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道·中立을 美化하는 교과서
高校 한국사 교과서 분석: 대한민국의 탄생을 中立化에 ‘실패’한 결과처럼 기술

金秀姸(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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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들은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결국 성사되지 못한 두 움직임을 교과서는 ‘실패’로 기술하면서 ‘통일’의 기회를 놓친 듯 아쉬워한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마치 중립화에 ‘실패’한 결과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광복 직후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되어 서술되고 있다. 右翼(우익), 左翼(좌익), 그리고 中道(중도)다.

 

‘우익’, ‘우익측’, ‘우익인사’, ‘우익세력’, ‘우파’는 反共․자유민주주의를 따랐던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지칭할 때 등장한다. 그 반대편인 사회주의자들은 ‘좌익’, ‘좌익 세력’, ‘좌파’, ‘공산당 세력’으로 불린다. ‘중도’는 양 쪽의 주장을 일부씩 수용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과거 6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국정)에는 ‘우익’, ‘좌익’, ‘중도’ 같은 구분 없이 ‘이승만 등의 정치 지도자들’, ‘여운형, 안재홍 등’,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 등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내용을 서술한 과거 국정교과서에 비해, 現 6종 교과서는 3인칭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사실 관계를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교과서가 兩非論(양비론)에 빠진 나머지 ‘中道(중도)’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익, 좌익, 중도, 이 세 주체가 격렬하게 대립한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의 내용에 잘 드러난다. 

 

교과서들은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을 추진한 中道 세력에 대해 호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총선거를 통한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에 대해 ‘민족 분단’, ‘민족(동족)상잔의 비극 초래’,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한 중도파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한다.

 

-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좌우 합작과 민족 통일을 중시하는 중도파 세력들은 이를 지지했고, 한국 독립당의 김구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고 하면서 적극 찬성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p.331)
- (총선거를 통한 남쪽 지역의 정부 수립에 대해) 반면, 김구가 이끄는 한국 독립당과 김규식 등의 중도파 세력들은 남쪽만의 선거는 민족 분단의 길이며, 장차 한민족이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벌이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p.332)
-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서울로 돌아온 후 총선거에 반대하면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남북 양쪽에서 추진하는 정부 수립 작업을 모두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래엔컬처그룹 p.332)

 

-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법문사 p.311)
8.15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은 좌우 합작 운동, 남북 협상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법문사 p.314)

 

- 김규식, 홍명희 등 중도파들은 민족 자주 연맹을 결성하고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 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주요한 정책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김구가 민족 자주 연맹 측의 주장을 수용하는 의견을 표명하자, 이후 남북 협상을 통한 통일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 분단 정부 수립과 동족상잔의 전쟁 발발을 우려한 김구와 김규식은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남북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천재교육 p.316)

 

- 김구 등은 이남에서 총선거를 거쳐 정부가 수립되면, 이북 역시 정부를 수립할 것이고, 이는 결국 남북 분단을 초래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를 막기 위해 김구, 김규식 등은 이북에 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 이른바 '남북 협상'을 제안하였다. (비상교육 p.315)

 

-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민족 자주 연맹의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가 함께 모여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제의하였다. (지학사 p.267)


이에 반해, 당시 치열했던 한국 좌우익 세력의 이념 대립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파 지도자들이 단독정부 노선을 취했던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미래엔 교과서가 ‘반공주의를 내세워’라고만 설명했을 뿐,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 등에 있어서 좌우익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실패했다는 간단한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남북 협상’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된 사실을 다룬 교과서 역시 비상교육과 지학사뿐이었다.

 

- 반공주의를 내세워 단독 정부 노선을 취했던 우익 측과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리의 급진적 해결을 추구했던 좌익 측은 좌우합작운동에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좌우 합작을 반대하는 공산 분자와 합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한국 민주당은 유상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면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산당의 박헌영은 토지의 유상 몰수는 지주를 위한 것이며, 입법 기구는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미래엔 p.331)

 

- 그러나 합작 7원칙 가운데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좌익과 우익은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고, 좌우 합작 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구성 이후에도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우 합작 운동은 미군정, 우익․좌익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립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법문사 p.310)
-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법문사 p.311)
- 8.15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은 좌우 합작 운동, 남북 협상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법문사 p.314)

 

- 그런데 좌우파는 각각 서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합작의 원칙을 발표하였고, 토지 개혁 문제나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천재교육 p.312)
- (남북 정치 회담 후 채택된 공동성명서에 대해) 이 성명은 이남의 단독 선거 추진 세력들에게 환영받기 힘들었으며, 유엔이나 미군정도 단독 선거 일정을 변경하거나 중지하지 않았다. (천재교육 p.316)

 

- 그러나 7원칙 중 신탁 통치 문제, 토지 개혁 문제,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좌익과 우익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게다가 당시 영향력이 컸던 김구와 이승만, 조선 공산당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합작 운동은 약화되었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우익을 옹호하였다. 게다가 운동을 이끌었던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을 통한 중도 통일 정부 수립 시도는 중단되었다. (비상교육 p.314)

-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회의에서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남북 협상은 당시 형성된 냉전 체제라는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 역시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북협상은 힘을 잃었다. (비상교육 p.315)

 

-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는 미소의 협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외 좌우 세력은 궁극적으로 통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였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몰고 오는 냉전의 파도를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지학사 p.264)

 

교과서가 中道에 치우쳐 있다는 증거가 하나 더 있다. 교과서의 광복 직후 및 6?전쟁 직후 부분에서 오스트리아를 바람직한 예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재교육과 삼화출판사 발간 한국사 교과서는 박스 처리해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좌우 합작’과 ‘중립화’로 분단을 피한 좋은 예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그러나 좌우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정치 세력이 참여하여 종전 직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모태로 연합국 점령 아래에서 10년간 통일된 행정 체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합국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1955년 5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고, 10월에는 4개국 점령군이 모두 철수하였다> (천재교육 p.312, '연합국의 분할 점령을 슬기롭게 극복한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종전 후 독일과 마찬가지로 연합국 4개국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다. 그러나 분단된 속에서도 모든 정당이 참여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후 좌우 진영의 인사가 포함된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고, 분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의 영세 중립화가 이상적 모델임을 깨달았다. 국민당과 사회당은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정치 강령으로 채택하였으나 냉전으로 전망은 밝지 않았다.
연합국은 오스트리아 독립을 위한 회담을 실시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로 제대로 진전되질 못하였다. 그러나 중립화를 내건 오스트리아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5년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 재건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을 계기로 연합국 점령군은 철수하고 통일된 독립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삼화출판사 p.333 <역사의 창>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피한 오스트리아)


위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당시 우리나라는 좌우합작으로 중립화되어 통일이 되었어야 하는데 좌우익의 무리한 대립으로 나뉘게 되어 지금까지 분단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한보다 앞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남북 협상’을 이용한 북한 측의 내용도 다뤄져 있지 않으니,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 등 대한민국 건국 세력인 ‘우익’과 소련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의 ‘좌익’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남한에서 좌우합작이 성공하고 그를 토대로 남북합작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통일정부에서는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좌익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부가 통치하는 한반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화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양 교수는, 좌우합작이 성공하여 통일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밝혔다.

 

또한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치열했던 이념 대립이 단지 ‘미․소의 협상’, ‘냉전의 파도’, ‘좌우의 대립과 냉전 체제의 심화’ 등의 양비론적 서술로 기술된 점 역시 지적되어야 할 문제다.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을 뿌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가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세력 연구>의 저자 남시욱은 저서에서, 당시 상호타협이 불가능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우익과 좌익 세력이 동거하는 연합 정권의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설사 일시적으로 좌우 연합 정권의 통일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 좋은 예가 박헌영이 수립한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의 실패다. 그런 연합정부가 탄생해 와해됐다고 한다면,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통일 이전의 중국 대륙이나 베트남 또는 예멘처럼 혁명과 內戰(내전)의 수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양동안 교수 역시 당시 한반도의 정치 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 중국의 공산화 등을 고려할 때, 5년 동안 신탁 통치를 거쳐 독립이 됐을 경우 한반도는 전체가 공산화되지 않았으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45~48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념 대립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대립 양상이 가장 첨예한 시기였다. 소련의 74년간(1917~1991년) 중 중간쯤에 해당하는 시기로,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청장년기였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들의 체제와 이념에 강력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국력에 있어서도 소련은 전성기였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 한반도 내의 좌우세력 간의 사상 대립 역시 치열했다. 교과서의 짧은 설명처럼, 단지 ‘합작 7원칙 가운데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련의 지원 아래 순조롭게 권력을 장악한 북한의 김일성 세력은 처음부터 타협을 모르는 스탈린주의자들이었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 노동당 세력 등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해방 직후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남한 지역에서 기선을 잡고 ‘사회주의 노선’을 건설하려고 투쟁하며 소련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이 같은 ‘좌익’에 대해 ‘우익’들은 경계심과 불신, 증오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타협이지 혁명세력과의 타협은 불가능했다. 여기에 중간파의 입지는 처음부터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으나 좌우세력으로부터 이용당했을 뿐이다. (<한국 보수세력 연구 p.285~6>)

 

또한,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한반도의 상황은 달랐다. 이에 대해 양동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오스트리아에 대해선 강대국들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바가 없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 5월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한 미, 소, 영, 불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이 아니라 점령 통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선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

 

2. 외국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세력들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한 번도 4개 외국 군대 점령지역별로 별개의 독립된 정치, 행정기관이 구성된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미소 양국 군대의 점령 지역 진입과 동시에 남북한에 별도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각 지역을 상이한 내용으로 통치했다.

 

3.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국 군대의 분할, 점령지역 간에 교통, 통신, 상거래가 단절되지 않았다. 각국 군대 간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지만 그 분계선은 군사 활동에 관한 경계선에 그치고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교통, 통신을 차단하여 북한 지역을 남한으로부터 분리함으로서 미소 양국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었다.

 

4. 오스트리아의 좌익 세력이 소련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취하고 좌우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유지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우익진영에 인민당(舊기독교사회당), 좌익 진영에 사회당(舊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존재했다. 오건 좌익 노선의 사회당은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黨勢(당세)를 유지하고 있어 좌익 진영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면서도 오스트리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은 절대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미, 소, 영, 불 4개 외국 군대에 대응함에 있어 우익 정당인 인민당과 확고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좌익 진영의 주도권을 소련에 맹종하는 극좌노선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우익 진영과의 협력을 외면하고 소련의 한반도 정책 실천에 협력하려고만 했다. 

 

남시욱의 <한국 보수세력 연구> 역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달랐던 환경을 지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미, 영, 불, 소, 4개 연합국 군대가 진주하기 3개월 전에 이미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인 칼 레너 박사가 수반이 되어 각파를 망라한 연합 정권인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구역으로 하는 행정을 실시했다. 즉, 오스트리아에는 미소 두 나라가 국토의 반씩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일성 같은 소련의 대행자나 박헌영 같이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볼셰비키도 없었다.” (p.286)

 

[ 2011-04-21, 00: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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