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업적-경제 사상(2)
배재학당 시절부터 '서향(西向)노선' 확실히 밟아

정리/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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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감옥에서 학교와 도서실을 열어 어린이 죄수들을 가르쳤던 무렵의 이승만(왼쪽 세번째)/190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한 이승만(세째줄 왼쪽 끝)
이승만은 조선왕조가 개항을 통해 근대적 문명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기 바로 한 해 전인 1875년이었다. 구(舊)체제 하에서 태어난 이승만은 자신의 지적(知的) 성장과정에서 왕조시대와 농경문화를 버리는 대신 근대사회와 산업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소년기의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유학(幼學)이었다. 그는 과거 등과(登科)를 위해 여느 양반집 자제와 마찬가지로 서당에 다녀, 전통적 충군(忠君)사상을 체화했다. 그러던 그가 근대-산업주의자로 변모하게 된 것은 1894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한다. 첫째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영익 著, 『이승만의 삶과 꿈』, p.22) 첫째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히려 갑오경장에 의해 과거제도가 폐지된 사실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승만이 전근대적 사회체제에 더 이상 집착할 유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895년 2월, 이승만은 만 스무 살의 나이로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배재학당 입학이야말로 이승만이 근대-산업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어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곧 정치적 자유”였다.
  
  당시의 배재학당은 ‘국제적 분위기’의 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배재대학(Pai Chai College)라 불릴 정도로 학문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승만의 세계관 돌변은 단발(斷髮) 결행이 극적으로 상징한다. 상투는 ‘케케묵은 과거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근대-산업주의는 당연히 서구 지향적이었다. 또한 그것의 사상적 배경은 당시 제국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진화론이었다. 이승만은 사회진화의 일반법칙에 따라 조선 역시 서구사회의 발전행적을 따라가야 한다는 개화파의 생각을 공유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서구지향 노선, 이른바 ‘서향(西向)노선’을 확실히 밟은 것이다. 이승만은 유교가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동양의 전통을 버렸다. 또한 상투를 자르고 족보 이야기를 싫어하면서 조선의 전통도 버렸다.
  
  이승만은 오직 서구가 밟았던 근대적 산업화의 길만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20세기 벽두,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농업이 아닌 상업 및 무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갈파했다. (이승만, “이젠 천하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 『제국신문』1901년4월19일자)
  
  그는 농사는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는 것이 “이전 세월에는 극히 통리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바다에 막혀” 국가 간의 내왕이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상업흥왕(商業興旺)함에 달렸으니 지금은 천하의 큰 근본을 장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면적이 좁고 기후가 불순하며 토지 또한 비옥하지 못한 영국이 국제교역을 통해 “나라의 부강함이 천하 각국 중에 제일”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로 들었다.
  
  또한 그는 국제통상의 장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는데, 상업관계가 있는 나라들끼리 전쟁이 없다는 점, 각 나라들이 자신에게 있는 것들은 서로 바꾸게 되어 피차 이익을 본다는 점, 상품교환 과정에서 토지와 인재를 배양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항구에 세납(稅納)이 증가하고, 철로, 윤선(輪船) 등의 사업이 흥행함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승만의 근대 경제사상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도 확인된다. 그는 일제치하의 모든 정신적 고난을 “오직 우리에게 경제력이 없는 연고”라고 진단하고 “자본을 합하여 공업, 상업 등 모든 경제근원을 공동적으로 착수”하자고 촉구했다.
  
  이승만의 근대-산업주의 사상은 해방 이후 보다 체계화됐다. 그는 1946년 2월에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서 “우리 경제와 공업을 속히 발전” 시키기 위해 “중요한 공업과 광업과 임업과 은행과 철도와 통신과 운수와 모든 공익기관 등 사업을 국유로 만들어 발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남실록편찬회(편) 『우남실록, 1945-1948』 서울:열화당, 1976, p.183)
  
  또한 1946년 5월26일 이승만 ‘조선의 부강대책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면서 농업 대신 상공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국가적 목표로 선언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한정된 토지에 의존하기 보다는 “국내에 잠겨있는 모든 자원을 개발함으로써 국제 무역권에 참가하여 농업국으로서 산업국으로 발전 향상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근대-산업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한 일본은 조선의 새로운 발전 모델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정식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p.166)
  
  개항을 약속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은 이승만이 볼 때 ‘다행한 일’이었다. 특히 1940년 11월에 서울을 떠난 그가 일본에서 눈으로 직접 경험한 서구문명은 감탄과 경이 그 자체였다.
  
  일본의 발전상에 매료된 근대-산업주의자 이승만에게 미국은 신천지이자 별천지였다. 미국에 간 이승만은 그 무렵의 한반도 전체가 “감옥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미국을 '극락국'으로 평했는데 그에게 미국은 근대 산업국가의 이상향이었다.
  
  
  
  
  
  
  
  
[ 2011-05-04, 09: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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