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를 쓴 교수들이 한 일들
대한민국 建國 호칭 반대, 國軍의 이라크 파병 반대 단체 소속,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좌편향‘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 거부, 從北단체인 한총련, 범민련 비호 단체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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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種의 필자 37명 중 28명은 교사이고, 9명은 교수이다. 28명의 교사중 9명은 전교조 소속이다. 전교조는 일관되게 친북좌경적 활동을 해온 反교육적 단체이다. 교과서를 쓴 교수들이 참여한 활동을 조사해보았더니 아래와 같았다.
  
  *대한민국 建國 호칭 반대
  *國軍의 이라크 파병 반대 단체 소속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좌편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 거부
  *從北단체인 한총련, 범민련 비호 단체 소속
  
  
  한국사 교과서가 親北좌경적 성향이 강한 것은, 筆陣이 그렇기 때문이란 게 밝혀졌다. 그래도 李明博 정부가 그런 교과서를 敎科部 검정으로 통과시켜주었다. 共犯이 된 것이다. 교과서를 교사가 주로 쓴 것도 문제이다. 학자적 소양이 없는 운동권 성향의 사람들이 교과서를 만들면 찌라시나 불온문서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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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 필진 이념 성향 분석(김필재)
  
  올해 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다수의 좌파(左派)성향 교수 및 전교조 출신 교사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교과서 가운데 법문사와 삼화출판사 발간의 역사 교과서에는 좌파적 민중(民衆)사관 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금성출판사) 필진으로 참여했던 2명의 교사가 포함됐다.
  
   ■(주)삼화출판사가 발행한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6명의 일선교사로 전교조 및 전교조의 연대 단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이하 '전역모')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중현(양재고, 전역모), 박범희(중앙고, 전역모), 김쌍규(잠실고), 정행렬(도봉고) 등 4명의 교사 필진이 전교조 회원이며, 이인석(문정고)은 전역모 회원이다.
  
   이 가운데 이인석은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집필에도 참여했다.
  
   전역모는 전교조의 전신(前身)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시기와 비슷한 1988년 ‘역사교육을위한교사모임’으로 창립되어 1991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전역모는 현재 2천여 명(전체 역사교사의 1/3)의 역사교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거대 조직이다.
  
   단체는 그 동안 전교조와 함께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일본의 교원노조와 공동으로 한일(韓日)공동역사교과서인 ‘조선통신사’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전역모는 2003년 3월28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공동상임대표 이해동, 이이화, 김영훈)가 주도한 國軍의 이라크 파병 반대성명에 ‘역사문제연구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의 단체와 함께 참여했다.
  
   단체는 또 2004년 노무현 탄핵 당시 국회 탄핵소추 의결을,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던 세력의 후예들이 자행한 또 다른 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른바 ‘역사교사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전역모는 각 지역 산하단체로 하여금 해당 지역에서 조직되는 비상시국회의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것과 모든 역사교사들의 탄핵무효 운동에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법문사가 발간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5명의 현직 교사가 필진이다. 이 가운데 최준채(잠신고), 윤영호(한성과학고) 등 2명이 전교조 회원이다.
  
   또한 이인석(삼화출판사 필진 참여)과 함께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필진으로 참여했던 남궁원(서울고)이 법문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천재교육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6종 교과서 가운데 가장 많은 8명의 필진(교수, 교사)이 참여했다.
  
   5명의 교수출신 집필자 가운데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국사학과 교수,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임성모 연세대 사학과 교수 등 4명이 ‘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 서중석)의 연구위원 및 연구원이다. 이들 가운데 주진오, 박찬승 교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반대해온 학자이다.
  
   교사출신 집필진(총3명)으로는 경규칠(세화여고), 송옥란(신현고) 2명이 전교조 출신이다. 교수 출신 집필진 가운데 주진오 교수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근대화를 긍정한 ‘교과서포럼’(대표 박효종)의 대안교과서를 끊임없이 비판해온 인물이다.
  
   그는 2008년 12월3일 전북민주동우회에서 12월 월례회의(제목: 위험한 ‘대안’, 위기의 역사 교육)에서 대안 교과서가 대한민국 중심의 역사 서술을 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교과서포럼은 대안 교과서를 출간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글에서 현행 교과서가 북한 현대사를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은 체계 내에서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북한 수령 체제의 역사와 ‘한 지평에서 병렬적으로 서술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의 역사는 ‘보론’의 형식으로 체제를 달리하여 책 말미에 붙였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 후기 정통론적 역사의식과 서술을 연상시킨다.”
  
   그는 또 남북한 분단 문제를 언급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소련과 북(北)의 지배 집단이 먼저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여기에 맞서 남쪽도 분단 정부를 추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처 방법이었을까? 같이 분단 정부를 수립해서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간다면 이는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분단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민족의 통합과 미국과 소련의 타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분단을 저지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박찬승 교수(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상임부위원장)는 ‘마을로 간 한국전쟁’의 저자로 주진오 교수와 더불어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를 비판해왔다.
  
   그는 주진오 교수 등과 함께 계간 ‘역사비평’을 통해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는 개화파, 식민지배, 이승만, 박정희 등을 정당화하려는 편파적 서술이 많고, 곳곳에서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관계를 잘못 적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8년 5월28일자 인터넷 한겨레신문)
  
   박 교수는 또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했던 인물로 2001년 2월 강정구(동국대), 조희연-정해구(성공회대), 주진오(상명대) 교수 등과 함께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교수 1인 시위’를 벌였다. (2001년 2월14일자 오마이뉴스, 2001년 2월19일자 교수신문)
  
   이신철 교수는 국보법 폐지론자로 2008년 11월21일 ‘위클리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일제시대에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은 정당하다. 이후 북한만의 독특한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고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6.25를 일으키기도 했다”면서 김일성의 남침을 정당화했다.
  
   그는 또 ‘북한에도 국보법과 같은 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북(北)의 사회안전법도 국보법과 논리적 구성이나 처벌이 유사하다고 들었다. 정치범수용소를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한 관건인데 고문여부는 알 길이 없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국군 포로 문제와 관련해서도 “비전향장기수 돌려줄 때 북한에게 국군포로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북파 시켰던 사람들을 돌려달라고 해야 한다. 마치 우리는 북파한 간첩이 없는 것처럼 잡아뗀다”면서 북한을 옹호했다.
  
   임성모 교수는 2002년 10월5일 역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와 함께 2009년 5월27일 노무현이 자살하자 같은 해 6월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주도한 이른바 ‘역사연구단체 6.10 시국성명’에 참여했다.
  
   당시 시국성명은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생(노동자 장애인 빈민을 위한 사회정책), 민주(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민족(남북 화해 정책) 문제와 관련된 대책 마련과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따른 대통령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천재교육의 한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교수 출신 필진 5명 중 4명은 역사문제연구소 출신이다. 문제의 연구소(1986년 설립)는 정관에서 “민족사학을 지향하는 역사학의 연구 활동 및 교육지원을 통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연구소의 활동을 보면 ‘민족해방운동사-쟁점과 과제’, ‘민중과 유토피아’, ‘카프문학운동연구’ 등 사회주의 운동 중심의 역사 단행본을 비롯, ‘한국전쟁은 민중에게 무엇이었나’(2000년), ‘1920년대 사회주의와 청년담론’(2004), ‘박헌영 전집 출판기념 심포지엄’(2004) 등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 및 대중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연구소 이사장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온 학자로 2008년 8월24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정부수립’이 더 정확한 말이지요. 그리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좀 창피한 일 아닌가요?”
  
   그는 또 이승만이 “친일파로 하여금 독재정치나 부정선거를 하는 데 앞장서게 함으로써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단정 수립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지 이승만의 역할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역사문제연구소에는 강만길(고문), 박원순(감사), 임헌영(운영위원), 강정구(연구위원) 등의 좌파인사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 가운데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은 학계에서 줄곧 국보법폐지, 주한미군철수, 연방제통일, 한총련 합법화를 주장해온 인물로 “남한체제의 사회주의적 변화를 통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2003년 11월22일 민족통일학회 발언), “미국을 혈맹으로 보면 통일을 이룰 수 없다”(2004년 1월 31일 同학회 발언)는 등 일관되게 반미-민족공조 논리를 확산시켜 왔다.
  
   박원순(변호사)은 2008년 2월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고문 실태에 대해 “정보가 제한돼 있어서, 워낙 폐쇄적인 국가라 알 수 없다”고 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12년 만의 장기독재 끝에 이른 몰골은 바로 민주주의의 압살이다”(박원순 著, ‘야만시대의 기록’ 서문),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박원순 著, ‘국가보안법 3’, 중 160페이지)라는 주장을 해왔다.
  
   임헌영(본명 임준열,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등 수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남민전 사건은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 해도 84명(불고속자 포함)이 넘었다.
  
   구체적으로 남민전은 안용웅(安龍雄)등이 월북(越北),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통제를 받았으며, 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를 제작하기도 했다.
  
   강정구(前동국대 교수)는 줄곧 ‘6.25 남침 유도설’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그는 2010년 6월1일 모교에서 가진 고별강의에서 “천안함 사건화(事件化)는 한국과 미국, 일본의 수구세력이 역사의 흐름을 역행시키려고 주도한 발악”이라며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으로 만든 것이기에 ‘사건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가 2010년 발표한 ‘친북(親北)-반(反)국가 행위자 100인’ 명단에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 중인 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학계(전-현직)관계자가 총 17명이 선정 됐는데, 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6명이 역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운영위원․자문위원․연구위원이다.
  
   해당 명단은 △리영희(2010년 사망, 前한양대 교수), △강정구(前동국대 교수),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한홍구-정해구(성공회대 교수), △손호철(서강대 교수)이다.
  
   ■(주)미래엔컬쳐그룹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6명으로 이 가운데 교수 출신이 2명, 교사 출신이 4명이다.
  
   교수출신 집필자인 한철호(韓哲昊) 동국대 교수와 김기승(金基承) 순천향대 교수는 2008년 10월8일 역사교육연구회 등 21개 단체와 함께 교과부의 좌(左)편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을 거부했던 학자들이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인 韓 교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분단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이제 겨우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정부와 한나라당은 1940년대 냉전시대의 산물인 좌·우편향을 얘기하고 있다”면서 “역사가 퇴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韓 교수는 2004년 10월27일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 교수 일천인 성명’에 참여했으며,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 주도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 김기승(金基承) 교수와 함께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김기승 교수는 ‘한국근현대 사회사상사 연구-배성룡의 진보적 민족주의론’, ‘조소앙이 꿈꾼 세계-육성교에서 삼균주의까지’, ‘배성룡과 안광천의 국가건설 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0집’ 등 사회주의 계열 인물들을 주로 연구해왔다.
  
   4명의 교사출신 필진 가운데 김인기(등촌고, 고려대 사학과卒), 조왕호(대일고, 고려대 사학과卒)는 2006년 보수성향의 뉴라이트 진영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년)을 내놓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같은 시기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았다.
  
   이 책은 근현대사를 서술하면서 김일성의 항일(抗日)을 집중 부각시킨 반면 이승만-박정희에 대해서는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월 혁명’, ‘군사 독재를 무너뜨린 민주주의의 승리’ 등의 제목을 달아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화의 주역인 두 대통령을 ‘독재자’로 폄하했다.
  
   두 교사는 또 2006년 5월 월간잡지 ‘민족21’(62호)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항일, 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그리고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생들에게만큼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가르쳐야 한다며 '청소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를 펴낸 마흔아홉 동갑내기 김인기(서울 등촌고), 조왕호(서울 대일고) 교사…….(중략) 이들은 ‘근현대사 논쟁’의 새 판짜기까지를 과감히 선언한다.
  
   같은 대학 사학과 동기로 만나 지난 2003년에는 한국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의 공동집필까지 맡았던 이들이 최근 논란의 중심으로 불리는 근현대사 논쟁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은 아니냐는 물음에 조왕호 교사가 웃으며 답한다. 하지만 이들이 펴낸 ‘청소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에는 어딘지 모르게 과거에는 다루지 않았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 오해(?)를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책이라고나 할까. 한 예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서술을 들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은 유격전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어 갔습니다…….(중략) 백두산 지구로 진출한 조선인 유격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도 전개하여 일제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이 인솔한 2군 6사의 보천보 전투입니다.”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은 여전히 우리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불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사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부터가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증폭되는 궁금증에 대해 김인기 교사가 말을 이어 받았다.
  
   “결국 역사를 바로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의 문제가 이 책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교양서적이 될 것이고,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보적으로 보여지겠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가장 일반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두 교사의 이러한 역사적 견해는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부분에 있어서도 기존의 접근과 다른 방식을 선보인다.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상당한 오해의 소지를 불러온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런 질문에 아주 적극적입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 때 자발적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쇼트트랙을 통해 미국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죠. 그만큼 아이들은 미국의 실체를 인식하고 있다고 봅니다.”
  
   김인기 교사의 말처럼 책에서는 미국을 굳이 한쪽 코너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이 역사적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교 역할만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몇몇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 시각을 담아내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때 건설해 놓은 근대 시설이 남쪽 경제에 끼친 영향은 극히 일부라는 분석과 박정희 정권 때의 경제 발전 신화가 베트남 전쟁과 값싼 노동력 착취로 가능했다는 인식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외에도 ‘청소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는 2005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1차 친일파 명단을 인용, 이들의 친일 행적을 소개하기도 한다……. (중략)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일은‘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과거 이승만 정권 때 반민특위의 실패가 친일파 득세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부끄러운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들은 ‘청소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의 인세 수익금 일부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기부할 생각이라고 한다. 독립 운동가였던 이승만이 왜 친일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아느냐는 묻는 질문에 논리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청소년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을 그리며, 오늘도 두 교사는 그릇된 역사 인식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교단에 선다.》
  
   ■지학사가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5명으로 교수출신이 1명, 교사출신이 4명이다.
  
   교수출신 집필자인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2000년 7월18일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 주도한 국보법 폐지 성명에 75개 대학 1472명의 교수들과 함께 서명했다.
  
   민교협은 좌파성향 교수들의 협의체로 ‘국보법폐지국민연대’, ‘민중연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등 좌파 단체와 연대해왔다.
  
   단체는 2002년 5월30일 250개 단체 공동성명에서 김정일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해 온 한총련, 범민련에 대해 “애국애족과 조국통일의 한길에서 한 결 같이 걸어온”,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치하를 해도 모자랄 판”, “일신의 안락을 마다하고 오직 조국사랑과 민족사랑에 의거하여 한발 한발 걷고 있는” 운운하며 합법화를 주장했다.
  
   정 교수는 현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으로 2005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과정에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그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등 교수 3단체가 주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 파기 촉구 성명에 1008명의 교수 및 연구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지학사의 교사 출신 필진 4명 가운데 장종근(경기교) 교사는 전교조 회원이며, 오창훈(반포고) 교사는 교총 출신이다. 나머지 교사들의 교원단체 가입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 비상교육이 발간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모두 7명으로 교수 출신이 1명, 교사 출신이 6명이다.
  
   교수출신 필진으로 현대사 부분 집필에 참여한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교과부의 좌(左)편향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을 거부해온 학자다. 그는 2008년 11월11일 역사학자 676명이 참여한 ‘전국 및 해외 역사학자 선언문’의 서명 및 모금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교과부의 수정권고 조치에 대해 선언문은 “교과부의 수정 권고는 정부가 원하는 오직 한 가지 역사만 서술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헌법적 가치인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도 교수는 고은(시인), 백기완(사회주의자),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등과 함께 남로당 수괴(首魁)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편집위원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강정구(前 동국대 교수), 이종석(前 통일부장관)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비상교육 교과서의 경우 6명의 교사출신 집필자 가운데 2명이 교총출신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교사 출신 필진의 교원단체 가입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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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2, 2011
  Clues Gradually Led to the Location of Qaeda Chief
  By MARK MAZZETTI, HELENE COOPER and PETER BAKER
  WASHINGTON — For years, the agonizing search for Osama bin Laden kept coming up empty. Then last July, Pakistanis working for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drove up behind a white Suzuki navigating the bustling streets near Peshawar, Pakistan, and wrote down the car’s license plate.
  
  The man in the car was Bin Laden’s most trusted courier, and over the next month C.I.A. operatives would track him throughout central Pakistan. Ultimately, administration officials said, he led them to a sprawling compound at the end of a long dirt road and surrounded by tall security fences in a wealthy hamlet 35 miles from the Pakistani capital.
  
  On a moonless night eight months later, 79 American commandos in four helicopters descended on the compound, the officials said. Shots rang out. A helicopter stalled and would not take off. Pakistani authorities, kept in the dark by their allies in Washington, scrambled forces as the American commandos rushed to finish their mission and leave before a confrontation. Of the five dead, one was a tall, bearded man with a bloodied face and a bullet in his head. A member of the Navy Seals snapped his picture with a camera and uploaded it to analysts who fed it into a facial recognition program.
  
  And just like that, history’s most expansive, expensive and exasperating manhunt was over. The inert frame of Osama bin Laden, America’s enemy No. 1, was placed in a helicopter for burial at sea, never to be seen or feared again. A nation that spent a decade tormented by its failure to catch the man responsible for nearly 3,000 fiery deaths in New York, Washington and Pennsylvania on Sept. 11, 2001, at long last had its sense of finality, at least in this one difficult chapter.
  
  For an intelligence community that had endured searing criticism for a string of intelligence failures over the past decade, Bin Laden’s killing brought a measure of redemption. For a military that has slogged through two, and now three vexing wars in Muslim countries, it provided an unalloyed success. And for a president whose national security leadership has come under question, it proved an affirming moment that will enter the history books.
  
  The raid was the culmination of years of painstaking intelligence work, including the interrogation of C.I.A. detainees in secret prisons in Eastern Europe, where sometimes what was not said was as useful as what was. Intelligence agencies eavesdropped on telephone calls and e-mails of the courier’s Arab family in a Persian Gulf state and pored over satellite images of the compound in Abbottabad to determine a “pattern of life” that might decide whether the operation would be worth the risk.
  
  As more than a dozen White House, intelligence and Pentagon officials described the operation on Monday, the past few weeks were a nerve-racking amalgamation of what-ifs and negative scenarios. “There wasn’t a meeting when someone didn’t mention ‘Black Hawk Down,’ ” a senior administration official said, referring to the disastrous 1993 battle in Somalia in which two American helicopters were shot down and some of their crew killed in action. The failed mission to rescue hostages in Iran in 1980 also loomed large.
  
  Administration officials split over whether to launch the operation, whether to wait and continue monitoring until they were more sure that Bin Laden was really there, or whether to go for a less risky bombing assault. In the end, President Obama opted against a bombing that could do so much damage it might be uncertain whether Bin Laden was really hit and chose to send in commandos. A “fight your way out” option was built into the plan, with two helicopters following the two main assault copters as backup in case of trouble.
  
  On Sunday afternoon, as the helicopters raced over Pakistani territory, the president and his advisers gathered in the Situation Room of the White House to monitor the operation as it unfolded. Much of the time was spent in silence. Mr. Obama looked “stone faced,” one aide said. Vice President Joseph R. Biden Jr. fingered his rosary beads. “The minutes passed like days,” recalled John O. Brennan, the White House counterterrorism chief.
  
  The code name for Bin Laden was “Geronimo.” The president and his advisers watched Leon E. Panetta, the C.I.A. director, on a video screen, narrating from his agency’s headquarters across the Potomac River what was happening in faraway Pakistan.
  
  “They’ve reached the target,” he said.
  
  Minutes passed.
  
  “We have a visual on Geronimo,” he said.
  
  A few minutes later: “Geronimo EKIA.”
  
  Enemy Killed In Action. There was silence in the Situation Room.
  
  Finally, the president spoke up.
  
  “We got him.”
  
  Filling in the Gaps
  
  Years before the Sept. 11 attacks transformed Bin Laden into the world’s most feared terrorist, the C.I.A. had begun compiling a detailed dossier about the major players inside his global terror network.
  
  It wasn’t until after 2002, when the agency began rounding up Qaeda operatives — and subjecting them to hours of brutal interrogation sessions in secret overseas prisons — that they finally began filling in the gaps about the foot soldiers, couriers and money men Bin Laden relied on.
  
  Prisoners in American custody told stories of a trusted courier. When the Americans ran the man’s pseudonym past two top-level detainees — the chief planner of the Sept. 11 attacks, Khalid Shaikh Mohammed and Al Qaeda’s operational chief, Abu Faraj al-Libi — the men claimed never to have heard his name. That raised suspicions among interrogators that the two detainees were lying and that the courier probably was an important figure.
  
  As the hunt for Bin Laden continued, the spy agency was being buffeted on other fronts: the botched intelligence assessments about weapons of mass destruction leading up to the Iraq War, and the intense criticism for using waterboarding and other extreme interrogation methods that critics said amounted to torture.
  
  By 2005, many inside the C.I.A. had reached the conclusion that the Bin Laden hunt had grown cold, and the agency’s top clandestine officer ordered an overhaul of the agency’s counterterrorism operations. The result was Operation Cannonball, a bureaucratic reshuffling that placed more C.I.A. case officers on the ground in Pakistan and Afghanistan.
  
  With more agents in the field, the C.I.A. finally got the courier’s family name. With that, they turned to one of their greatest investigative tools —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began intercepting telephone calls and e-mail messages between the man’s family and anyone inside Pakistan. From there they got his full name.
  
  Last July, Pakistani agents working for the C.I.A. spotted him driving his vehicle near Peshawar. When, after weeks of surveillance, he drove to the sprawling compound in Abbottabad, American intelligence operatives felt they were onto something big, perhaps even Bin Laden himself. It was hardly the spartan cave in the mountains that many had envisioned as his hiding place. Rather, it was a three-story house ringed by 12-foot-high concrete walls, topped with barbed wire and protected by two security fences. He was, said Mr. Brennan, the White House official, “hiding in plain sight.”
  
  Back in Washington, Mr. Panetta met with Mr. Obama and his most senior national security aides, including Mr. Biden, Secretary of State Hillary Rodham Clinton and Defense Secretary Robert M. Gates. The meeting was considered so secret that White House officials didn’t even list the topic in their alerts to each other.
  
  That day, Mr. Panetta spoke at length about Bin Laden and his presumed hiding place.
  
  “It was electric,” an administration official who attended the meeting said. “For so long, we’d been trying to get a handle on this guy. And all of a sudden, it was like, wow, there he is.”
  
  There was guesswork about whether Bin Laden was indeed inside the house. What followed was weeks of tense meetings between Mr. Panetta and his subordinates about what to do next.
  
  While Mr. Panetta advocated an aggressive strategy to confirm Bin Laden’s presence, some C.I.A. clandestine officers worried that the most promising lead in years might be blown if bodyguards suspected the compound was being watched and spirited the Qaeda leader out of the area.
  
  For weeks last fall, spy satellites took detailed photographs, and the N.S.A. worked to scoop up any communications coming from the house. It wasn’t easy: the compound had neither a phone line nor Internet access. Those inside were so concerned about security that they burned their trash rather than put it on the street for collection.
  
  In February, Mr. Panetta called Vice Adm. William H. McRaven, commander of the Pentagon’s 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to C.I.A. headquarters in Langley, Va., to give him details about the compound and to begin planning a military strike.
  
  Admiral McRaven, a veteran of the covert world who had written a book on American Special Operations, spent weeks working with the C.I.A. on the operation, and came up with three options: a helicopter assault using American commandos, a strike with B-2 bombers that would obliterate the compound, or a joint raid with Pakistani intelligence operatives who would be told about the mission hours before the launch.
  
  Weighing the Options
  
  On March 14, Mr. Panetta took the options to the White House. C.I.A. officials had been taking satellite photos, establishing what Mr. Panetta described as the habits of people living at the compound. By now evidence was mounting that Bin Laden was there.
  
  The discussions about what to do took place as American relations with Pakistan were severely strained over the arrest of Raymond A. Davis, the C.I.A. contractor imprisoned for shooting two Pakistanis on a crowded street in Lahore in January. Some of Mr. Obama’s top aides worried that any military assault to capture or kill Bin Laden might provoke an angry response from Pakistan’s government, and that Mr. Davis could end up dead in his jail cell. Mr. Davis was ultimately released on March 16, giving a freer hand to his colleagues.
  
  On March 22, the president asked his advisers their opinions on the options.
  
  Mr. Gates was skeptical about a helicopter assault, calling it risky, and instructed military officials to look into aerial bombardment using smart bombs. But a few days later, the officials returned with the news that it would take some 32 bombs of 2,000 pounds each. And how could the American officials be certain that they had killed Bin Laden?
  
  “It would have created a giant crater, and it wouldn’t have given us a body,” said one American intelligence official.
  
  A helicopter assault emerged as the favored option. The Navy Seals team that would hit the ground began holding dry runs at training facilities on both American coasts, which were made up to resemble the compound. But they were not told who their target might be until later.
  
  Last Thursday, the day after the president released his long-form birth certificate — such “silliness,” he told reporters, was distracting the country from more important things — Mr. Obama met again with his top national security officials.
  
  Mr. Panetta told the group that the C.I.A. had “red-teamed” the case — shared their intelligence with other analysts who weren’t involved to see if they agreed that Bin Laden was probably in Abbottabad. They did. It was time to decide.
  
  Around the table, the group went over and over the negative scenarios. There were long periods of silence, one aide said. And then, finally, Mr. Obama spoke: “I’m not going to tell you what my decision is now — I’m going to go back and think about it some more.” But he added, “I’m going to make a decision soon.”
  
  Sixteen hours later, he had made up his mind. Early the next morning, four top aides were summoned to the White House Diplomatic Room. Before they could brief the president, he cut them off. “It’s a go,” he said. The earliest the operation could take place was Saturday, but officials cautioned that cloud cover in the area meant that Sunday was much more likely.
  
  The next day, Mr. Obama took a break from rehearsing for the White House Correspondents Dinner that night to call Admiral McRaven, to wish him luck.
  
  On Sunday, White House officials canceled all West Wing tours so unsuspecting tourists and visiting celebrities wouldn’t accidentally run into all the high-level national security officials holed up in the Situation Room all afternoon monitoring the feeds they were getting from Mr. Panetta. A staffer went to Costco and came back with a mix of provisions — turkey pita wraps, cold shrimp, potato chips, soda.
  
  At 2:05 p.m., Mr. Panetta sketched out the operation to the group for a final time. Within an hour, the C.I.A. director began his narration, via video from Langley. “They’ve crossed into Pakistan,” he said.
  
  Across the Border
  
  The commando team had raced into the Pakistani night from a base in Jalalabad, just across the border in Afghanistan. The goal was to get in and get out before Pakistani authorities detected the breach of their territory by what were to them unknown forces and reacted with possibly violent results.
  
  In Pakistan, it was just past midnight on Monday morning, and the Americans were counting on the element of surprise. As the first of the helicopters swooped in at low altitudes, neighbors heard a loud blast and gunshots. A woman who lives two miles away said she thought it was a terrorist attack on a Pakistani military installation. Her husband said no one had any clue Bin Laden was hiding in the quiet, affluent area. “It’s the closest you can be to Britain,” he said of their neighborhood.
  
  The Seal team stormed into the compound — the raid awakened the group inside, one American intelligence official said — and a firefight broke out. One man held an unidentified woman living there as a shield while firing at the Americans. Both were killed. Two more men died as well, and two women were wounded. American authorities later determined that one of the slain men was Bin Laden’s son, Hamza, and the other two were the courier and his brother.
  
  The commandos found Bin Laden on the third floor, wearing the local loose-fitting tunic and pants known as a shalwar kameez, and officials said he resisted before he was shot above the left eye near the end of the 40-minute raid. The American government gave few details about his final moments. “Whether or not he got off any rounds, I frankly don’t know,” said Mr. Brennan, the White House counterterrorism chief. But a senior Pentagon official, briefing on the condition of anonymity, said it was clear Bin Laden “was killed by U.S. bullets.”
  
  American officials insisted they would have taken Bin Laden into custody if he did not resist, although they considered that likelihood remote. “If we had the opportunity to take Bin Laden alive, if he didn’t present any threat, the individuals involved were able and prepared to do that,” Mr. Brennan said.
  
  One of Bin Laden’s wives identified his body, American officials said. A picture taken by a Seals commando and processed through facial recognition software suggested a 95 percent certainty that it was Bin Laden. Later, DNA tests comparing samples with relatives found a 99.9 percent match.
  
  But the Americans faced other problems. One of their helicopters stalled and could not take off. Rather than let it fall into the wrong hands, the commandos moved the women and children to a secure area and blew up the malfunctioning helicopter.
  
  By that point, though, the Pakistani military was scrambling forces in response to the incursion into Pakistani territory. “They had no idea about who might have been on there,” Mr. Brennan said. “Thankfully, there was no engagement with Pakistani forces.”
  
  As they took off at 1:10 a.m. local time, taking a trove of documents and computer hard drives from the house, the Americans left behind the women and children. A Pakistani official said nine children, from 2 to 12 years old, are now in Pakistani custody.
  
  The Obama administration had already determined it would follow Islamic tradition of burial within 24 hours to avoid offending devout Muslims, yet concluded Bin Laden would have to be buried at sea, since no country would be willing to take the body. Moreover, they did not want to create a shrine for his followers.
  
  So the Qaeda leader’s body was washed and placed in a white sheet in keeping with tradition. On the aircraft carrier Carl Vinson, it was placed in a weighted bag as an officer read prepared religious remarks, which were translated into Arabic by a native speaker, according to the senior Pentagon official.
  
  The body then was placed on a prepared flat board and eased into the sea. Only a small group of people watching from one of the large elevator platforms that move aircraft up to the flight deck were witness to the end of America’s most wanted fugitive.
  
  Reporting was contributed by Elisabeth Bumiller, Charlie Savage and Steven Lee Myers from Washington, Adam Ellick from New York, and Ismail Khan from Peshawar, Pak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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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7, 06: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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