따온 글을 올렸다. 첫 문장은 이렇다.
   <남의 장단에 놀아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42페이지)>
   이 교과서는, 남침한 北과 남침당한 南이 도덕적으로 같다는 이 억지를 학생들에게 가장 강하게 기억시켜 주려는 편집방법을 취하였다. 도저히 변호할 수 없는 북한정권의 민족반역적 전쟁행위까지 兩非論(양비론)으로 비호한 것이다. 兩非論은 北이 불리해질 때마다 등장한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6󈽕 전쟁 이후 남북한 체제를 兩非論으로 다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北에 유리하다.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注: 서로에 대한 적개심)를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박정희가 반공을 내세워… 민간 차원의 다양한 평화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강경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혁명론을 바탕으로 무장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상황을 고조시켰다.(391페이지)>
   戰後 이승만 정부는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의회의 활발한 토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히틀러, 스탈린을 능가하는 전체주의 억압구조를 만들었다. 南은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은 권위주의 정권, 北은 사생활까지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권이었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두 정권은, 同格(동격)으로 비교할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정권을 同質로 분류한 것은 김일성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을 ‘이승만 수준’으로 美化해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박정희의 ‘강경한 對北정책’은 북한 정권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自衛策(자위책)이었다. 이 교과서는 거꾸로 박정희의 ‘강경한 對北정책’이 ‘북의 무장공비 남파 등 도발’을 부른 것처럼 썼다. 박정희가 김일성을 죽이기 위하여 특공대를 파견, 주석궁을 습격한 적이 있는가?
   이런 교과서로 현대사를 배운 학생들은 建國, 建設 대통령을 악마적인 김일성, 김정일과 같거나 못한 사람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反국가적 교과서가 李明博 정부下에서 검정을 통과하였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교과부 장관은 어린 영혼을 망치는 亡國的 교육을 국가 예산으로 시키고 있다. 용서 받지 못할 역사적 범죄이다.
  
   공산당원 피카소의 反美선전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 교과서에 실리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미래엔컬처그룹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44페이지에는 프랑스 공산당원이던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反美(반미)선동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싣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에스파냐의 화가 피카소는 6·25전쟁 중 양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맨몸의 여성과 어린아이를 총과 칼로 공격하는 모습은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 있다. 6·25전쟁 중 북한 측은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행했고. 남한 측은 수복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처벌하였다. 점령과 수복의 과정에서 처벌과 보복이 자행되어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경남 거창, 충북 영동의 노근리, 황해도 신천 등지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344페이지)>
   6ㆍ25 남침전쟁이 휴전될 무렵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클라크 장군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엔 이런 記述(기술)이 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정각 美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北의 남일 중장이 커다란 나무 건물 안(판문점 안에 있던 휴전협정 조인식이 이뤄진 건물을 뜻함)에 앉았다. 북한 공산군은 평화의 상징임을 선전하고자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으로 내부 전체를 꾸미려 했다. 나는 도쿄에서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해리슨 장군에게 전화해 “만약 공산당의 속임수를 상징하는 그림을 없애지 않는다면 저들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그렸다고 전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反美 선전에 악용했고 비평가들의 惡評(악평)도 뒤따랐다.
   2004년 4월18일~19일 일부 언론은 “2004년 6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비롯해 反戰·平和를 주제로 ‘평화국제예술전’을 열 것”이라고 보도했다(이 전시는 결국 열리지 않았으며, 피카소의 그림도 반입되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개입한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이 창작배경이란 설 때문에 反美 작품으로 찍혀 80년대까지 반입금지 예술품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2004년 4월19일, 중앙일보)
   국내 전시조차 하지 못했던 그림을 교과서에 넣고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李明博 정부의 의도가 궁금하다.
   이 교과서는 그림 설명에서도 북한군을 감싸고 국군과 미군을 비방하는 불균형을 보였다.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행한 학살을 ‘인민재판’이라고만 표현, 마치 적법한 재판을 거친 것처럼 誤導(오도)하였다. 양민 학살이 이뤄졌다는 地名(지명)에서도 북한군과 좌익들에 의한 학살지(서울대 병원, 대전형무소, 전라남도 등)는 제외하였다. ‘황해도 신천 대학살’이란 미군 및 국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북한정권이 창작한 거짓말인데 이것까지 소개하였다. 시각적 효과와 편향된 記述을 결합시켜 국군과 미군을 모함한 것이다.
  
   공산당원 피카소를 入國금지시킨 미국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入國(입국)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危害(위해)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는 소련 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피카소는 미국에 가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原爆 제조 금지를 설득하고, NATO 창립에 항의하며, 미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할리우드의 10인’을 체포한 데 항의하려고 入國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訪美(방미)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피카소는 1973년에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黨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카소는 화가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프랑코의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그보다 심한 스탈린의 독재엔 침묵하였다. 그는 1950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1962년엔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소련 당국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 정부의 피카소 入國금지 조치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國境이 없지만 예술인엔 國境이 있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육영수 암살 사건도 싣지 않아
  
   ‘1ㆍ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 사건(1968)’,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1968)’, ‘美 EC-121機 피격 사건(1969)’, ‘8ㆍ15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陸英修 여사 피살 사건)(1974)’, ‘아웅산 폭탄 테러(1983)’, ‘KAL기 폭파(1987)’, ‘천안함 爆沈(폭침)(2010)’ 등 북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일곱 개 주요 도발사건의 교과서 本文(본문) 수록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교과서는 본문에서 위의 사건 중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1ㆍ21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서는 짧은 설명과 함께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의 사진을 게재했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도 본문에 짧게 기술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편향성이 약한 지학사 교과서에는 1ㆍ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본문에 서술돼 있다. 지학사는 유일하게 아웅산 테러사건을 사진과 함께 본문에서 다뤘다. 비상교육은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대해 언급을 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북한 도발 사례를 “무장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상황을 고조시켰다”고 포괄적으로만 서술했다.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서해교전, 2009년 대청해전 등 북한이 원인을 제공한 海上(해상) 도발사례도 거의 수록되지 않았다. 2010년 3월26일 발생한 천안한 爆沈(폭침)사건에 대한 서술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6종 교과서의 검정 날짜가 2010년 7월30일이므로 저자의 의지가 있었다면 기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의 핵실험도 언급하지 않고 北核 다뤄
  
   천재교육에서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북한 핵문제’ 항목엔 놀랍게도 北이 2006년과 2009년에 핵실험을 두 번 했다는 기록이 없다. 책 뒤에 붙은 ‘역사 연표’에도 실려 있지 않다. 북한 정권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국제법을 위반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한 비핵화 선언을 깼고, 우라늄 농축방식의 핵개발을 새로 시작하였다는 사실들도 명시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상당한 진전을 보이다가 “새로 출범한 미국의 부시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로 지목하는 등 강경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한 뒤 곧 바로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서 동결하기로 한 원자로를 재가동시켰고… (중략) …북‧미 관계는 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갔다”고 기술하였다.
   北이 제네바 합의가 금지한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추진하다가 발각된 것과 두 차례 地下 핵실험을 한 것이 北核(북핵) 위기의 본질인데, 이 두 사건을 묵살하고 마치 부시의 강경정책이 위기의 원인인 것처럼 쓴 것이다.
   북한을 테러지원 국가로 맨 처음 지목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아니다. 1987년 11월29일 김정일의 지령으로 대한항공기를 폭파한 사건(115명 사망)이 김현희의 자백으로 드러나자 이듬 해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 국가 명단에 올린 것이다. 부시는 2001년 9ㆍ11 테러 후 이라크, 이란, 북한을 ‘惡의 축’이라고 표현하였을 뿐이다.
  
   햇볕정책 홍보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올해 채택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種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난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파격적인 紙面을 할애, 美化하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햇볕정책의 부정적인 면을 묵살하거나 축소하였다.
   교과서들은, 김대중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불법 對北송금 사건을 일으켜 4억5000만 달러를, 국민들을 속이고,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약 100억 달러에 이르는 對北 퍼주기를 하고도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한 사람도 송환받지 못한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北이 햇볕정책 기간에 西海에서 두 차례 군사적 도발을 한 사실도 쓰지 않았다. 북한 정권이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정부 시절에 있었던 발전에 대하여는 항상 꼬리를 달아 비판하던 교과서들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하여는 홍보문처럼 記述(기술)하였다. 교과서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대중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호 내지 편을 들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편집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이런 역사관은 학생들에게 비뚤어진 국가관과 도덕관을 심을 것이다.
  
   김정일에게 免罪符(면죄부)를 주려고 미국을 물고 들어가다!
  
  
  북한 식량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내용을 담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
  
  이승만, 박정희에 대하여는 잔인할 정도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김정일의 惡政(악정)에 대하여는 놀라울 정도로 너그럽다. 김정일의 최대 범죄인 1990년대의 집단 餓死(아사) 사태에 대하여 이 교과서는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준다.
   <홍수와 가뭄 등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주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의 가동률도 크게 떨어졌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이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 획득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천재교육 400페이지)>
   이 교과서는 북한 주민이 굶어죽는 상황의 책임을 자연재해, 동구공산권 붕괴,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에 돌린다. 이는 완벽한 거짓이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을 한 사람도 굶겨죽이지 않을 몇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장기집권의 유지를 위하여 이 수단을 쓰지 않음으로써 수백 만 명을 사실상 굶겨 죽인 것이다.
   1. 협동농장을 개혁, 중국처럼 개인에게 경작권을 나눠주었으면 식량 增産(증산)이 이뤄져 식량문제는 해결되었다.
   2. 核 및 미사일 개발 중지, 군사비 지출 감축, 김일성 屍身(시신)보존 금수산 기념궁전 축소만 하였어도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를 마련할 수 있었다.
   3. 김정일이 해외 비자금으로 관리하던 수십억 달러 중 매년 3억 달러만 식량수입에 썼더라도 餓死者(아사자) 발생을 막을 수 있었다.
   4. 떼죽음의 모든 책임은 김정일이 져야 한다. 미국의 경제봉쇄 등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 획득이 어려워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는 이 교과서의 책임 轉嫁(전가)는, 김정일도 웃을 왜곡이다.
   이 교과서의 필자는 대한민국을 만든 세력에 대하여는 왜 그토록 잔인하고 민족반역자이자 학살자인 김정일을 왜 그토록 동정하는가? 유대인들의 箴言集(잠언집)인 탈무드에 나오는 문장이 생각난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
   이 교과서가 억류된 국군포로, 납북자, 탈북자, 강제수용소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것은 잔인한 자를 숭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북한정권 선전 문구 같은 교과서 제목
  
   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의 現代史 부문 제목들을 보면 李承晩, 朴正熙 정부에 대한 비판과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호와 美化가 대조적이다.
   이 책은, 李承晩, 朴正熙 정부를 아래 제목으로 비판한다.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군사독재가 시작되다”
   “유신체제에 맞서다”
   이 책은, 김일성 김정일 정권을 아래 제목으로 비호하고 美化한다.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세우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
   建國 대통령과 建設 대통령을 ‘독재’라고 비판하려면 700만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은 ‘전체주의 체제’나 ‘학살 정권’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독재’란 낱말을 회피하고 ‘유일사상 체제’라고 美化하였다. 마치 김일성이 대단한 사상가나 되는 것처럼 糊塗(호도)한 것이다. 북한은 ‘유일사상 체제’가 아니라 ‘유일 독재 체제’이다. 이 책은 本文(본문)에선 드물게 북한정권을 ‘독재’라고 표기하였지만 제목이 읽는 이들의 판단을 크게 좌우하므로 제목에서 ‘독재’를 뺀 것은 편향적 편집이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제목은 김정일 정권도 민망해 할 선전문구이다. ‘개방’의 참뜻은 사람과 물건과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북한은 한 번도 그런 교류를 허용해본 적이 없다.
   책의 제목은 著者(저자)가 가진 가치판단 기준과 우선순위, 그리고 이념성향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위의 제목에서 우리는 저자가 대한민국 건설 세력에 대하여는 反感(반감)을, 대한민국의 敵(적)인 북한정권에 대하여는 好感이나 동정심을 가진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국방백서 내용을 날조
  
   미래엔컬처그룹(舊 대한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94페이지에 실려 있는 ‘탐구활동’의 내용이다.
   <다음 자료를 보고 모둠 활동을 해보자.
   자료1) 평화 비용과 분단 비용
   “한국 국방 예산 규모는 26조 6490억 원(국내 총생산의 2.7%)으로 세계 군비 지출 평균 보다 부담률이 높다.” -국방부, “2008 국방백서”-
   “1988년 남북이 대결을 지양하고 교류 문호를 개방한 이후 남한은 ‘평화 비용’ 3조 9800억 원을 지출한 반면, 155조 8800억 원의 ‘분단 비용’을 절약해 결과적으로 약 152조 원의 이익을 얻었다. 지정학적 리스크 감소, 사회․문화적 갈등 감소 등의 실제 부가 가치는 더 클 것이다.” -“통일 경제”, 2009년 제3호- >
   출처로 인용된 <2008 국방백서> 그 어디에서도 위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2008 국방백서>의 국방비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와 같이 직접적인 군사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군사적 대치국의 경우 ‘안보위협의 정도’에 비례하여 국방비 부담률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안보위협의 정도’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쟁·대치국에 비해 국방비가 낮은 비중으로 배분되고 있는 실정이다. 분쟁·대치국의 국방비 비율은【도표 8-6】과 같다.> (2008 국방백서, p.163~164)
   국방백서는 한국이 다른 분단-대치국에 비해 국방비가 낮다고 기술했는데, 교과서는 국방백서를 출처로 인용, ‘세계 군비 지출 평균보다 부담률이 높다’고 했다. 이 정도면 捏造(날조) 수준이다.
  
   황당한 계산법
  
   출처 ‘통일 경제’는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경제연구원이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보고서다. 그 중 위의 내용은 2009년 3월호인 ‘남북관계 평가와 개선과제-주요국 사례와 한국민의 의식 조사’에서 발췌된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평화비용’을 “정부의 남북협력기금을 통해 남북 경협 확대와 인도적 지원, 북한 SOC(사회간접자원) 개발 지원 등 한반도의 안보 불안 해소와 위기관리 차원에서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으로, ‘분단 비용’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의해서 발생하는 비용으로 국방비와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사회 문화적 갈등과 불안 심화 등”으로 정의하였다.
   분석에 사용된 ‘평화 비용’은 각 기간별 남북협력기금 지출 실적, ‘분단 비용’은 국방비의 수치였다. 이 기준에 따라 1989년 이후 ‘평화비용’ 즉 남북협력기금이 3조9800억 원 지출된 기간에 155조 8800억 원의 국방비가 ‘절약’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155조8800억 원의 국방비를 ‘절약’했다는 계산은 황당하다. ‘분단비용 절감’ 액수는 보고자의 의도에 맞추어 이렇게 계산되었다. 기준연도인 1988년도의 국방비가 GDP 대비 4%이니 그 후 이 비중을 밑도는 액수에서 소위 ‘평화 비용’을 뺀 액수는 모두 對北(대북)지원에 의한 ‘분단 비용 절감’으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국방비 총액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국방비 총액을 기준으로 하면 분단 비용은 늘 늘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정부재정과 GDP가 증가함으로써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줄고 총액은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결 시기’로 분류되고 있는 朴正熙(박정희)‧全斗煥(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위의 계산법으론 ‘분단비용’이 꾸준히 절감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2008 국방백서>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국방비가 국내총생산(GDP) 및 정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안보 및 사회여건에 따라 변화하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국방비는 국내총생산 대비 5%, 정부재정 대비 30% 수준을 점유하였다. 이는 율곡사업 등 197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우리 군의 자주적 전력증강 계획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예산이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사회복지 수요의 증가, IMF 금융위기 등에 따라 국방비의 하향 배분 현상이 지속되었다. 국방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국방비 배분 수준은 다소 개선되었다.> (2008 국방백서, p.163)
  
   "北에서도 공부 잘하면 좋은 학교 입학(?)"
  
   (주)삼화출판사 발행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381페이지 ‘문답으로 알아보는 북한의 교육제도’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북한의 교육목표는 헌법에 명시(제43조)된 것처럼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구현하여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혁명가로, 지덕체(智德體)를 갖춘 공산주의적 새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있다.
   김일성은 1977년 9월5일 노동당 중앙위 제5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이러한 교육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정책지침으로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를 내놓았다.
   이 테제에 의하면 북한의 교원은 “후대들을 혁명의 계승자, 공산주의자로 키우는 직업혁명가”로 규정되고 있으며 “모든 학생들이 개인주의-이기주의를 없애고 집단주의 원칙에 따라 사회와 인민의 이익, 당과 혁명의 과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도록 교양하여야 한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교육을 통해 북한 당국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학생들을 ‘혁명화, 노동 계급화, 공산주의화’하여 김일성 김정일 父子에게 무한 충성을 바치는 혁명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인민학교(현재 소학교)는 4년 동안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 시절’,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 어린 시절’을 비롯해 ‘공산주의 도덕’, ‘국어’, ‘수학’ 등 총12개 과목을 교육하고 있다. 고등중학교에서는 6년 동안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 활동’, ‘경애하는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 혁명 활동’, ‘당 정책’, ‘수학’ 등 총 23개 과목을 교육한다.
   북한 정권이 현대사회에선 無用(무용)하고 걸림돌만 되는 사상교육에 몰두, 국제경쟁력이 없는 사람들을 배출하고, 주민들을 無知한 상태로 묶어둠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폭압적인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생략하고, 북한 학생들도 한국 학생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개념 없는 記述(기술)이 대한민국 교과서에 등장, 한국 학생들이 북한 사정을 오판하게 만들고 있다.
  
   잘한 것은 ‘정부’, 못한 것은 ‘박정희’
  
   李明博 정부가 검정해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대체로 이승만, 박정희는 깎아내리고, 김대중은 추켜세우고, 김일성 김정일은 민족반역적-反인류적 범죄행위까지도 감싸주는 일관된 기술방침을 보인다. 김대중과 노무현에겐 好意的이고,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동정적이고, 이승만, 박정희, 국군, 미군에겐 敵對的이란 사실은 교과서 집필진이 가진 이념적 성향에서 나온 가치관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편향성이 높은 천재교육 발간 교과서의 경우, 박정희가 주도한 ‘한강의 기적’을 설명하면서 ‘박정희’란 이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결심하고 추진하였던 주요 정책의 주체는 ‘군사 정부’나 ‘정부’로만 표현된다. 학생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좋은 정보도 차단함으로써 그에 대한 好感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나 ‘한강의 기적’을 ‘박정희’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創製를 ‘세종대왕’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교과서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유발시켰다'고 기술한 뒤 정작 무역흑자로 돌아서게 한 1980년대의 全斗煥 정부 시절 경제에 대해선 부정적인 記述만 하고 있다. 全斗煥 정부 시절과 겹치는 1980년대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선 ‘정부’라고 하지 않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식으로 표기하였다.
  
   사진 분석: 군복에 굳은 얼굴 朴正熙, 웃으며 악수하는 金大中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사진. 박 대통령은 딱딱한 군복차림, 김 대통령은 밝게 웃는 모습이다.
  
   現 한국사 교과서로 수업을 듣게 되는 고등학생들은 1994~6년 사이에 출생해 2001~03년에 초등학교 입학, 2007~09년 중학교 입학을 거쳐 2010~11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청소년들이다. 학생들에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흑백 자료화면으로 접하게 되는 아득한 옛 이야기 쯤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나마 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학교의 역사 수업인 만큼, 교과서는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사진 등 視覺(시각) 자료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고등학교 한국사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사진 이미지는 어떨까.
   2011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미래엔컬처그룹, 지학사, 천재교육, 비상교육, 법문사, 삼화출판사에서 나온 6種이다. 분석대상이 된 사진과 삽화 자료의 수는 총 1195건이었다(같은 사진이 여러 번 등장할 경우 중복하여 수치를 잡았다. 한 사진 속에 두 인물이 나올 경우 각각의 수치에 포함했다. 수치는 사진 등장 횟수다.)
  
   *最多 박정희(17회), 最少 최규하(0회)
  
   대통령 10명 중 最多(최다)를 기록한 이는 17회의 朴正熙(박정희)이다. 미래엔 교과서를 제외한 5종 교과서에 등장했다(미래엔에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 의장 박정희’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으나 사진 속 얼굴의 확인 불가로 제외했다).
   이 중 7회가 5ㆍ16 군사혁명 당시의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5종 교과서에 모두 등장했으며, 두 번 씩 반복 등장한 경우(천재, 삼화)도 있어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유신관련 신문기사 내의 증명사진 5회, 서거 기사 속 증명사진 3회, 남한에 온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는 박정희(1972. 12. 1) 1회, 퇴역 당시 사진 1회이다.
   두 번째는 16회를 기록한 李承晩(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비상 교과서를 제외한 5종에 실렸다. 이 중 증명사진 형태 5회(자료 및 포스터에 사용됨), 김구와 손잡은 사진 3회, 신문기사 속 사진 3, 건국 취임선서 장면 2회, 귀국연설 1회, 웃는 얼굴 1,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사진 1회로 나타났다.
   3등은 13회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이다. 유일하게 6종 교과서에 모두 등장했다. 이 중 8회가 제1차 남북정상회담(비상 2회, 법문 2회)이었고,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이 3회, 대통령 취임식 장면이 2회였다.
   4등은 7회를 기록한 전두환 대통령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장면 2회, 육군대장 전역식 연설 1회, 야구장에서 始球(시구)하는 모습 1회, 囚衣(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 1회, 5공 청문회 장면 1회, 12ㆍ12사태 주역이었던 하나회 단체 사진 1회 등으로 나타났다.
   5등은 6회를 기록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6등은 5회 등장한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7등은 4회를 기록한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다.
   尹潽善(윤보선) 대통령은 3회,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은 2회 등장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사진은 없었다.
  
   *박정희 vs 김대중 이미지 비교
  
   등장한 사진의 이미지에서 큰 대조를 보이는 것은 박정희와 김대중이었다. 박정희의 경우 군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굳은 표정을 지은 사진이 7회였다. 신문 기사 속에 사용된 증명사진類도 8회인데, 내용 역시 비상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관련, 서거 등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를 주었다.
   이에 반해 김대중의 경우, 모든 사진이 김정일과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거나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과 대통령 취임식 사진으로 표정이 밝다. 사진 설명도 김대중에게 우호적이다.
   <이 회담에서 남북한은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비상교육 384페이지)>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 정책으로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시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았다. (천재교육 371페이지)>
  
   문익환, 임수경 처벌을 ‘탄압’이라 가르치는 교과서!
  
   1989년에 발생한 문익환, 임수경 不法 방북 사건은 남북한의 좌익세력이 배후에서 합작하여, 對南공작 차원에서 일으킨 것이다. 여대생 임수경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어 東베를린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행동을 하였다. 임수경은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2년 특별 가석방된 뒤, 1999년에 복권되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상임고문이던 문익환은 북한의 이른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정부의 허가 없이 1989년 3월25일부터 4월3일까지 북한에 들어가 위원장 허담과 회담, 연방제(적화)통일, 팀스피리트 훈련 반대에 합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문익환은 국가보안법상의 지령수수, 잠입, 탈출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6일 사면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89년은 직선제로 당선된 盧泰愚 대통령 시절이다. 그런데 올해부터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부 검정에서 통과된 미래엔컬처그룹 발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92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6월 민주항쟁으로 통일운동이 활발해져, 문익환 목사와 대학생 임수경 등이 북한을 방문하였지만 노태우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이 교과서는 문익환과 임수경의 북한 방문이 不法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 합법적 북한 방문인데도 정부가 탄압한 것처럼 오해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생략이 아닌가 의심케 한다. 교과서는, 민주정부와 법원의 정당한 法治행위를 ‘탄압’이라고 표현하였다. 학생들이 국가보안법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려는 선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탄압’이란 용어는 임수경과 문익환에 대하여는 好感을,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에 대하여는 不信感을 심어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공동체의 敵과 내통한 자를 法에 따라 처벌하는 행위를 ‘탄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은 유지될 수 없다. 이 교과서의 목표는, 북한정권과 從北세력 편에 서서 대한민국의 안전망인 反共자유민주주의와 국가보안법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反국가적, 反헌법적 용어를 검정과정에서 통과시켜준 검정기관(교과부 등)과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필요하다.
  
   윤이상·이응로를 ‘평화 통일 운동가’로 美化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364페이지, ‘그 때 그 사건’에서 ‘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3선 개헌을 위한 의석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윤이상, 이응로는 ‘평화 운동가’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對南(대남)공작에 협력한 범법자들이었다. 윤이상은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에 의하여 ‘유럽의 북한 공작원’으로 분류되었고 북한정권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여 生前(생전)에(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이응로는 부인 박인경과 함께 동백림 사건뿐 아니라 1977년에 발생한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사건에도 북한공작원에 협조한 혐의가 있다. 2010년 11월 출간된 尹應烈(윤응렬) 장군(공군 前 작전사령관)의 회고록 <상처투성이의 영광>에서 필자는 흥미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윤씨는 駐佛공사로 재직하면서 이응로·박인경 부부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는, 파리로 돌아온 직후 중앙정보부 본부로부터 ‘李·朴 부부가 간첩 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亂數表(난수표)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베테랑 수사요원들과 함께 파리에 있는 李씨의 집으로 들어가 물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그것은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golois) 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고 한다. 尹 장군은 당시 中情 요원들이 난수표 뿐 아니라 세포조직 명단과 검거에 대비해 마련한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확보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교과서는 이러한 사실관계는 생략한 채 윤이상과 이응로가 무고하게 연루된 것처럼 적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과거사 위원회도 동백림 사건에 대해 “관련자들이 북한 공작원들과 접촉하면서 동베를린(50명) 및 북한 방문(12명), 北側(북측) 인사로부터의 금품수수(17명) 등을 통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맞다. 과장은 됐지만 조작은 아니다”라며 실체가 있는 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내용을 교과서는 아예 다루지 않았으며 정부가 일방적으로 조작한 것처럼 기술했다.
  
   反軍선동 영화 ‘화려한 휴가’를 추천한 韓國史 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誤導할 수 있는 記述이 있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공수부대원들을 집단 학살범으로 왜곡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도록 추천하였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광주시민군 궐기문’을 실었는데 이 문장 속에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다.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는 문장은 사실과 다르다. 계엄당국은 ‘무차별 발포’를 명령한 적이 없다는 것이 5ㆍ18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확정되었다. 2007년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었을 때 국방부는 이 영화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영화사에 항의도, 국민들에게 진실도 알리지 않았다. 이 영화는 진압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을,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 친위대처럼 묘사해놓고는 ‘이 영화는 사실에 기초하였다’고 설명했다. 국방부가 방치한 이 왜곡된 영화가 이젠 교과서에까지 등장, 학생들에게 추천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래엔컬처그룹 발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더 알아보기’로 反軍(반군), 反국가, 反美的인 영화와 소설과 검색어들을 추천하였다.
   추천된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反戰(반전) 소설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본질’을 조명하고, ‘전쟁을 조종하는 미국의 실체를 파헤쳤다’는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황석영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다섯 번 密入北(밀입북)을 하고 김일성을 일곱 번 만났으며, 북한으로부터 25만 달러를 받기도 했었다. 그는 김일성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일성은 을지문덕, 이순신, 세종대왕과 같은 위인. 나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大國(대국)인 중국혁명의 지도자 모택동보다도 훌륭한 점이 있으며 베트남의 호지명에 절대로 뒤지는 인물이 아닌 제3세계적 革命家(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1992년 ‘노둣돌’ 창간호 인터뷰, 이 글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
   추천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웰컴 투 동막골’은 한 마을에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이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되는데, 이 세 그룹이 하나가 되어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인터넷 검색 중 발견한 한 초등학생의 숙제 제출용 감상문을 소개한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중략)
   5. 있었던 일: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우연히 동막골에서 모두 만나게 되었다 같이 지내다보니까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군은 동막골을 적군기지로 오해하고 쳐들어간다. 그러자 국군, 인민군, 연합군은 힘을 합쳐 싸우기로 한다.
   6. 느낌: 역시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서로 힘을 합쳐 싸우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이 교과서가 추천한 ‘주요 검색어’는 좌편향적이다.
   <8단원: 냉전, 베를린 봉쇄, 빌리 브란트, 여운형, 제주도 4·3사건, 반민 특위, 대충자금, 천리마 운동. 9단원: 베트남 전쟁, 제3세계, 이한열, 전태일, 주체사상 (미래엔컬처그룹 350, 402페이지)>
   교과서가 추천한 위의 영화들을 보고, 위 단어들을 검색해 본 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성공한 독일 통일은 단점만 記述, 베트남 共産통일은 發展相 부각
  
   미래엔컬처그룹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는 8단원 349페이지 탐구활동 ‘각국 통일과 그에 따른 문제점’에서 베트남의 共産통일과 독일통일을 다루고 있다. 베트남은 1985년 이후,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등 개혁에 성공해 발전을 이룩했다는 식의 긍정적인 면을 서술한 반면, 독일 통일은 “서독의 자본과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흡수통일 방식이 내적 통일에 많은 문제점을 안겨주었다”고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는 편향된 기술을 한 뒤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통일 방안은 무엇이며 그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토론해 보자”라는 유도성 질문을 던진다.
   이 교과서는 독일통일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철 지난 통계를 제시한다.
   <동독 경제가 빨리 부흥되지 않고 20%에 가까운 높은 실업률이 지속…>이라는 주장은 낡은 것이다. 독일 통일 이후 신연방주(舊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2006년(19.2%)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2009년 현재 실업률은 13.0%). 1992년 이후 2004년까지 신연방주의 국내 총생산량(GDP)이 두 배 가까이 성장하여 1991년 독일 국내 총생산에서 7%에 불과하던 비중이 2008년에는 11.7%로 상승했다. 1인당 GDP는 서독지역의 35%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72%, 2008년에는 79%에 달했다.
   2010년 이코노미스트紙는 2009년 貿易수지 黑字가 가장 많은 나라가 독일이라고 밝혔다. 독일의 2009년 4월~2010년 3월 사이 무역흑자는 2072억 달러로서 2위인 러시아의 1388억 달러, 3위 중국의 1387억 달러를 앞섰다. 2010년 3월의 산업생산액은 1년 전에 비하여 8.6% 증가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것이었다. 실업률도 프랑스의 10%보다 낮은 7.8%였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1990년 이후부터 2009년까지 독일은 세계수출 1위 국가였다.
   반면, 베트남은 월맹에 의한 공산통일 이후 공산 전체주의 체제를 더욱 심화시켰고 과거 월남처럼 부패해졌다. 베트남 공산당은 국민의 私有재산을 말살했으며 언론·출판·결사·종교의 자유를 압살했다. 그들은 월남 정부의 부패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모방한 ‘도이모이’를 차용, 체제개혁에 착수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고 私有(사유)재산 소유와 자유기업 체제를 부분적으로 허락한다는 것이 골자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아득하고 공산당 一黨 독재체제도 변화가 없다. 300만 명의 人命(인명)을 희생시킨 베트남식 통일을 美化(미화)하고, 한 사람의 人命(인명) 손실 없이 통일한 독일식을 비판하는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자유통일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을까?
  
  (박스)
  
  두 교과서, ‘독재’를 南韓정부에 22회, 北정권에 5회 사용
  
  李承晩·朴正熙 정부엔 ‘장기집권’, ‘종신집권’이라 표현하며 김일성 부자엔 '세습독재' 표현 피하려고 애써.
  
  
  趙成豪(조갑제닷컴 기자)
  
  6種의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독재’라는 단어를 북한 전체주의 체제보다 민주화 과정을 밟아온 대한민국 역대 정권에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6종 교과서를 모두 살펴본 결과 남한에는 35회, 북한에는 21회 ‘독재’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총 13회에  걸쳐  ‘독재’라고 표현하였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記述이 가장 심한 좌편향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북한 체제를 ‘독재’라고 쓴 횟수는 3회에 불과했다. 北에 대하여는 “독자적 자주 노선을 추구하는 한편,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p.338)”고 한 데 대하여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야당과 반대세력을 억누르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였다(p.345)”,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과 반공을 내세워 장기집권을 추구한 독재 정권이었다(p.364)”고 기술한 식이다. 이 교과서는, 박정희 체제를 ‘영구집권’, ‘종신집권’ 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구집권을 꾀한 권위주의적인 유신체제(p.365)”,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실현시키고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하여 민주주의를 기만한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p.365)”라고 감정적으로 규정지었다. 북한 김일성ㆍ김정일 父子 세습 독재체제에는, ‘김정일, 권력을 계승하다(p.388)’,  ‘김정일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p.388)라고 썼다. 박정희를 '종신집권'이라고 하면서 김 父子에 대해선 '세습독재'란 말을 쓰지 않았다.
   대중문화에 대한 단속도 독재라는 말과 연결해 설명했다. “한편, 군사독재정권은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문화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방송에서는 반공 의식을 고취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하였다.”, “대중문화와 국민의 일상에 대한 통제와 억압 속에는 정권의 안정을 통해 장기 독재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p.385)
   천재교육 교과서는 남한 정부(이승만ㆍ박정희 정부)를 총 9회 독재라고 표현했으나 북한 정권을 독재라고 칭한 횟수는 2회뿐이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북한의 권력투쟁과 김일성 독재가 등장했다(p.333)”, “1인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였다(p.391)”고만 짧게 언급했다. 반면,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는 “야당과 언론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을 탄압하고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ㆍ기소하여~”라는 식의 비판적 서술이 主를 이뤘다. “(이승만 정부가)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p.330)”, “이승만 독재 하에서 진보혁신정당을 결성하여~(p.332)”, “(박정희 정부가)3선 개헌을 통해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p.362)”며 거의 예외 없이 ‘독재’라고 표현했다. '이는 김정일이 군 최고사령관이 될 수 있도록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p.400)라는 표현도 있었다.  
   (주)삼화출판사는 <북한에서 유일체제가 확립되다(p.378)>라는 章(장)에서 독재라는 표현보다 , ‘수령중심의 강력한 통치체제’, ‘우리식 사회주의’, ‘조선민족 제일주의’라는 북한 정권이 사용하는 용어를 더 많이 소개했다.
   지학사와 비상교육 교과서는 북한을 독재라고 규정한 횟수(지학사 7, 비상 5)가 남한을 독재라고 표현한 것(지학사 4, 비상 4)보다 많았다. 특히 지학사의 경우 북한 정권이 한국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저지른 아웅산 테러를 사진과 함께 실어 다른 교과서들과 차이를 보였다.
  
  (박스)
   “너 조선일보 보냐?”
   -高校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로 다시 만난 나의 歷史 선생
   李庚勳(조갑제닷컴 인턴기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필진과 관련된 기사를 읽던 중 낯익은 학교와 이름이 등장했다. 나의 母校와 내가 배웠던 敎師의 이름이었다.
   나는 2008년 12월 조갑제닷컴에 <手記/ 한 학생이 6년간 겪은 全敎組 교사들>이라는 제목의 手記를 쓴 적이 있다. 그 수기에 등장하는 全敎組(전교조) 교사 중 이번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에 대해 다시 정리하려고 한다. 나는 高校시절 1년 동안 그에게서 歷史계열 수업을 받았다.
   이 교사는 수업시간에 美國에 대한 뭔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놈, 미국놈”이라며 反美감정을 표출했다. 미군의 6·25 참전에 대한 감사는 온데 간데 없고, “미국놈들이 6·25때 얼마나 많은 양민을 학살한지 너희들은 알고 있니?”라는 이야길 되풀이 했다.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국놈, 미국놈’거리는 게 듣기 거북했지만, 학생이니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하루는 그날 수업의 진도를 다 나가 수업이 일찍 끝났다. 교사와 학생 모두 수업 종료 종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교사가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대충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선생님, 국가보안법 폐지하면 안 되는 거죠?”
   “폐지해도 되지 않을까?”
   “남북이 분단 중이고, 북한은 결코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데 왜 폐지를 해야 하나요?”
   “너 조선일보 보냐?”
   “아니요, 저 동아일보 보는데요?”
   이 교사는 나에게 “한겨레나 경향신문 봐라”고 하더니, 수업 종료 종이 치지도 않았는데도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가 ‘사상의 자유’, ‘남북관계’라는 美名(미명)이라도 내세울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답은 ‘조선일보 보냐?’였다.
   어느 날, 그는 수업에 들어오더니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학교로 올 때 학교 담당자와의 면접에서 담당자가 ‘전교조 소속이십니까?’라고 물었는데, 나는 ‘전교조가 아닙니다’ 라고 말해 합격되었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전교조라는 걸 속이는 것 자체가 떳떳해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전교조가 뭔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2006년 말, 母校의 正교사 중 53%가 전교조에 가입해, ‘전교조 비율 최고 학교’라고 보도됐다. 동창회와 재단 측에서는 염려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창회는 會報(회보)를 통해 “전교조가 학생들에게 편향된 이념을 가르치고 있다. 전교조 비율이 높은 학교에서는 명문대 진학률이 낮다. 교사들은 학생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써야 한다”는 요지로 글을 작성했다. 이 글을 읽은 母校의 전교조 分會는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다면서 ‘법적 대응’을 운운하기도 했다.
   이 교사는 회보에 실린 이 글을 읽고, 수업에 들어가 개탄하듯이 “우리(전교조)가 親北적 발언 좀 했다고 빨갱이는 아니다. 너희 학교 동창회 선배들 다 미친 새끼다. 다 죽여 버려야 된다”고 말을 했다.
   그의 발언이 쏟아진 교실에는 동창회 간부 아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 일로 동창회·학교 측과 學內 전교조 교사가 대립은 극에 달했다. 문제의 발언을 한 이 교사가 사과를 하는 선에서 양측의 대립이 수그러졌다고 한다. 그는 사과하고 나서도, 수업시간에 들어와서 못마땅하다는 듯 불만을 표출했다.
   하루는 이 敎師(교사)의 한국 근·현대사 수업을 듣는 친구와 함께 登校(등교)했다. 당시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성이 짙어 문제가 됐다. 나는 그에게 “근·현대사 할 만해? 거기 이상한 내용이랑 잘못된 내용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대뜸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뭐라고? 잘못된 거? 지들(旣成世代-기성세대)이 잘못해놓고, 지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교사는 수업시간에 들어오면 기성세대에 대한 저주를 쏟아 내곤 했었다. 교사가 내뱉은 ‘기성세대에 대한 저주’를 내 친구가 보고 배운 것이었다.
   2009년 어느 날, 高校동창을 만났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이 만났는데, 한 명은 대학생이고, 또다른 한 명은 군 복무 중이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미국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들이 미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군 복무 중인 친구에게 “너는 미국과 美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그는 “미군이 필요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나쁜 감정 없다”고 답했다.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나머지 한 명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 친구는 “미국 싫다”고 답했다.
   “왜 싫으냐?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그냥 싫다.”
   ‘미국이 그냥 싫다’고 답한 이 친구는 위에서 말한 문제의 교사를 담임으로 뒀었다. 담임이라는 자가 ‘미국놈, 미국놈’거리며 부정적인 것만 알려주는데, 그걸 듣고 미국을 좋게 생각할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2011-04-08, 13: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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