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한국사 교과서, 건국 初 美군정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
美군정의 불가항력적 경제정책 실패를 농민들의 불만과 결부시켜…미국의 경제지원은 記述하지 않아

趙成豪(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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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대한민국 건국 과정 관련 부분에는 미국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부분이 있다. 주로 미래엔컬처그룹과 천재교육 교과서에서 발견되었다.
  
  (1) “(8ㆍ15 광복 후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을 제시하고) 미군 사령관은 총독부의 행정 체제를 활용하여 점령정책을 시행했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P.324)
  (2) “美군정은 한국이 만든 모든 행정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임시정부 역시 정부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미래엔컬처그룹 P.327)
  (3) “美군정 시기 계속된 재정 적자와 과도한 화폐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1947년 말 물가는 2년 전에 비해 33배나 올랐다. 초기에 자유 시장 정책을 취했던 美군정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곡의 수집과 배급을 통제했지만 식량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P.329)
  (4) “美군정의 정책은 토지개혁, 소작료 추가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위기가 오자 美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천재교육 P.314)

  
  美군정 시기를 서술한 교과서의 내용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두 교과서는 美군정의 성취와 노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梁東安(양동안) 박사(現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사(2001)》에서 美군정의 기본목적을 “①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 준수를 보장하는 것 ②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정치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시키며 일본의 사회적ㆍ경제적ㆍ재정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③ 평화적 목적에 헌신할 건전한 한국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 ④ 지방자치의 실시를 촉진하고 한국이 유엔헌장에 천명된 원칙을 준수 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 국가로 재건되는 것을 촉진하는 것 (P.124)”이라고 적고 있다. 梁 박사는 “(美군정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을 유엔 회원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게 하려는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의 일환”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美군정의 기본취지는 新生(신생) 한국을 국제사회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3)과 (4)의 설명은 美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 실패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겹쳐있다. 해방 직후 일본 경제권에 종속돼 있던 남한경제가 일본이 물러가면서 물자와 자금의 순환구조가 깨져 버렸다. 1946년 남한의 제조업 생산액은 1939년에 비해 75%나 감소했다. 남북이 이념의 차이로 갈리면서 남한의 경제 고립도 가속화됐다. 일제가 건설한 공업시설이 북쪽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화학공업의 80% 이상과 발전량의 90% 이상이 북한에 분포했으며 남한은 농업지역이 대부분이었다. 공업시설은 방직업 정도가 主를 이뤘다. 분단으로 남한의 물자 흐름이 위축됐고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10배나 넘게 올랐다. 급속한 인플레이션에 당황한 美군정은 통화증대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생산력이 약화돼 租稅(조세) 걷을 형편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美군정의 통화 증대정책에는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4)는 미국이 쌀 수매제를 단행해 마치 남한의 식량을 착취해 농민들이 반발한 것처럼 서술했다. 쌀 수매제는 우리 식량을 착취하기 위해 벌인 것이 아니었다. 남한에서 빚어진 식량난은 1945년 10월 초 단행한 미곡의 自由市場(자유시장) 정책이 초래한 불가항력적 결과였다. 이 정책으로 米價(미가) 급등이 유발된 것은 사실이나, 자유주의 경제에 익숙하지 않아 발생한 부작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황한 美군정은 1946년 1월 농가의 잉여양곡을 비농가에 배급하는 ‘미곡수집령’을 실시했다. 先後(선후)관계상 美군정의 쌀 수매제로 인해 식량난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쌀 수매제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착수하기 위한 후속조치의 일부였던 셈이다. 미국은 남한 경제의 안정을 위해 점령지역구제계획(GARIORA)에 따라 자금을 1945~1948년 동안 총 4억 달러를 제공해 1947년부터는 경제가 안정되고 생산이 회복되었다. 이런 사실을 천재교육 교과서는 다루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美군정청이 최초로 농지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5ㆍ10 총선거 이전 美군정이 실시했던 토지 재분배 정책은 정부수립 이후 본격적인 농지개혁의 序幕(서막)이었고, 이승만 정부가 이를 추진해 성공시켰다.
  
  美군정이 한국인이 만든 행정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미래엔컬처그룹 교과서는 적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1945년 10월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자신의 고문단 11명을 남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김성수(후에 부통령), 여운형(建準 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앞서 9월16일 아놀드 장관은 일본인 경찰을 전원 해임하고 조선인 경찰을 신규채용 할 것이라는 계획도 발표했었다. 9월24일엔 군정청 후생국장에 이용설, 광공국장에 오정수를 임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남한 사람들의 美군정 참여도 이뤄졌다. 美군정청의 활동이 처음부터 남한 사람들의 민심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1)에서처럼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처벌에 처한다’는 고압적인 내용이 담긴 맥아더 포고령을 처음 접한 남한 사람들은 美軍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도 했었다.
  
  일부에서는 美군정청이 일본인 관료를 등용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한다. 교과서포럼이 펴낸 《한국 현대사의 허구와 진실(2005)》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美군정은 농지개혁이나 친일세력 청산 등 脫식민지 개혁과제에 대해 열의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 친일세력을 의도적으로 비호하거나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일부러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는데 미국이 적어도 초기에는 여러 가지로 준비 부족에 시달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美군정 당국이 일제시대 한국인 관리를 재등용 한 것은 일종의 ‘기능주의적’ 접근으로 보아야 한다.(P.49)>
  
  이 책은 “美군정은 스스로 가장 익숙한 사회운영 원리, 곧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남한통치에 도입했을 뿐이다. 미국의 생각에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더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美군정의 일부 정책 실패는 미국과 남한의 이질적인 인식차이로 빚어진 갈등이었다. (1)처럼 ‘점령 정책’을 실시하였다는 설명은 학생들에게 부정확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 2011-04-13, 15: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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