革命정부 최초의 공공차관 도입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6)/ 미국은 한국이 서독을 새로운 차관도입선으로 뚫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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怪商 아이젠버그의 등장
  
  제1차 경제개발 계획상의 1차 연도인 1962년의 남한 인구는 약 2500만 명. 당시의 인구증가율은 연 2.9%나 되었다. 1차 5개년 개발 계획이 끝나는 해인 1966년의 인구는 약 2920만 명으로 예상되었다. 5년간 인구가 420만 명이나 증가되어서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더구나 당시 실업률은 24%나 되었다. 혁명정부는 代(대) 잇기와 피붙이 의식이 강한 나라에서 가족계획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문제는 投資財源(투자재원)이었다. 1차 5개년 계획기간 중 투자할 액수는 3조 2145억 환인데 48.8%가 전기, 교통, 통신, 주택 등에 투입되고 광공업에 34%, 농림·수산업에 17.2%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투자재원의 약 4분의 1은 외자로 조달하기로 했다. 혁명 정부는 줄고만 있는 미국의 對韓(대한) 원조에만 매달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外債(외채)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자유당 정부는 1958년에 호남비료의 나주공장을 짓기로 하고 서독의 루르기社(사)와 건설계약을 맺었다. 착공은 했지만 국내재원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혁명정부는 金載圭(김재규) 준장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금을 과감히 방출하여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니 서독 정부와 기업인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김재규를 사장으로 추천한 이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었다. 정래혁은 3사단장 이종찬 장군 밑에서 참모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때 부관참모가 김재규였다. 정래혁은 호남비료 사장이 된 김재규가 순진하고 사심 없이 일을 잘했다고 기억한다.
  
  서독과 혁명정부를 끈끈하게 맺어준 사람은 유태인 사울 아이젠버그였다.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그 뒤안길에 등장하는 흥미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젠버그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97년 사망한 아이젠버그는 독일 출생의 유태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일본에서 돈벌이에 성공한 巨商(거상)이었다.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주로 수입품의 중계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 1959년에 도입된 서독 지멘스社의 전화교환기도 아이젠버그가 중계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 한국뿐 아니라 중남미, 동남아, 중동 등지에서도 많은 사업에 관여했다. 그는 주로 자금이 달리는 開途國(개도국)에 진출, 정부─기업─은행─건설회사 등을 서로 연결시켜주면서 자금도 마련해주고 사업도 성사시키는 ‘일괄 거래의 조정자’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의 2중 국적소지자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아이젠버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은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성장정책을 밀고 나갈 때였다. 아이젠버그는 주로 서독 차관을 많이 끌어와서 우리나라의 기간산업 건설에 연결시켜주고 많은 커미션 등 이문을 남겼다. 그가 ‘일괄거래’ 방식으로 엮어준 사업 목록은 한국기간산업총람으로 보일 정도이다.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인천 화전, 월성 원전 3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쌍용시멘트, 고려 시멘트, 동양시멘트, 한일시멘트, 일신제강, 유니온 셀로판, 피아트 자동차, 석탄공사의 채탄시설 현대화, 중앙선 전철화, 포항제철 증설 등등.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줄어들 때라 박정희 정권은 아이젠버그가 주선하는 차관이 이자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버그가 처음으로 서독 차관 도입을 중계한 것은 1961년 가을이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 서독의 관료들과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손을 써놓은 뒤 정 장관과 함께 차관도입 교섭차 1961년 11월13일 독일로 출발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장관을 안내하여 크루프, 지멘스, 하노버 조선소 등 서독의 유수한 회사들을 돌아보게 했다. 에르하르트 경제담당 부총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 아래 차관과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서독 정부의 장기차관과 민간투자를 합쳐 3750만 달러 상당의 마르크화를 1962년에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혁명정부 최초의 공공차관 도입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서독을 새로운 차관도입선으로 뚫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으로선 미국 측에 대하여 “당신네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꿔올 수 있다”는 과시를 한 셈이 되었다. 박정희 의장은 서독대사를 초청하여 酒宴(주연)을 베풀어 주면서 미국의 방해로 서독과 더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경제개발 계획의 성패를 좌우할 재원 조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박정희 의장은 1961년 여름에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된다. 1961년 9월 초였다. 千炳圭(천병규) 재무장관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IMF 연차총회에 참석하러 가기 며칠 전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 유원식 준장으로부터 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삼선교 부근에 있는 유원식의 집을 찾아가서 談笑(담소)를 하는데 유 준장이 이런 말을 꺼냈다.
  
  “경제개발을 하는 데는 외자동원도 어렵지만 내자가 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화교들이 숨겨가지고 있는 돈이 1000억 환은 된다고 합디다. 그 돈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숨통이 트일 터인데….”
  
  천병규는 그때 통화량이 2830억 환인데 아무리 화교들이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그렇게나 될까 하고 반신반의했다. 유원식은 자꾸 통화개혁 쪽으로 화제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경제개발에 투자할 내자를 동원하고 돈의 소재를 파악하여 富(부)의 偏在(편재)를 시정하는 목적으로서 통화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데 천병규는 너무 엄청난 발상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천 장관은 “이건 유 위원 생각이오, 아니면 박 의장 생각이오?”라고 물었다.
  
  “박 의장께서도 알고 있으니 내일 한번 만나보시오.”
  
  통화개혁 발상
  
  다음날 천병규 재무장관은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서 어제 유원식 최고위원과 나눈 이야기를 보고한 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회고록 《千馬草原(천마초원)에 놀다》).
  
  “통화개혁은 군사혁명보다도 더 가공할 파급효과를 전체 국민들에게 줄 것이니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통화개혁은 이미 기정사실이오. 박희범 교수에게 화폐개혁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이미 지시를 해두었소. 내년 3월 말에 단행할 계획이오.”
  
  천병규는 한국은행 창립 이래 도쿄 지점장, 오사카 지점장, 홍콩 지점장으로만 근무하면서 해외를 떠도느라고 1950년 9월의 긴급통화조치와 1953년 2월15일에 있었던 통화개혁을 경험하지 못했다.
  
  “저는 통화개혁을 체험해 본 적도 없고 그것에 대한 지식은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운 정도입니다.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은 미국 측에도 통보해놓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박 의장은 “미국 측에 알리면 그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천병규 장관은 “그렇다고 해도 한국은행 총재, 경제기획원장, 최고회의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그러면 보안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박 의장은 자신의 경제고문인 박희범 서울상대 교수의 안이 완성되면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해 보자면서 “천 장관도 연구를 해보시오”라고 했다. 천병규가 뒤에 알아보니 통화개혁 발상의 주인공은 유원식이었다. 유원식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이 발표된 7월 하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박정희 의장에게 통화개혁의 발상을 전달했다고 한다.
  
  內資(내자) 동원의 필요성과 함께 새 정부가 출범했으니 새 돈을 쓰도록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에 박 의장은 “한번 해 봅시다”라고 너무 쉽게 승낙해 버렸고, 그때부터 통화개혁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박 의장은 상공위원이던 유원식을 재경위원으로 옮겨주고 이 통화개혁 준비작업을 극비리에 추진하도록 했다. 비슷한 시기에 송요찬 내각수반에게도 이 계획이 알려졌다. 이 시점에서 통화개혁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이는 박 의장, 송 수반, 천 장관, 유원식 위원, 그리고 박희범 교수 등 5명이었다. 김종필 정보부장도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새 화폐를 어디에서 찍느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찍으면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높고 일본서 인쇄하면 편리하지만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이 역시 안심할 수 없다. 미국에서 찍으면 박 의장이 걱정하는 대로 미국 측에 알려질 테니 안 될 일이었다. 이래서 유럽에서 인쇄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천병규 장관은 빈으로 가서 제16차 IMF 총회에 참석한 뒤 서독으로 들어갔다. 인쇄기를 구입하는 척하면서 새 지폐를 인쇄할 공장을 찾아보았으나 통화개혁의 예정일인 1962년 3월까지 지폐 인쇄를 끝낼 만한 곳이 없었다.
  
  천 장관이 귀국한 뒤 10월 중순 최고회의 의장실에서 통화개혁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다섯 사람, 즉 박 의장·송요찬 수반·유원식 최고위원·천병규 장관, 그리고 박희범 서울 상대 교수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희범 교수는 그동안 연구했던 통화개혁안을 보고했다. 천병규 장관이 들어보니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한 조잡하고 쓸모가 없는 안이라는 판단이 섰다고 한다. 예컨대 화폐 교환을 은행이 아닌 洞會(동회)에서 하도록 구상하는 등 현실성이 없었다. 박희범 교수가 물러간 뒤 네 사람은 “박 교수 안으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박 교수에게는 ‘통화개혁은 안 하기로 했다’고 알려줌으로써 그를 통화개혁 팀에서 탈락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통화개혁 계획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천 재무장관이 실무준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천병규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이 金正濂(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이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1953년 2월15일에 단행되었던 통화개혁에 실무자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그 뒤 그는 재무부에 파견되어 이재국장으로 있던 중 4·19를 맞았다. 민주당 정부 시절엔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있다가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까다로운 여권수속과 자녀들의 전학문제를 해결하여 어렵게 뉴욕에 부임했다가 석 달 만에 5·16을 만났다. 혁명으로 불어닥친 인사 숙정태풍에 휩쓸린 김정렴은 뉴욕 사무소장직에서 해임당한 뒤 귀국 명령을 받았다.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것이 그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국은행으로 복귀한 그는 ‘인사부 소속 참사’란 직함을 가지고 아무 補職(보직)도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천병규 재무장관은 귀국 인사차 들른 김정렴에게 ‘정부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했으나 그는 펄쩍 뛰면서 다시는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 장관은 어떻게 하든지 김정렴을 통화개혁에 참여시켜야겠는데 그런 제의를 했다가 거절당하면 기밀만 누설되니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강제로 그런 일에 끌어들이자니 인정상 못할 짓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千 장관은 柳原植 준장을 찾아가 의논했다.
  
  “통화개혁을 실무적으로 성공시키려면 이 사람을 꼭 잡아야 합니다. 통화개혁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유능한 인재이므로 혁명정부에서 기용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싫다고 하니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柳原植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이름과 주소만 가르쳐주세요.”
  
  며칠 뒤 유원식은 천 장관에게 연락을 해왔다.
  
  “김정렴 씨를 모셔다놓았으니 만나려면 만나 보십시오.”
  
  김정렴은 중앙정보부 구내의 한 사무실에 있었다. 유원식은 그에게 통화개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경제개발에 대해서 연구를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천병규 장관도 시치미를 떼고 김정렴을 격려했지만 속으로는 ‘사람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인쇄소를 결정할 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회고록 《千馬草原(천마초원)에 놀다》).
[ 2011-04-20, 09: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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