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켜낸 軍人의 역할을 왜곡ㆍ묵살한 교과서
‘建軍’의 의미도 외면해…특히 5ㆍ16 혁명과 5ㆍ18 광주사태 부분에서 軍에 대한 ‘가혹한 비판’ 두드러져

趙成豪(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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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나온 國軍(국군) 관련 내용을 분석한 결과, ‘建國(건국)’과 더불어 ‘建軍(건군)’이라는 용어가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으며 6ㆍ25 남침전쟁 당시 북괴군의 기습을 방어한 전쟁영웅에 대한 설명도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5ㆍ16 혁명(교과서에는 주로 ‘군사정변’, ‘쿠데타’라고 서술), 5ㆍ18 광주사태(교과서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기술)를 다룰 땐 軍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두드러졌다.
  
  ‘건군’에 대해 소개한 교과서는 6종 중 두 개[지학사, (주)삼화출판사]였다. 설명도 간단했다. 지학사 교과서는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은 5개 여단에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갖췄다. 국군의 주요 인사에는 한국광복군, 일본군, 만주군이 섞여 있었다(270페이지)”가 전부였다. (주)삼화출판사 교과서 역시 “남한에서도 조선경비대를 국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318페이지)”고만 적었다. 建軍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듯 했다. 나머지 교과서는 국군의 탄생 과정에 대한 설명을 수록하지 않았다. 6ㆍ25 남침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용문산 전투’, ‘영천 전투’ 등 주요 戰功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6ㆍ25 전쟁 당시 국군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에 도달할 즈음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여 12월에는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였다(법문사, 324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까지 다다랐을 때,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였다(천재교육, 326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이 총공세를 펼친 낙동강 방어선에서 1개월 이상 혈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지학사, 277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삼화출판사, 319페이지).”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다(비상교육, 326페이지).”
  “국군과 유엔군은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는데, 8월에 이르러 마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왜관을 거쳐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미래엔, 343페이지).”

  
  주로 유엔군과 국군의 역할을 포괄적으로만 기술했을 뿐 당시의 치열한 접전과 북괴군의 만행, 중공군의 개입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썼다. 6ㆍ25 전쟁영웅인 白善燁(백선엽 ㆍ당시 육군참모총장), 金鐘五(김종오ㆍ당시 6ㆍ9사단장, 후에 육군참모총장) 장군의 활약상도 다루지 않았다. (주)미래엔컬처그룹과 비상교육 교과서는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이름도 기술하지 않았다.
  
  전쟁 中 벌어진 남북간 대립에 대해서는 남한에 비판적으로 기술한 것이 있었다.
  
  지학사 교과서 288페이지 <일상다반사>란 코너에서는 6ㆍ25 당시 학도병으로 활약한 한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와 함께 “북한 인민군에도 17, 18세 소년병이 많았다. 소년병들은 전술요령을 알지 못하고 전투 경험을 쌓지 못하여 희생이 더욱 컸다”란 설명을 덧붙였다. 북괴군도 전쟁의 피해자란 인상을 준다. 비상교육 교과서 327페이지에는 左派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故 이영희(前 한양대 교수) 씨의 著書 《분단을 넘어서》를 소개했다. 책의 내용 중 “얼마나 많은 동포가 서로 쏘고 찌르고, 죽고 죽였는가”라는 부분이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서술이다. 일종의 양비론적 記述(기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5ㆍ16 혁명과 5ㆍ18 광주사태에 대한 기술에서 군에 대한 설명은 더욱 비판적이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5ㆍ16 혁명과 5ㆍ18 광주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세력들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1961년 5월16일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장악한 후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 한편, 군사정부는 반대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중요한 정보를 독점하고 비판 세력을 탄압하였다(351~352페이지).”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벌이던 전남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357페이지)”
  
  이어 혁명 정부의 시책인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 ‘화폐 개혁’등을 설명하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썼으며, “군사정부는 반대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활동 정화법’, ‘반공법’등을 실시하여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시키고…”라며 비판적 서술만을 적었다.
  
  2011년 3월14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5·16, 우리에게 무엇인가>란 학술 세미나에서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5ㆍ16은 단기적 관점에서는 쿠데타지만 5ㆍ16세력이 민족사적 빈곤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이끌어 냈기 때문에 사후적 정당성(事後的 正當性)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 시대 18년은 장기적ㆍ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취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宋復(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월간조선》2011년 5월호에 기고한 <5ㆍ16없이 지금의 대한민국 없다>에서 “5ㆍ16이 일어나던 1960년대 초에서 민주화로 이행되던 1980년대 말까지, 불과 30년 사이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탈바꿈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그 탈바꿈의 과정은 너무 치열했다. GNP증가율이 연 10% 내외로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수천 년 꼭 같았던 한 모델의 ‘낡은’ 국가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델의 다른 국가체제로 전환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국가의 창건, 바로 국가개조였다”고 5ㆍ16 혁명을 평가했다.
  
  5ㆍ18 광주사태 부분을 교과서가 다룰 때에도 軍에 대한 일방적 비판이 주를 이룬다. 1995년 검찰 조사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계엄군 역시 시민군에 의해 人命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발포 명령자 또한 없었다고 확인된 바 있다. 당시 11공수여단 61대대장(중령) 이었던 安富雄(안부웅ㆍ예. 육군대령) 씨가 趙甲濟 기자의 著書《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증언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이다. … (1지역대장이 무전으로)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 달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다.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과서들이 광주사태를 기술한 내용을 보면 軍의 입장은 반영돼 있지 않다.
  
  “신군부는 공수부대 등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고…(지학사, 307페이지)”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삼화출판사, 356페이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은 시위를 광주 전체로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고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저항하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천재교육, 367페이지).”
  “계엄군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점차 시민 봉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법문사, 347페이지)”
  “급파된 공수부대는 폭력을 휘두르며 학생과 시민을 대거 체포하였고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였다(미래엔컬처그룹, 367페이지).”

  
  계엄군 역시 시민군들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음에도 교과서는 그런 객관적인 시각을 배제한 채 서술한 것이다. 자세한 因果관계를 싣지 않아 학생들은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만 가한 것처럼 인식할 소지가 있다. 정확한 사실을 균형있게 다뤄야 하지만 全 교과서 모두 이 원칙을 외면했다.
  
  
[ 2011-05-07, 15: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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