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高校한국사 교과서, 김일성 '항일'(抗日)집중 부각
이승만 독립운동, 2종의 교과서만 간략하게 기술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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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5종의 교과서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抗日)운동을 집중 부각시켜 서술했다.

 

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2종의 교과서가 독립협회 활동, 1930년대 이후 독립 운동을 간략하게 다뤘다.

 

5종의 교과서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기술하면서 이들이 물자 보급을 위해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을 구별하지 않고 강탈행위를 했던 점,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 약탈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점 등을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은 김일성·최현·김책·최용건 등 북한 정권의 핵심 세력이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군사간부로 활동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 및 문헌을 일본에서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등 친북좌파 성향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저작 활동을 했다.

 

하루키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은 북한에 있으며,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국내에 소개된 하루키의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년),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년), ‘한국 전쟁’(1999년), ‘북조선-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2002년),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년) 등 다수가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서동만, 이종석 등 좌파 학자들이 하루키의 저서를 대거 수용,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기정사실화 했다. 1992년 이종석은 하루키의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의 번역서를 출간했으며, 서동만은 2002년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를 번역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8명의 집필진 가운데 6명이 좌파 성향인 천재교육은 7장 ‘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 운동의 발전’에서 한 페이지(280페이지)를 할애, 한인(韓人) 공산주의자 주도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중국 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을 집중 부각시켜 서술했다.

 

■(주)미래엔컬처그룹은 천재교육과 마찬가지로 7장 301페이지에서 중국 공산당 중심의 '동북인민혁명군'(훗날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의 항일 및 ‘보천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전후 북한의 정치-경제 변화'(347페이지)에서 반(反)김일성 세력 숙청을 소개하면서 “북한 정권은 김일성과 그를 따르는 항일 유격대 출신 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후 복구 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고 기술했다.

 

■비상교육은 7장 290~291페이지 ‘만주 지역의 항일 유격 투쟁’에서 “1920년대 초부터 만주 지방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우리 농민들의 의식도 변화하였다”면서 ‘동북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를 소개했다. 비상교육은 ‘조국광복회’를 ‘동북항일연군’ 내의 민족 운동가들이 이념의 차이를 초월해 반일(反日) 공동 전선을 만들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설명했다.

 

북한은 ‘조국광복회’를 “조선인민의 역사에서 최초의 주체형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이며,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를 통일전선운동에 철저히 구현한 강력한 지하혁명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조국광복회 결성으로 항일무장투쟁 승리를 가져왔고 결국 조선해방을 앞당기게 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조선로동당력사』, 1979년 판, 118∼140쪽),『력사사전Ⅱ』, 1985년 판, 299∼301쪽, 『현대조선력사』, 1983년 판, 제4장 2절).

 

■(주)삼화출판사는 7장 279페이지에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단결을 추구하였다”면서 ‘동북항일연군’이 마치 만주지역 항일 운동 주도단체인 것처럼 서술했다.

 

이와 함께 삼화출판사는 비상교육과 마찬가지로 ‘조국광복회’를 “이념과 민족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해 결성된 단체”로 기술했다. 삼화출판사는 ‘역사의 창’에서 한낱 난동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소개했다.

 

■지학사의 경우 7장 242페이지에서 ‘만주에서의 항일 유격 투쟁’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만주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었다”면서 ‘동북항일연군’을 소개했다.

 

김일성 항일(抗日)운동의 실체

김일성과 김정일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자신들 가족의 혁명역사로 모두 왜곡해 버린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례로 1871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북한은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주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조선력사 3권 93~94쪽)

 

김일성은 또 자신의 경력을 조작해 북한 인민공화국의 창건을 합법화 하고 스스로 수상이 됐다.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권을 가리켜 “친일 부역 배들인 한민당과 이승만이 결탁하여 세운 미제의 괴뢰(傀儡)정부이므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고 그 근거는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던 김일성 자신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1941년 이후 김일성은 소련군에 입대해 대위가 됐으며,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와 모든 권력을 혼자서 독식하는 스탈린식 독재체제를 이룩했다. 실제로 그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북한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해 10,000여명의 젊은이를 뽑아 소련 군사학교에 위탁교육 시켜 미래 장교들을 양성했으며, 병사들을 징집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입국환영 평양 군중대회에서 사진을 보면 그의 뒤에는 여러 명의 소련군 고위 장교들이 소련기 아래 서 있다. 이것은 김일성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공식간행물에 나오는 바로 이 동일한 사진에는 당시 소련군 장교들과 소련기를 지워 놓고 있다.

 

김일성은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면 친일파를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이자 현재까지 북한의 실력자인 김영주(金英柱)는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으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康良煜)도 종교-문화부문의 친일파였다.

 

과거 남로당 실력자로 6.25 전쟁기간 중 서울시 인민 위원장이었던 이승엽(李承燁)의 경우 일제시대 인천양곡조합 간부였다. 남로당 간부였던 정백(鄭栢)등도 친일파였다.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역사적 사변으로 일컬으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왔다. 일례로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교과서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과서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상한 구석이 발견된다.

 

몇 명의 전투원이 참가하고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 구체적 전과(戰果)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보천보 전투를 통해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할 것을 외쳤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만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해 보천보를 습격했다고 한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 장군을 연구하다 수년 전 타계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을 통해 북한의 이 같은 역사조작을 밝힌 바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 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지휘 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로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변명(變名)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 해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 고려대 교수이다.

 

재일동포로 조총련 전문가인 허 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2002년 8월 27일자 미래한국신문)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결국 위와 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모두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사실을 미화하고 과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2011-05-02, 18: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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