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경제 家庭교사 李秉喆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68)/ 두 사람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과 反共 태세 확립이란 大綱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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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家庭교사 李秉喆
  
  박정희는 혁명정부가 부정축재혐의로 구속했던 기업인들을 풀어주었고, 이들 13명은 한국경제인협회를 창립하여 경제인들의 對(대)정부 창구로 활동하면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 협회의 회장이 된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군사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전략에 우리가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실천해 보여 주자’고 결심했다고 한다(前 전경련 상근부회장 《金立三(김입삼) 회고록》).
  
  이때 기업인들은 쫓기는 기분이었다. 최고회의는 이들 기업인에게 부정축재에 따른 벌과금을 부과해놓고 있었다. 1961년 12월31일까지 이 벌과금을 내지 않으면 다시 구속하겠다고 했다. 이병철은 박정희 의장에게 호소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장을 건설하여 그 주식을 벌과금으로 代納(대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해주시면 우리 기업인들은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되고 정부 측에서도 기업인들이 과연 국가에 해를 끼쳤는가 이바지를 했는가 다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難色(난색)을 보였다. 이병철도 지지 않고 “필요하다면 국민들을 납득시키는 것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인들을 활용해야만 경제건설도 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湖巖自傳(호암자전)》).
  
  결국 박정희는 이병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병철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도 ‘부정축재자 처벌로써 제일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처벌통고를 받은 기업인이 아니고 국가와 국민대중이다. 1958년과 1959년에 GNP(국민총생산) 성장률이 평균 6.1%였던 것이 1960년과 1961년엔 2.3%, 2.8%로 내려갔다. 다시는 소급법을 제정하여 경제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업인들은 기간산업을 맡아서 건설하되 그 재원으로서 외자를 도입하는 길도 스스로 뚫기로 했다. 이들이 건설할 기간산업으로 정한 것은 시멘트, 비료, 전기, 제철, 화학섬유, 정유산업이었다. 洋灰(양회)공장은 雙龍(쌍용)의 전신인 금성방직이 맡기로 했다. 비료공장은 삼성과 삼호 및 조선 견직이, 전기는 대한제분이, 제철은 대한양회·극동해운·대한산업·동양 시멘트에서, 화섬공장 건설은 화신과 조선견직 및 한국유리가 단독 또는 합작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병철과 극동해운의 남궁련 사장은 거의 매일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서 경제인협회에서 만든 기간산업건설계획안을 설명하고 이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여건조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제철 공장 하나만 해도 이를 건설하는 데 1억 3000만 달러나 든다지 않습니까. 정부보유弗[달러]을 전부 투입해도 모자라는데”하면서 난색을 보였다. 이병철은 그럴 때마다 외자도입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박 의장을 설득했다. 달리 대안이 없던 박 의장은 기업인들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철과 남궁련은 박 의장의 허락을 받고 1961년 9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산업회의에 참석하여 외자유치 가능성을 탐색했다. 9월13일 한국경제인협회는 5개년 계획에 소요되는 민간외자도입 추진계획서를 마련해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9월18일엔 박 의장과 경제인협회 회장단이 ‘당면 경제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이란 회의를 가지고 외자 조달 방안을 논의했다. 이런 회의를 거쳐 협회가 마련한 것이 외자도입 촉진책이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개별기업의 교섭으로는 외자도입이 어려우므로 미국, 일본, 유럽 등 세 지역에 외자유치단을 파견한다(당시는 외국여행이 엄격한 허가사항이었다).
  
  2. 민간차관 도입 시 정부가 지불보증을 해줄 것.
  
  3. 민간경제외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해외공관에 상무관을 주재시켜 줄 것.
  
  4. 민간기업이 외국의 기술자와 기업가들을 자유롭게 초청하여 공장 건설 등을 협의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
  
  5. 외자에 의한 공장건설 시 내자를 최대한 융자해주는 동시에 後取(후취) 담보제도를 마련해줄 것.
  
  6. 외자도입에 의한 기계반입 시 가동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을 허용하고 그 판매 代錢(대전)으로 소요 내자를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해줄 것.
  
  7. 외국의 장기금융기관을 유치토록 할 것.
  
  8. 외자도입촉진법, 외환관리법, 이중과세방지조약 등을 추진해줄 것.
  
  박 의장은 외자도입을 하는 기업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순차적으로 법제화해 갔다.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수출입국 전략의 기초가 된 이 정부의 뒷받침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제도가 되었지만 동시에 政經(정경)유착을 胚胎(배태)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이병철 같은 기업인들은 혁명정부가 농업 우선의 균형성장 정책을 버리고 공업과 수출중심의 불균형성장정책을 택하도록 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병철은 박정희와 혁명정부 요인들에게 ‘후진성 탈피의 지름길은 공업화뿐이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경제개발은 더욱 늦어지고 빈곤과 혼란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병철은 1962년 초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요지의 주장을 했다.
  
  <우리는 영국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서 경제발전의 고전적 코스를 밟아 내려올 시간이 없다. 우리는 과감하게 그 순서를 바꾸어 공업화를 먼저하고 대기업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농촌을 구제하는 것은 과감한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외자도입은 미국을 주력으로 하고 배상금 문제를 주안점으로 하는 일본,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순으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重工政策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혁명정부 초기의 경제발전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던 李秉喆 삼성물산 사장은 1963년 초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重農(중농)정책이 아닌 重工(중공)정책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예언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1인당 국민소득을 앞으로 178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필리핀,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고 정부의 계획보다는 많다. 앞으로 10년간 21억~23억 달러의 외자도입이 성공하면 3년만 지나도 이미 건설한 공장에서는 수익이 나오게 된다. 그 수익을 매년 2억 달러로 본다면 이 자금을 민간사업에 재투자할 경우 10년간 15억~20억 달러에 해당하는 공장건설자금을 새로 확보하는 셈이 된다. 총 40억 달러의 투자로써 400만 달러 규모의 공장 1000개를 지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투자총액의 약 70%에 해당하는 28억 달러의 연간 생산증가가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1인당 100달러의 국민소득 증가는 무난히 달성될 것이다.
  
  이들 공장이 평균 500명씩 고용한다면 고용증가는 50만 명, 부양가족을 계산하면 250만 명, 하청 중소기업과 유통단계에서의 고용을 계산하면 약 500만 명의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숫자만큼 농촌인구를 공업에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즉, 1500만 농민의 3분의 1을 공업부문으로 흡수하면 1인당 경지면적 420평은 630평으로 늘어날 것이고 공업화에 따라 비료와 농기구를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에 부과하는 세금도 늘어나 공무원의 봉급도 배로 늘릴 수 있어 부정부패도 일소할 수 있게 되고 사회도 명랑하고 건전하게 될 것이다. 전 국민이 빈곤을 추방하여야만 반공체제를 확립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78달러 선을 넘게 되는 것은 이병철의 희망보다도 3년이 빠른 1969년이었다.
  
  이병철과 박정희는 출신배경이나 성격, 그리고 취향이 대조적이었다. 이병철은 富農(부농) 출신에 성격은 깔끔하고 엘리트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두 사람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과 反共(반공) 태세 확립이란 大綱(대강)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된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엘리트와 이병철로 대표되는 기업인들이 서로 호흡이 맞았던 이유에 대해서 김주인 당시 한국경제인연합회 사무국장은 “군인들의 조바심과 기업인들의 명예심이 맞아떨어진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측은 국민들에게 보여줄 공장건설 등 可視的(가시적)인 실적을 원했고 기업인들은 ‘부정축재자’란 불명예를 벗어던지기 위해서 하루빨리 기간산업을 건설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박정희는 뒷날 외무장관이 되는 李東元(이동원·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비서실장)에게 이런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실장, 아무래도 내가 쿠데타를 잘못한 것 같소. (정권을 잡고 나서야) 우리나라가 도둑맞은 초가집 꼴이란 것을 알았소. 광복 후 벌써 15년이나 흘렀소. 그간 뭐 제대로 해놓은 게 있소. 다들 썩어빠진 정치인 때문이오. 정권욕에 눈 멀고 입만 살아 벙긋하는 그 못난 놈들 때문이오. 내 무식하잖소. 그래서 유명하다는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에게 물어봤소. 어떻게 해야 우리도 잘 살 수 있냐고. 그들이 그럽디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란 것이오. 자원도, 기술도 없는…. 결국 경제발전의 조건을 못 갖추었다는 거였소. 이 실장, 정말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는 것이오?”
  
  박정희의 이런 답답한 심경이 아래로 전해질 때는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李秉喆의 회고에 의하면 혁명정부는 기업인들이 약속한 공장을 빨리 짓지 않는다고 ‘별도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까지 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한 기업인이 볏짚 펄프 공장을 짓겠다고 했는데 진척이 잘 되지 않자 혁명정부에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이 기업인이 겁에 질려 한국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을 다급하게 찾아왔다. 이 기업인은 ‘자금과 기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공장을 안 짓는다고 야단이다’고 호소했다. 李秉喆은 최고회의로 들어가서 차근차근하게 설명하여 납득을 시켜 이 기업인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金立三(김입삼) 전 전경련 부회장은 ‘기업인들이 외자도입을 통해서 공장을 건설키로 하면서도 세워질 공장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기업인들 가운데는 物慾(물욕)보다는 후손들에게 그런 汚名(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더 절박한 기분으로 외자도입, 기간산업 공장 건설에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김입삼은 “사람이란 묘한 것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리면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모양이다”라고 했다.
  
  李庭林(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은 延安(연안) 李 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6代祖(대조)는 士禍(사화)에 휘말려 고생을 했는데 유언이 “벼슬길은 단념하고 가게를 꾸미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정림은 개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당이 기업체마다 강제로 배당한 정치헌금을 냈다고 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상을 욕되게 했다’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짓기도 했다.
  
  이병철은 기업인들이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을 리드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간외자유치 교섭단을 결성했다. 1961년 11월 초순에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美洲(미주) 교섭단과 이정림을 단장으로 하는 歐洲(구주)지역 교섭단이 출국했다.
  
  이병철은 미국의 기업인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20억 달러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13억 달러는 외자로 조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臨海(임해)지역에 특별공업지역을 설치해야 투자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비료공장 건설을 宿願(숙원)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병철과 정유공장건설을 추진해왔던 극동해운의 남궁련은 이때 이미 울산을 공업지구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미국 기업인들은 이병철 일행을 인도하여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공업지구를 구경하도록 했다.
  
  대한양회 사장 이정림이 이끄는 구미지역 교섭단은 서독에서 크루프, 지멘스 등 대기업을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였다. 그 뒤 여섯 달 이내에 금성사, 한일시멘트, 쌍용 시멘트 등이 2500만 달러 규모의 서독차관을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본격적인 외자도입 시대가 열린 것이다.
  
  
  
  
  
   케네디─이케다 對話
  
   1961년 7월18일 미 CIA가 작성한 ‘한국에 대한 특별 정보 판단서’는 농촌에서 혁명 정부의 지지도가 높은 반면 지식층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강압적인 정책 때문에 이승만 정부보다도 나을 게 없다는 식의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또 ‘학생들이 주동이 된 봉기가 일어나도 군사 정권은 신속하게 폭력적으로 이를 진압하고 탄압을 가중시킬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8월 3일 주한 미국 대사 새뮤얼 버거는 국무부에 이런 요지의 건의를 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韓日(한일) 양국의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써 국교 정상화 회담에 임하도록 촉구해 주었으면 함. 이 친서엔 ‘한일 양국의 우호 관계는 공산 세력에 대한 우리의 공동 방어 전략에 필수적이다. 한국이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도 한일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해 주기 바람>
   버거 대사는 또 ‘국회와 언론으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는 군사정권은 국교 정상화 문제에 대하여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즈음부터 미국은 한국에서 군사 정권이 등장한 것이 동아시아의 對蘇(대소) 방어선 강화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기 시작한다. 6월5일에 워싱턴의 ‘對韓(대한) 긴급 대책반’이 작성한 한국 사태 관련 보고서에 부속문서로 붙어 있는 ‘한국의 군사 정세에 대한 미 국방부의 평가’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미국의 對蘇(대소) 전략에 왜 중요한지를 이런 요지로 상세히 설명했다.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의 안보는 큰 위협을 받게 된다. 강력한 한국은 일본을 중공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소련의 위협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균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 보루로서 중공의 영향권 안에 있는 다른 곳(특히 동남아시아)에서 敵의 위협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신축성을 보장해 주고 있다.
   한국군의 가장 큰 자원은 전투 경험이 있고 임금이 낮으면서도 사기충천한 인력이다. 한국군 병력을 지금 수준 이하로 줄이면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할 수 있게 하는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 갈 것이다. 더구나 한국군의 상당한 감축으로 초래된 군사력 균형의 상실을 보전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 가까이에 전술 핵무기를 추가로 배치해야 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전술핵의 추가 배치’란 말로써 1961년 이전에 한국에 전술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기습을 받았을 때 ‘敵軍을 압도하고 한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 국방부의 이 보고서는 한일 국교 정상화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한국과 일본 기지에 있는 한국군과 미군의 항공기들은 적의 공격에 노출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의 사용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사전 협의를 요청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 있는 미 공군 기지를 戰時(전시)에 사용할 수 없다면 효과적인 공군 지원은 어려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한국 기지, 오키나와, 항공모함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화해는 한국의 방어에 일본의 國益(국익)이 걸려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게 될 것이다>
  
  소련·중공·북한의 3각 동맹 체제에 대한 미국·한국·일본의 대응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필수적이란 전략적 판단에 기초하여 미국은 한일 양국의 등을 떼민다. 1961년 6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린 케네디 대통령과 일본 이케다 총리의 頂上(정상)회담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촉구한다. 최근에 비밀이 해제된 두 정상 사이의 대화록에는 또 이케다가 한국을 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먼저 이케다 총리가 말한다.
   “40년간 한국을 통치해 본 경험에 의하여 일본은 한국인들이 멋대로이고 배타적이라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 일본으로서는 최근의 쿠데타 때문에 할 일이 별로 없다. 우리는 한국의 내정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므로 미국이 민간 정부로의 복귀를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우리도 民政(민정)으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 상당한 원조를 해주었지만 심각한 경제 위기로 내세울 것이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 등장한 군사 정부의 민족주의적인 열정과 일본 국민들의 거부감으로 해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양국 사이의 그런 정상화는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가진 對韓(대한) 정책의 한 요점은 두 나라가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의 電力(전력) 개발을 지원해 주면 도움이 많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에도 매우 불리한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 총리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케다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안보 문제는 사실상 일본의 국내 문제이다. 일본은 한국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현 정부가 반공주의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정부를 지지하고 싶을 정도이다. 현재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對共(대공) 방어망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갈망했지만 이승만 정권 시절엔 李 대통령의 반대로, 장면 정부 시절엔 정권의 早期(조기) 붕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였다. 쿠데타를 모의할 때부터 박정희는 만약 미국이 원조를 끊으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갈망하는 만큼 박정희는 미국에 대해서 하나의 카드를 쥐게 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머지않아 베트남 파병이란 또 다른 카드를 쥐게 된다. 미국이 절실하게 원하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한미간의 외교상 주제가 되어 있던 1960년대의 두 나라 관계는 안정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우산과 외교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면서 경제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의 極讚
  
   미국이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는 데 써먹은 가장 중요한 수단은 ‘빨리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1961년 8월 11일 딘 러스크 국무 장관은 丁一權(정일권) 주미 한국 대사를 招致(초치)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우리는 친구 사이니까 며칠 안으로 귀국의 정부에서 결정할 문제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지난 6월에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의 흐루시초프 의장과 회담을 가졌을 때 흐루시초프는 이런 위협을 했습니다. ‘소련은 전 세계의 인민 정권들을 지원할 것이다. 공산주의가 이런 나라들에서 정권을 잡는 것은 역사적으로 필연이다.’
   이에 대해서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반박을 했습니다.
   ‘자유선거를 통해서 공산 정권이 성립된 나라가 없지 않는가.’
   흐루시초프는 한국을 지칭하면서 현 정부의 군사적인 경향 때문에 밑으로부터의 압력과 침투에 취약하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유엔을 구성하는 나라들의 여론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나는 귀국 정부가 (민정 이양으로 가는) 선거 날짜를 1963년으로 멀리 잡아 놓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1962년 가을의 유엔총회 직전으로 선거 날짜를 앞당기는 것이 어떨까요.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선거 일정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왜냐하면 1963년에 선거를 하겠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한국 정부는 선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것이니까요.”
   이 대목에서 배석하고 있던 매카나기 차관보가 반대 의견을 냈다.
   “한국인들은 분명한 일정이 발표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단히 실망할 것입니다.”
   러스크 장관은 즉시 자신의 제의를 취소했다. 그 대신 정일권 대사에게 “1963년에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발표하면 한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라고 물었다. 정일권은 “나는 4년간 고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러스크는 거듭해서 “선거 일정을 결정할 때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처할 상황을 감안해 주었으면 한다. 많은 나라들이 한국이 헌정 질서로 복귀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61년 8월12일 박정희 의장은 ‘1963년 3월 이전에 헌법을 개정하고 5월에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다.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에 單院制(단원제)로 한다’는 민정 이양 시간표를 발표했다. 미국은 다소 불만이 있었으나 어쨌든 민정 이양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한미 관계는 정상화된 셈이었다.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도 이 무렵 확정된다. 이와 함께 박정희 정부를 보는 미국의 평가도 개선된다. 1961년 10월 28일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電文(전문)은 혁명 정부에 대한 극찬으로 변해 있었다.
   <군사 정권이 들어선 지 다섯 달이 되었다. 이 정권은 권위적이고 군사적인 면에서 대외적인 인상이 다소 나쁜 면이 있긴 하지만 정열적이고 성실하며 상상력과 의지력으로 꽉 차 있다. 이 정권은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대중적 지지 기반도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 前(전) 정부 하에서 토의되었거나 구상되었던 개혁 프로젝트들─은행 신용 정책, 무역,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공사의 확충, 탈세 대책, 농업과 노조 대책, 교육 및 행정 부문, 복지(교도소의 개혁, 윤락녀 재활 대책, 가족계획 사업, 상이군경과 유자녀 지원) 등이 실천되고 있다. 많은 개혁은 긍정적이고 상당수는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들이다.
   몇몇 개혁들은 뜻은 좋았지만 너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명 정부는 그런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매점매석 행위, 뇌물, 政經(정경)유착, 밀수, 군사 물자 橫流(횡류), 깡패, 경찰과 기자들의 공갈 행위에 대한 군사 정부의 단속은 이미 효과를 내고 있다. 공산당의 침투 공작에 대한 사찰 활동과 반공 선전의 질과 양이 모두 증가했다.
   군인 출신 장관들은 행정을 유능하고 효율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過勞(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이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근 한 달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장 유능한 장관 중의 한 사람인 丁來赫(정래혁) 상공부 장관은 내각회의 중 쓰러졌다가 2주간의 휴식을 끝내고 현업에 복귀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두 달간 휴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도 과로 상태이다. 유능한 장관들의 효율성은 그러나 최고회의와 내각 사이에 기능과 책임의 분명한 구분이 잘 안 되어 있어 다소 약화되고 있다. 몇몇 최고회의 위원들은 내각의 결정을 뒤집고 간섭하며, 군인 출신 장관들 가운데는 내각수반을 제쳐놓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최고회의의 기능을 입법 활동에 한정시키고 내각이 행정을 전담하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쿠데타에 처음부터 가담한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승만 정권 때의 경력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명령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태도는 방관자적이다. 이런 태도는 비관적인 태도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특히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쳐서 유능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不信(불신) 때문이다. 이 혁명이 어느 길로 갈지를 예측하기는 너무 이르다.
   최고회의 안에서 고질적인 분파주의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 지난 9월에 가장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 즉, 김종필 정보부장과 대령급들이 함경도 출신 장성들을 거세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그런 내부 권력투쟁을 막겠다는 뜻이 확고하여 상황은 안정을 되찾았다. 부정부패가 상부층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조짐도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박정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부정 사례를 공개하여 무자비하게 처리하겠다는 자세이다. 朴 의장에게 많은 것들이 달려 있다. 그는 가장 냉정하고 믿음직하며 안정되어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새뮤얼 버거 대사는 진로를 확실하게 잡은 혁명 정부의 두 가지 위험 요소는 내년도의 물 가 폭등 가능성과 김종필 정보부장의 獨走(독주)라고 분석했다.
   <정보부는 정부의 파수꾼으로서 광범위한 조직을 갖고서 감청, 정보망 운영, 우편 검열, 영장 없는 구금, 자백 강요를 일삼고 있다. 정부, 군부대, 우리 대사관, 그리고 최고회의와 내각 요인들도 정보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박정희도 이런 부작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나 謀叛(모반)을 탐지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 김종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편 박정희 의장이 1961년 8월15일에 민정 이양에 관한 일정을 발표한 이후 한미 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8월23일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박정희 의장을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요지의 電文(전문)을 보냈다.
   <(케네디 대통령에 의한) 방미 초청은 군사 정권을 인정함으로써 국내 상황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에서 朴 의장의 권위를 강화시켜 줄 것임. 이는 朴 의장이 강경파에 대해서 온건한 방향으로 영향을 끼쳐 왔음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것임. 이는 또 북한, 중공, 소련에 대해서 韓美 간에 균열이 없음을 과시할 수 있음. 한국의 경제 문제와 장기 경제 개발 계획에 대하여 솔직한 의견 교환을 할 기회임. 민정 이양의 약속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며 합당한 기관에 의해서 헌법과 선거법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우리 측의 견해를 최고위 수준으로 전달할 수 있음. 韓日 간의 국교 정상화 문제에 대한 우리 쪽의 의견 전달을 위해서도 박정희 의장의 초청이 바람직함>
   러스크 국무장관은 9월 1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박정희 의장을 11월 13~17일 사이 미국으로 초청할 것을 건의했다. 초청 형식은 비공식 방문. 케네디 대통령의 승낙을 받은 미 국무부는 버거 대사에게 ‘워싱턴 외부에서의 교통비는 한국 부담. 수행원은 10명 이내로 해줄 것’을 지시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주한 미국 대사 버거에게 “정상회담 개최 발표문에서 ‘비공식’이란 말을 빼 달라”고 했다. 버거 대사는 러스크 장관에게 보고하여 ‘비공식’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10월 26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인 金在春(김재춘) 육군방첩부대장은 4명의 선발대를 데리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정일권 주미 대사와 함께 나온 이수영 駐(주)유엔 대사는 김재춘에게 “미국 측에서는 고급 장성들의 구속 사태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장 각하의 방미 이전에 해결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정일권 대사는 미국 측의 儀典(의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미국 측의 대접이 말이 아닙니다. 의장 각하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공항으로 출영할 사람은 매카나기 국무성 차관보예요.”
   다혈질인 金在春은 흥분했다.
   “일국의 실권자를 영접하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모욕을 당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옵니까.”
   “미국 측 이야기로는 자신들도 난처하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민선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朴 의장을 국가원수로 대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총리 대우를 할 수도 없으니 전 주한 대사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짓이지요. 권력자를 좀 이름 있는 知名(지명)인사 정도로 대우하겠다니! 본국에서도 펄펄 뛸 겁니다. 의장 각하의 방미 계획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김재춘은 국제전화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상의했다. 김종필 부장은 최고회의에 이 문제를 올렸고 미국 측에 대해서 줏대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다니던 주체 세력들은 ‘의장 방미 보류’란 말까지 꺼냈다. 최고회의는 또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에게도 공식으로 항의했다. 며칠 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김재춘 선발대장에게 미 국무부 한국과장이 찾아왔다.
   “박 의장의 방미 보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김재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다음 가는 실권자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의전 절차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여 이곳 분위기를 본국에 보고했을 뿐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여기선 알 수 없습니다.”
   다음날 미국 측에선 정일권 대사를 통해서 의전 절차를 수정했음을 통보해왔다.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이 공항에 영접 나가고 의장대 사열을 하며 박 의장이 백악관에 도착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현관까지 나가서 손님을 맞는다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국민 비판
  
  
   박정희는 처음부터 5·16 혁명이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張勉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공격하는 이면엔 張勉 정부가 구현하려 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집권 후 박정희의 語錄(어록)에서는 민주나 자유, 평등보다는 국가, 능률, 청신, 기강, 自助(자조), 自立(자립), 自主(자주) 같은 단어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61년 8월15일 광복절 제16주년 기념사에서 박정희는 조심스럽게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주어진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移植(이식)해서 그 형태만을 모방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토와 생리에 맞지 않았던지 허다한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치졸한 의회 정치와 부패한 정치인들은 파쟁과 이권과 감투싸움에 寧日(영일)이 없는 나머지, 사회 정의를 한없이 어지럽혀 야박한 사고만이 彌漫(미만)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퇴폐한 국가 경영이 하루 연장되면 10년의 후진을 가져오는 급격한 시대의 대조류 속에서 나날이 기울어가는 조국의 운명을 좌시만 할 수 없어서 自我(자아)수술이란 비상조치를 단행한 것이 5·16 혁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대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의의 건설이요, 둘째는 경제 건설입니다. 도의의 확립은 민주재건의 초석이요 경제건설은 자주독립의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흥망의 기로에 선 이 마당에 이기적인 방관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시민윤리의 확립에, 자주독립의 조건을 자립 경제에 두고 있었다. 민주주의나 자주독립이란 구호에 머물지 않고, 그 좋은 명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기초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실천론에 박정희의 관심이 머물러 있었다. 박정희는 근대화를 추진해가는 데 있어서 자발적인 대중 동원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5·16 직후 박정희는 국민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자각과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自助(자조)정신을 가장 많이 강조했다. 이런 강조를 하는 박정희는 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이 무렵부터 박정희는 연설문을 꼼꼼히 챙겼다. 그는 밑에서 올라온 연설문 초안을 자신의 뜻에 맞게끔 고치거나 처음부터 자신이 기초하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모든 연설은 그의 말이며 그의 생각으로 보면 된다. 1961년 10월3일 개천절 치사에서 박정희는 남북한의 차이점을 예언적으로 지적했다.
   <(前略) 남한은 이와 같은 과업을 국가 권력에 의한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대중의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역량에 의해 실현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한과 북한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强權(강권)에 의해서 지배되어온 사회는 외견상의 힘과는 달리 사회 根底(근저)의 기본적 역량이 취약한 법입니다. 남한은 이제 근본적으로 축적되어 온 발전의 원동력과 혁명 정부의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지도에 의해 몇 해 안 가서 빈곤, 飢餓(기아), 無知(무지), 질병과 모든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복지사회 건설을 완성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향하여 “이것은 잘못되었으니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한 최초이자 마지막 지도자이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을 찬양하고 국민들에게 영합할 때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1962년 8월 농협 주최 이동조합업적경진대회 치사에서 박정희가 한 연설의 초안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쓴 것이다. 기자가 李洛善 당시 최고회의 의장 공보비서의 유품 중에서 찾아낸 친필 원고 중 주요 대목을 소개한다. 이것은 육성이나 다름없다.
   <(前略) 이와 같은 원인이 과거 위정자들의 정책의 빈곤과 무능의 소치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모든 농민들의 自助的(자조적) 노력과 自覺心(자각심)의 부족이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5·16 혁명 후 정부는 과거의 욕된 역사를 청산하고 도의 국가,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인간 개조와 산업 부흥이란 두 가지 大(대)목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다시 말하자면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혁명 정부는 허다한 긴급 시책 중에서도 우선 농촌 부흥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농촌에 잘 살기 운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重農정책인 것입니다.
  全 인구의 7할을 점하는 농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경제 재건이요 산업 부흥이요 하는 것은 공염불이라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본인은 최근 호남 일대의 농촌을 다녀왔습니다. 전남의 모범 농촌 조성 운동과 전북의 ‘보고 가는 마을’ 운동은 확실히 우리나라 농촌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록수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이 운동이 앞으로 계속 활발히 추진된다면 우리의 농촌에는 수년 이내에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날 것을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다니면서 본 몇 개 모범 부락에서 공통적인 점을 몇 가지 느꼈습니다. 이러한 부락에는 반드시 건실하고도 의욕적인 농촌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애향심이 강하고 부락민들을 단합시키고 부락민들의 의욕을 북돋워줄 수 있는 지도자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우리 농촌의 등불이요 참다운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中略) 본인이 항상 강조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自助心이 없는 농민들을 정부는 다 같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자조심이 강한 모범 부락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중점적으로 도와서,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농민은 빨리 잘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문, 잡지, 영화를 통해서 선진국 농촌을 보았을 것입니다. 農家마다 전기, 수도가 들어가고 텔레비전이 있고 자가용 승용차까지 가진 선진국가의 농가들을 보시고 부럽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정부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가 남이 좀 도와주지 않는가 하고 의타심만 많고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농민은 언제까지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下略)>
   박정희는 自助(자조) 정신이 없는 사람은 도울 필요가 없고, 자조심이 강한 사람과 마을을 중점 지원하겠다는 새마을 운동의 원칙을 이때 이미 세웠다. 대중 정치인들이라면 못사는 사람부터 밀어주려고 했을 것인데 혁명가는 발상이 달랐다.
  
  
   朴正熙의 기도
  
   박정희 의장은 미국의 초청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회담하게 되었다. 韓日 수교를 사실상 거부해온 李承晩 대통령과는 달리 朴 의장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이 지불할 배상금에서 조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61년 11월11일, 일본에 도착한 첫날밤 朴 의장 일행은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뒤 밤 9시15분경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朴 의장과 회담 대표단들은 약 12시간 후 열리게 될 頂上회담에 대비하기 위해 영빈관 1층 회의실에 모였다. 대책회의를 주도한 배의환 수석대표는 다음날 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주요 의제들로 ①국교 정상화 문제 ②재산 및 청구권 문제 ③재일교포 처우 문제 ④어업 관계 ⑤문화재 반환 문제 등 다섯 가지를 요약하면서 브리핑식으로 회담 전략을 설명했다.
  “다섯 가지 의제 중에서 국교 정상화 문제는 최종적인 사안이라 나중에 거론될 것이고, 실제 내일 등장할 의제는 나머지 네 가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거론할 의제는 ‘재산 및 청구권’입니다. 외교상 Property & Claims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배상 청구권입니다. 기술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아내어야 하는가가 우리들의 목표입니다. 좀더 욕심을 낸다면 구체적인 청구권 액수의 범위까지도 타협이 될지 모르는 기회입니다. 아마 지금 이 시각, 이케다 총리 측도 자민당 내 중진들과 청구권 범위에 대한 모종의 협의를 하는 중일 것입니다. 일본 측이 적극적으로 제의하고 나올 것은 어업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일본 정치의 기반은 어민들이기 때문에 이케다 총리도 여기에 중점을 두고 회담을 진행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 측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민들을 현재 부산에 수용소를 만들어 가둬 놓고 있고, 일본 쪽은 밀항한 우리 국민들을 가둬 놓고 있으니 만일 어업 관계로 대화가 극단화되면 일본 어민과 우리 측 밀항자들을 맞교환하자는 카드를 내면 될 것입니다."
   약 한 시간 뒤 대책회의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박 의장은 영수회담에 우리 측 통역으로 활동하게 될 정일영 대표를 보더니 “정 교수, 나하고 잠깐 올라갑시다”라며 불렀다. 鄭 대표는 스위스 제네바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뒤 자유당 시절부터 한일회담에 참석해 일본 측의 국제법적 주장에 대한 한국 측 입장을 대변해 오곤 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이기도 했던 鄭 대표는 1961년 초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서 활동 중 5·16을 맞아 귀국했다. 군사 정부가 한일회담 대표단을 다시 구성하게 되자 정일영 교수는 최고회의로 불려 나와 경과 보고를 해야 했다.
  “그때 서른다섯 살이었던 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박정희 의장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나같이 어린 학자를 단지 한일회담의 외교적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연단에 올려놓고 설명을 듣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일회담의 경과를 설명하다가 朴 의장 쪽을 보니까 수첩을 꺼내 놓고 일일이 받아 적고 있더군요. ‘아, 이 분은 엄청난 책임감을 갖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영빈관에서 정 대표를 방으로 불러들인 박정희 의장은 소파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자, 내일이 회담인데 이거 어떻게 하노?”
  “각하, 하시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하시죠.”
  “이 사람들의 돈을 받아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그런데 이거 어떻게 말을 끄집어내야 하지? 무턱대고 배상금 내놓으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저쪽에서는 당장 국교 정상화하자고 할 건데 말이야.”
  “각하, 우리가 배상금 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이유를 대면서 따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우리가 불리해집니다. 총독부가 발행한 國債도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어 얼마나 갖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모르고 있고, 예금 액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나중에는 우리가 주장하는 액수에서 그만큼 깎이게 될 겁니다.”
  “아, 그렇겠네.”
  “그러니 너무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마시고 개략적으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받을 것은 받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거 뭐,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 되겠구먼.”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11월12일 일요일 오전 9시. 영빈관 1층 현관에는 韓日회담 대표들이 출발 준비를 마친 채 박정희 의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를 맡았던 최영택 참사관이 2층으로 올라가 노크를 한 뒤 방으로 들어섰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박 의장은 의자에 앉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최 참사관의 출현에 고개를 돌렸다.
  “출발 준비는 잘 돼 있나?”
  “예, 잘 돼 있습니다.”
  “수행할 사람들은?”
  
  “예, 아래층 홀에 다 대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있다가 출발할 거지?”
  “지금부터 10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朴 의장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양복 상의 속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메모지를 꺼내 펼쳤다. 崔 참사관이 보니 16절지 절반 크기의 종이에 세로로 여덟 줄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회담 시 거론하게 될 주요 의제로 보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정리한 메모를 조용히 내려다보더니 숙연한 자세로 崔 참사관에게 말했다.
  “내, 회담 준비를 하는데, 회담하기 전에 조용히 머릿속을 정리 좀 해야겠어. 나 혼자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최 군은 좀 나가서 기다려 주게.”
  “예, 알겠습니다.”
   조용히 복도로 나온 최 참사관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됐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저를 밖으로 내보낸 뒤 기도를 했을 줄 압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오전 9시 20분에 현관으로 내려온 박 의장은 일행과 함께 일본 총리 관저로 출발했다. 일본 경찰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사이카로 호위했다. 1951년 10월20일 한일회담이 시작된 이후 10년 만에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韓·日 頂上 회담
  
   오전 10시 정각, 이케다(池田) 총리 집무실에는 양측 실무 대표자들과 박정희 의장 및 이케다 총리가 앉았다. 한국 측 대표로는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최덕신 외무장관, 배의환 한일회담 수석대표, 정일영 대표, 원충연 공보실장, 최영택 참사관이 배석했고 일본 측은 고사카 외상, 이세키 아주국장, 스기 수석대표와 마에다 동북아과장이 배석했다. 일본 측 통역으로 나선 마에다 과장(뒤에 주한 대사 역임)은 인천에서 태어나 소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쳤지만 한국말이 능숙하지 못해 즉석에서 정일영 대표가 양측 통역을 전담하게 됐다.
   양측 실무진들이 마주앉아 몇 마디 인사말을 한 직후 이케다 총리는 朴 의장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朴 의장이 좋다고 하자 두 사람은 정일영 대표를 통역으로 데리고 옆방으로 옮겼다. 이날 한일 회담은 실질적으로 양 頂上(정상) 간의 단독회담으로 진행되었다.
   이케다 총리는 “정말 잘 오셨습니다. 참 기쁩니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서두를 뗐다. 박정희는 “저도 반갑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가는 길인데 스기 대표가 총리 각하의 초청장을 들고 왔기에 이렇게 들렀습니다. 초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응답하면서 “지금 밖에서는 실무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 다른 것은 접어 두고 경제 협력을 위해 우리가 일본 측에 보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본 측에게 청구할 것이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케다 총리는 시종일관 “알겠습니다”, “그렇겠군요”, “아, 그렇습니까”, “물론 그렇게 해야 겠지요”라는 식의 대답을 하면서 주로 듣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어업 관계 등 현안에 대한 한국 측 입장을 묻는 식으로 회담을 이끌어 갔다.
   朴 의장은 이케다 총리가 하는 말을 소상하게 알아들을 수 있어 정일영 대표가 통역하는 동안 대답할 시간을 충분히 벌고 있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답변 문장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鄭 대표에게 “…이렇게 답변할까?”라든가 “…이런 표현이 맞나?”라고 의논까지 해가며 이케다 총리에게 정확한 문장이 전달되도록 했다. 鄭 대표가 이케다 총리에게 일본말로 통역하는 도중에 朴 의장은 잘못 선택된 어휘를 찾아 “그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나”하면서 고쳐 주기도 했다. 임했던 정일영의 회고.
  “박 의장은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습니다. 처음부터 아주 점잖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과거사를 들추는 일도 없었습니다. 말투는 조용조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휘 선택에 있어서는 아주 조심스러웠고, 주장할 대목에서는 허식 없이 할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사람 간의 회담은 약 1시간20분간 계속됐다. 나중에 박정희 의장은 정일영 대표에게 “마, 이 정도로 하지. 좋은 얘기였고, 유익했다고 하지”라며 끝말을 해주었다.
   방에서 나오자 양측 실무진들이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운 듯 일어섰다. 정일영 대표가 “여기서는 무슨 얘기를 하며 기다렸소?”라고 묻자 여기저기서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오야지(대장)들이 다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이 있어야지요.”
  “술을 마실 수도 없고, 이 사람들이 커피만 주니 묵묵히 마시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국장들도 다 나와 있고, 위에서 무슨 결론이 날지 몰라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이날 회담 내용은 그 이틀 뒤인 11월14일 미국에 도착한 朴 의장이 美 국무장관 딘 러스크와의 요담에서 朴 의장의 전속 부관 韓相國(한상국) 중령의 통역으로 전달됐다. 박정희 의장이 밝힌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 내용은 미국에서 비밀 외교 문서로 분류되어 오다가 1996년에 공개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극동의 평화와 안보를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나와 정부 간부들의 일치된 의견이지만, 한국 국민 여론도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국민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兩國 관계의 정상화에 앞서서 몇몇 현안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이 점에 관하여 이케다 총리와 비밀 단독 회담에서 솔직한 의견교환을 했다.
   양국 간에 외교 관계를 하루빨리 정상화해야 한다는 데 나와 이케다 총리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해결하여야 할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실무자 수준에서 행정 기술적 세부 문제(details)가 다림질돼야만 한다(had to be ironed out).
   그러한 연후에 한국과 일본 간의 경제적 관계는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한국민은, 특히 과거의 역사를 보아, 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 있을 수 있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한국)정부로서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다>
  
   미국의 對韓전략
  
   朴 의장 일행이 빌려 탄 미군 군용기는 1961년 11월13일 오후 4시에 워싱턴 내셔널 에어포트 군용 터미널에 도착했다. 미 육군 의장병이 트럼펫을 불어 國賓(국빈)의 도착을 알리는 가운데 朴 의장이 내리자 키가 큰 린든 B. 존슨 부통령이 맨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있을 때 유엔군 사령관이던 라이만 L. 렘니처 대장은 당시 합참의장이었다. 그는 5월16일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박정희 소장 일파에 대한 강경 진압 자세를 보일 때 이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던 이였다. 그도 박정희 의장을 반갑게 맞았다. 존슨 부통령의 환영사와 박정희 의장의 답사가 교환되었다. 朴 의장은 답사를 끝내고 탑승차 쪽으로 가다가 軍 의장대 뒤편 방책 뒤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영하고 있던 在美동포들 쪽으로 걸어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악수를 했다.
   朴 의장은 전속부관, 경호관, 주치의와 함께 맥킬 테라스 2838번지 주미 대사관저에 들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이웃한 쇼어햄호텔에 투숙했다. 朴 의장은 이날 오후에는 공식 행사가 없어 대사관저에서 머물렀다. 그는 5·16 주체 세력인 육사 8기 출신 金東煥(김동환) 참사관으로부터 워싱턴 일정 전체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저녁은 丁一權 대사가 마련한 만찬에 수행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韓食을 먹었다.
   박정희 의장이 워싱턴에 도착한 날 백악관 안보 보좌관 월터 W. 로스토 박사는 다음날 있을 韓美 정상회담에 대비한 요약 보고서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朴 의장의 방미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한국인과 세계인들에게 미국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장래를 낙관하고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단된 조국의 장래에 대해서 절망하는 버릇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 自立을 달성할지 혼란에 빠져 있다. 특히 학생들은 그들이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직후 조국이 그렇게도 빨리 권위주의 정부로 돌아가야 했다는 데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현재의 한국 정권이 이승만 식으로 복귀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이 처음에는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이제 와서는 쿠데타의 지도자를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데 혼란을 겪고 있다.
   이상의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우리는 公私席(공사석)에서 다음 두 가지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a. 한국 정부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부정부패 등 고질적 문제들을 헌신적으로 고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부는 文民정부로 복귀하기 위한 과도단계에 있는 정부이다.
   b. 한국은 경제 개발에 유리한 건전한 기초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경제 개발의 조속한 진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지원할 것이다.
  
   군사 정부는 우리의 압력을 받고 1963년 4월에 헌법을 개정하고 5월에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朴 의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주었으면 함.
  
   a. 헌법은 어떻게 고칠 것인가.
   b. 1963년 선거의 출마 자격에 대한 제한이 있을 것인가.
   c. 선거 전에 정치 활동을 허용하여 정당을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할 것인가.
   d. 선거는 공정하게 실시될 것인가.
  
   한국 측은 공동 성명서에 1963년에는 文民정부로 복귀할 것이란 약속의 재천명을 포함시키자고 제의했다. 이런 재천명은 최대한 확고한 표현이라야 할 것이며 각하의 질문에 따라 새로운 사항이 나타난다면 공동 성명서에 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 정부가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완화할 것임을 내비치면 성명서에 이를 반영할 수 있다.
   지난 6월 한국 문제 대책반은 각하에게 군사 안보에 너무 치중하고 있는 비생산적인 對韓(대한) 원조 정책을 수정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한국 정부가 自助的인 조치를 취한다면 미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명백히 하고, 특히 5개년 電源(전원) 개발 계획에 외부 지원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한다. 한국 문제 대책반이 여러 가지 건의를 올린 이후 한국에 대한 무상 지원은 당초의 1억2,000만 달러에서 9,000만 달러로 감축되었고(작년엔 1억 8,600만 달러) PL 480 식량 원조도 약간 감소했다. 대책반이 지적한 모든 문제점들에 대해서 현재의 정부가 정력적으로 달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對韓 원조의 총액은 줄었다.
   한국 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작년 원조 가운데 2,000만 달러는 일회성인 특별 지원이었고 올해 회계연도 예산에 4,000만 달러가 남아 있는데 이것을 개발차관으로 轉用(전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국 정부는 우리가 재촉한 개혁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원조가 삭감당한 것에 대해서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현재 無償원조에서 개발 차관으로 중점을 전환하는 단계에 있다. 한국처럼 외환 보유고의 90%와 정부 예산의 큰 부분을 우리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에서 이런 전환을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주한 미국 대사와 유솜(USOM=對韓 원조기구) 국장은 對韓 원조 액수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건의를 했다.
  
   a.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편집자 注=미국 원조 자금으로는 미국 물자를 구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비료 구입에 대해서만은 예외로 해줄 것.
   b. 미국의 對韓 군사 원조 자금으로 구입해온 물자를 점차적으로 한국군의 예산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정책을 보류해 줄 것.
   c. 한국군이 필요한 물자를 군사원조 자금으로 한국내에서 해외구매 형태로 구입하도록 해 줄 것.
  
   당초의 지원 예산 규모인 1억2,000만 달러 수준을 복원하든지 위에서 건의한 것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든지 해 주었으면 한다. 군사 지원에서 경제 지원으로 서서히 중점을 이동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국 측과 토의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군에 대한 군사 원조 액수를 약간 삭감하고 경제 원조로 전환하는 시험적 조치를 취해 볼 것을 건의한다. 유엔의 기치 아래서 미군 2개 사단이 비무장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한국보다도 敵의 침략에 대한 억제력을 완벽하게 확보하고 있는 곳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진짜 위협은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공동성명서에는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 의사를 명백히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40代 지도자끼리
  
  
   11월14일 박정희 의장은 오전 9시 15분 숙소인 한국 대사관저를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무명용사비에 헌화한 朴 의장은 곧바로 美 국무부로 갔다. 7층에 집무실이 있는 러스크 장관은 1층 현관까지 내려와 朴 의장 일행을 영접했다. 이날 박정희·러스크 회담에서 朴 의장은 對韓 원조의 증액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박정희: “공산 침략의 가능성 때문에 한국은 60만 군대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1960년부터 미국의 한국군 유지비 원조 액수가 감소함으로써 한국 측의 부담이 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 중에 있습니다. 한국 측의 군사비 부담 증가로 경제개발에 큰 짐이 되고 있으니 5개년 계획 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국군에 대한 원조 수준을 1959년 수준으로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상원조가 줄어들 것이란 보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경제계획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현 수준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5개년 계획이 내년부터 실시되는데 우리는 해외 투자 차관을 유치하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귀측에 대해서 특별 경제 안정 기금으로 1억 달러의 차관과 7,000만 달러의 경제개발 차관 및 800만 달러의 기술 원조를 요청합니다. 이 액수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강력한 반공 국가와 60만 대군을 유지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돈입니다.”
   러스크: “정부와 의회는 지난 15년 동안의 해외 원조 실적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개선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원조 수혜국들에서 원조가 효과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의회는 장기 경제개발 원조란 발상을 내어놓고는 그 대신 군사원조, 무상원조, 短期(단기)원조를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과 관련하여 한두 가지 문의할 것이 있습니다. 軍 병력을 건설공사, 통신, 보건부문에 이용할 수 없을까요. 韓日 국교 정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미국 정부의 원조 집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법률적인 제약이 있으나 우리는 한국 정부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방도를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박정희: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長期(장기)차관으로 정책을 전환한다고 해도 한국에는 그것을 너무 급격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간만이라도 미국의 원조가 계속된다면 한국은 장기차관 체제를 위한 기초를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軍 병력을 경제개발에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오는 길에 도쿄에서 이케다 총리와 단독으로 만나 국교 정상화를 가능한 한 빨리 타결 짓는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러스크: “일본과의 國交 문제 해결은 미국의 對韓 원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 될 것입니다.”
   박정희: “장관께서는 내가 제기한 (원조)문제에 대해서 희망적인 답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러스크: “(국제개발처) 해밀턴 처장과 그 문제를 논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의장께서 떠나시기 전에 저도 이 문제로 한 번 더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실 때도 이 문제가 거론될 것입니다. 저의 이 대답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취한 사면 조치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朴 의장은 한 시간 반 동안의 회담을 끝낸 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국제개발처(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파울러 해밀턴 처장을 찾아가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담을 끝낸 박정희 의장 일행은 백악관으로 향했다. 1917년생으로 朴 의장과 동갑인 케네디 대통령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朴 의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현관 계단을 올라간 두 지도자는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朴 의장은 오찬에 참석할 수행원들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朴 의장 일행이 로비로 들어서자 美 해병대 군악대가 아리랑을 연주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오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朴 의장을 2층으로 안내하여 부인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소개했다. 朴 의장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에게는 족자를,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한복 한 벌씩을 선물로 내놓았다. 오찬에는 미국 측에서 러스크 美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렘니처 합참의장, 월트 W. 로스토 특별보좌관, 버거 주한 미국 대사, 폴 H. 니츠 국무차관보, 킬렌 유솜(USOM) 처장 등 요인들이 참석했다. 박정희 의장, 정일권 駐美 대사,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 국방위원장, 최덕신 외무장관 등 한국 측 참가자 23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짤막한 환영사를 했고 朴 의장은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답사를 했다.
   朴 의장은 “우리는 국가의 생명을 건지고 이를 건전하게 육성하기 위하여 병든 기관을 제거해야 하는 외과의사의 처지에 놓여 있다”면서 “직장 활동의 공정, 국가 건설에의 의욕, 국가에 대한 책임감, 이러한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소가 우리의 국가재건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1시간40분간 계속된 이날 오찬에는 박정희 의장이 좋아하는 전복 요리가 특별히 등장했다. 朴 의장은 오찬이 끝나자 일단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가 오후 3시30분 다시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갔다.
   頂上회담은 오찬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매우 유쾌하게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혁명 정부가 단행하고 있는 여러 개혁 조치를 환영하는 바이지만 우리로서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고 했다.
  “혁명 정부가 稅制개혁을 단행하는 바람에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들도 그동안의 체납세금을 물어야 한다니 야단입니다.”
   박정희 의장도 농담을 했다.
  “미국에 와서 보니 카메라 기자들이 상전이더군요.”
  “의장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신문기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지요.”
  
   越南 파병 거론
  
   1961년 11월14일 오후 3시30분부터 1시간20분 동안 이루어진 케네디·박정희 頂上회담의 기록은 1990년대에 공개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공동 성명서를 읽어 보고 만족한다고 말했다. 만약 朴 의장도 동의한다면 이대로 발표하도록 하자고 했다. 朴 의장도 동의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대로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케네디: “아까 박 의장과 오찬을 하면서 한일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본인은 어떻게 하면 월남의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습니다. 최후의 수단은 물론 미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입니다만 진정한 해결책은 월남인 스스로가 외국 원조에 의존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요. 월남은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박 의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정희: “러스크 장관과 해밀턴 처장에게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너무 혼자서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세계의 각국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담을 나누어 져야 자유세계 전체의 힘이 증강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韓日 국교 정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反共국가로서 한국은 극동의 안보에 최선을 다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월맹은 잘 훈련된 게릴라 부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월남식의 전쟁을 위해서 잘 훈련된 100만의 장정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에 이런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고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자유세계가 단결되어 있음을 과시하게 될 것입니다. 출국하기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군 지휘관들과 토의했습니다. 모두가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군사 보좌관들과 함께 본인의 제의를 의논해 보시고 저에게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케네디: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미국은 베를린 장벽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구 전체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본인은 맥나마라 장관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朴 의장께서도 내일 맥나마라 장관, 렘니처 합참 의장과 한 번 더 만나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필리핀 사람들과 이런 문제를 의논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군요. 프랑스 사람들이 (월남에서)확인한 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엔 한계가 있어요.”
   박정희가 이 자리에서 월남 파병 용의를 밝힌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朴 의장이 월남 파병을 제의한 대목은 삭제한 상태로 외교 문서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삭제된 부분이 공개 문서에서 복원된 것은 1996년 미 국무부가 <미국의 외교>란 문서집의 <1961─63년 동북아시아>편을 발간하면서였다.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들이밀 카드가 없었던 박정희 의장이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월남 파병이었다. 延파월 인원 약30만 명, 最多 주둔 병력 약5만 명을 기록한 역사상 첫 해외 파병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예정에 없었던 정상회담을 한 차례 더 하게 되는데 이는 朴 의장의 월남 파병 제의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 파병 용의를 밝힌 박정희의 논리는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 준다’는 것이며 파병에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파병에 따른 여러 가지 경제적 이득을 계산에 깔고 한 발언이었다. 케네디는 대화를 對韓원조 문제로 끌고 간다. 그는 미국이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朴 의장은 한국이 희망하는 것은, ‘바이 아메리카’ 정책의 전면적인 철회가 아니라 특정한 상품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만찬 때 이 문제를 더 이야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본인은 혁명의 前과 後를 비교하여 혁명정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서를 갖고 왔습니다. 본인은 이 주제를 가지고 러스크 장관, 해밀턴 처장과도 논의한 바 있습니다.”
   케네디: “양국의 대사께서는 이미 혁명 주체 세력의 업적에 관해서 매우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본인에게 해주셨습니다. 본인은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본인은 미국이 朴 의장을 최대한 지원할 것임을 보장해 드립니다. 우리는 對韓 원조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일본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태평양 지역 전체가 자유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은 우리에게 死活的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맥나마라 장관,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서 의장께 설명해 드리시오.”
   맥나마라 장관: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의 증강 예산이 당초 계획보다도 60억 달러나 늘어났습니다. 1,700대의 핵무기 탑재 전투기 가운데 850대는 15분 내에 이륙할 준비를 갖추고 항상 비상 대기중입니다. 핵무기 분야에서 소련이 최근 대기권 실험을 하고 있지만 미국은 양적으로는 3~8배, 질적으로는 그 이상으로 우세합니다. 소련은 200~300대의 핵무기 탑재 폭격기를 北美 대륙 상공으로 보낼 수 있을 뿐입니다. 대륙간 탄도탄의 경우, 우리는 핵탄두 미사일 80기를 장착한 다섯 척의 폴라리스급 원자력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소련이 우리에게 선제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미국은 그보다 훨씬 가공할 반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골칫거리는 이란, 월남, 쿠바 등지에서 경험한 성격이 많이 다른 분쟁입니다.”
  
   경제 개발 지원 요청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에게 “38선을 통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박정희: “그자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38선을 침투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습니다. 일망타진되고 있습니다.”
   케네디: “북한 사람들의 사기와 정치 성향은 어떻습니까.”
   박정희: “식량 소비량과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물론 그들은 기반 산업과 지하자원에서는 남한보다 우월합니다. 북한의 전력 생산량은 110만kW입니다. 남한은 5개년 계획이 끝나는 해라야 전력 생산량이 103만kW 수준에 달할 것입니다.”
   케네디: “원자력 발전소를 짓지 그랬어요.”
   박정희: “건설비가 너무 비싸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웃으면서) 미국이 지원해 준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육군과 해군 전력은 남북한이 비슷합니다. 공군은 북한이 남한보다 네 배가 강합니다.”
   러스크: “그 공군력이란 북한만을 말합니까 아니면 중공과 소련 공군력을 포함한 것입니까.”
   박정희: “북한만을 가리킵니다. 한국과 일본 주둔 美 공군력을 포함시키면 북한과 대등해집니다. 북한은 지금 산업화에 매진하고 있고 남한은 낙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인의 가장 큰 당면 과제는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가 그러합니다만 分斷된 국가에서는 경제력이 서로 대등하지 않으면 일방은 다른 여러 부문에서 뒤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그런 처지에 빠지면 안 됩니다. 본인이 여기에 온 이유는 한국군의 병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의 긍정적인 뒷받침을 얻기 위한 것이며 경제 개혁과 再建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 성명서의 취지는 그런 원조가 있을 것이라는 뜻인가요.”
   케네디: “본인은 朴 의장과의 사이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본인이 말했습니다만 한국의 안전이 미국에 死活的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두셔야 할 것은 우리가 올해에 원조 예산을 (美 의회로부터) 확보하는 데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의장께서는 우리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이해해주셔야겠습니다.”
   박정희: “자유세계 개발도상국가들의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본인의 소신을 거듭 천명하려고 합니다. 원조를 할 때도 최단시간 내에 최대한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나라를 중점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케네디: “본인도 동의합니다. 의회와 국민들도 원조가 가장 효율적으로 쓰이는 나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라오스에는 원조를 많이 했는데 낭비된 경우입니다. 실망스러운 것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분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차관을 제공할 뜻은 있는 모양인데 年利 6%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위기에 관해서 말씀드린다면 (소련과) 타협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협정을 맺은 뒤에도 자유세계 측에서 베를린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베를린과 월남에서 동시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습니다. 이제 작별해야겠는데 혹시 떠나기 전에 본인이 요청한 원조 건에 대해서 ‘기분 좋은 답’을 들을 수 없을까요.”
   케네디: “우리는 실천할 수도 없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누군가가 본인에게 그런 ‘기분 좋은 것’을 주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는데 의장께서 월남 파병 건으로 본인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의장께서는 미국이 우리 모두를 폭파시켜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용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본인은 議長께서 여기 오신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의장께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정일권 대사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의장에게 잘 설명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케네디는 박정희와 헤어지면서 내일 한 번 더 만나자고 했다. 이것도 예정에 없던 호의였다.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1차 회담 때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무작정 달라고 하지 않고 ‘自立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란 식의 논리를 폈다. 박정희는 농민들을 상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自助 정신을 강조하곤 했었는데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대하여도 당당하게 손을 벌리려고 했다.
  ‘自助 정신의 發揚(발양)에 의한 自立 경제의 건설, 自立 경제에 뿌리를 둔 自主 국방, 자주 국방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통일 국가도, 독립 국가도 될 수 있다’는 自助─自立─自主─독립·통일의 논리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한 국가 근대화 전략의 철학적 기반이었다. 박정희는 이런 생각을 새마을운동 등 근대화 작업에 그대로 적용했다. 새마을 사업을 할 때는 가장 가난한 마을을 먼저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自助정신이 가장 강한 마을을 먼저 지원하여 경쟁을 붙였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頂上회담을 끝낸 박정희 의장은 주미 한국 대사관저로 돌아오자마자 정일권 대사가 朴 의장을 위해 마련한 리셉션에 참석해야 했다. 워싱턴 주재 외교관들과 렘니처 합참의장 등 군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朴 의장 일행은 도중에 리셉션장을 빠져나와 백악관 근처 블레어 하우스(대통령의 國賓이 머무는 영빈관)로 갔다. 러스크 국무장관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인사말에서 “본인은 미국에 와서 세 가지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냈다.
  “첫째 고통은 미국과 한국의 시간 차이 때문에 오는 것이고, 둘째 고통은 환대가 너무 정중하여 서너 시간씩 부동자세로 서 있자니 허리가 아픕니다. 셋째 고통은 수많은 기자들의 습격입니다.”
  
   영원한 작별
  
  워싱턴에 도착한 지 사흘째인 11월 15일도 박정희 의장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오전 8시 정각에 케네디 대통령 군사고문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朴 의장이 머물고 있던 대사관저로 찾아와 조찬을 함께 하면서 한국군의 현 수준 유지와 현대화 문제를 의논했다. 오전 10시 朴 의장은 프리먼 농무부 장관을 방문하여 국토건설 사업과 이를 지원할 미국 잉여 농산물 도입을 의논했다. 오전 11시에 朴 의장은 다시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여기서는 전날 朴 의장이 제의했던 월남 파병이 주로 토의되었다. 이 회담은 점식식사로까지 이어져 계속되었다. 오후에 朴 의장은 하지스 상무장관을 방문했다. 63세의 노인인 하지스 장관은 박정희가 기자들에게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농담부터 했다.
  “기자들 등쌀에 불편이 많다고 들었는데 좋은 예방법을 가르쳐드릴까요.”
   그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검정고양이 塑像(소상)을 하나 꺼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걸 드릴 테니 기자들을 만나거든 이놈을 쓰다듬어 주십시오. 그러면 기자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겁니다.”
   朴 의장은 선물로 받은 검정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朴 의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명하고 민간 투자 유치에 대한 하지스 장관의 협조를 요청했다. 박 의장은 오후 4시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갔다. 朴 의장은 “5개년 계획이 시작되는 내년이 가장 어려운 해가 될 것 같다. 해외 차관의 형태로 특별한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케네디는 박정희가 제의했던 한국군의 월남 파병 건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이때는 미국 정부가 아직 군대를 보내지 않고 있을 때였다).
  “월남에 대한 우리의 원조는 당분간 경제적 지원, 그리고 장비 통신 같은 부문에 한정될 것 같습니다. 이 이상의 원조가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는 월남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는가, 자유를 위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만약 월남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고 자기 몫들을 다한다면 朴 의장이 제안한 것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朴 의장의 월남 파병 제의에 대해서 일단 “지금 단계에서는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 2년 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한 달 전에 일어난 고 딘 디엠 월남 대통령에 대한 군부 쿠데타와 이후의 정치불안이 미국을 수렁으로 끌어들인다. 고 딘 디엠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월남 군부의 쿠데타 모의를 알면서 지원했던 미국은 고 딘 디엠을 대체할 만한 강력한 월남 지도자를 끝내 발굴하지 못하고 월남 정부를 대신하여 공산 게릴라와의 전쟁을 떠맡게 된다. 이때 비로소 박정희의 월남 파병 제의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박정희에게 다음날로 예정된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의 연설에 대해서 충고한다.
  “기자들은 통상 그랬던 것보다는 아마도 박 의장에게 우호적으로 나올 것 같군요. 네루 총리도 곤란을 겪었고 흐루시초프의 경우에는 기자들이 스탈린에 관한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방문 일정을 중단할 뻔했거든요.”
   케네디 대통령은 “1951년에 잠시 한국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사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면서 “이번에 朴 의장께서 미국을 방문하시는 바람에 한국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朴 의장은 케네디의 訪韓을 초청했고 그는 “동북아시아로 가는 기회가 있으면 꼭 들르겠다”고 했다. 케네디는 朴 의장의 승용차까지 따라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케네디가 박정희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16년 간격으로 현직에 있을 때 암살됨으로써 生을 마감했다는 점에서도 같은 운명이었다.
  
[ 2011-04-22, 14: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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