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 찾기 힘든 李承晩의 독립운동
高校 한국사 6種 교과서 분석: 앞부분에 언급없다가 갑자기 ‘대통령’으로 깜짝 등장하고 바로 탄핵되는 李承晩

金秀姸(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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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校 한국사 교과서에서 李承晩(이승만)은 ‘현대사’ 부분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 시기에도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6種 교과서 모두 이승만이 첫 등장하는 부분은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다룬 내용에서다. 앞부분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이 갑자기 ‘대통령’으로 깜짝 등장하는 셈이다.

 

6種 교과서 중 특히 미래엔컬처그룹,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묵살(黙殺)하고 있었다. 

 

언급없다가 갑자기 ‘대통령’으로 깜짝 등장, 바로 탄핵되는 李承晩

 

미래엔컬처그룹刊 한국사 교과서에서 이승만의 첫 등장은 1919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서술한 부분에서 “임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임되었다”는 문장에서다. 교과서 상으로는 독립운동 부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갑자기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뒤 “미국에는 구미위원부를 두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라는 한 줄의 활동 설명이 있은 후, “이에 임시 정부는 미주 지역의 독립 자금을 독점하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고쳐 국무령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p.240), “미국 정부에 일본 대신 국제 연맹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p.241, ‘탐구활동’에서 신채호의 주장으로 소개)의 내용이 ‘독립운동’ 시기 이승만을 언급한 내용의 전부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승만의 첫 등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부분에서 한성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하였다는 내용에서다. 이후 “9월11일 제6차 임시의정원은 개정 헌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 임시정부의 내각을 조직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업무를 계속하였으며, 11월3일에 내각 취임식이 있었다”(p.235), “19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는 이승만 등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p.236) 등의 언급이 보인다.

 

그러다가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서 제출 사실이 언급된 후, “국민대표 회의 이후 임시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신할 대통령 대리 제도를 두려 하였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미주 동포들로부터 거둔 독립자금의 송금을 끊었다”(p.239)는 설명과 함께 대통령 탄핵의 내용이 등장한다. 활동에 대해서는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외교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1년 하와이에서 동지회를 설립하였다”(p.247)는 내용이 전부다.

 

<투옥된 독립협회 회원들(1898.12). 왼쪽 중죄수 복장을 하고 있는 이가 李承晩이다>


 

언급될만한 부분에도 李承晩은 생략

 

그 이외에 이승만이 언급될만한 사건이나 행사에서도 이승만은 생략되어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교과서의 경우,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의 무효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는 부분에서, “특히 미국에 지원을 호소했다”(p.176)는 내용이 소개되지만 이를 위해 밀사로 파견된 이승만은 언급되지 않는다. ‘미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p.232) 부분에서도 이승만은 찾아볼 수 없다. 대한인국민회 소개와 함께 안창호의 사진이 실려 있고,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전명운,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무장투쟁론자 박용만의 이름과 사진이 등장할 뿐이다.

 

3·1 운동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이 모여 3일간 한인 자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p.236)는 부분에서도 행사를 주도한 이승만, 서재필 등은 생략되어 있다. ‘독립군 자금 지원에 앞장 선 미주 동포들’(p.265) 부분에서도 안창호가 중심이 되었던 ‘대한인국민회’만 소개될 뿐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등은 언급되지 않았고, ‘미주 지역에서도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다’(p.309)에서 임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아내려는 외교 활동을 소개하면서도 이승만은 언급하지 않았다.

 

천재교육刊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주 지역 교민들의 활동을 다루는 내용이나 3·1 운동 후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한인자유대회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승만은 언급되지 않았다. “미군 OSS(미 육군 전략처)가 임시 정부와 협의하여 50명의 대원들을 선발하여 시안에서 첩보 훈련을 시작하였다”(p.279)는 내용에서도 처음 미국 측에 이를 제안하고 추진한 이승만의 노력은 생략되어 있다.

 

이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래엔컬처그룹刊, 천재교육刊 교과서만으로 학습하는 경우, 학생들에게 남는 ‘이승만’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과서 내용만으로 본다면 이승만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 박사를 취득한 명망 하나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완전독립에 반하는 위임통치를 요청하기도 하고, 대통령 대리 제도를 두려하자 자금을 끊어버린 외세의존적이고 몰상식한’ 사람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게다가 뒤에 등장하는 현대사 부분은 ‘독재자’ 이미지이니 앞뒤가 맞는 셈이다.

 

 

“미주에서 동포가 정부 상납하는 재정을 모아서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反이승만파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교과서에 등장

 

또 하나 특징적인 부분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분열 시기에 언급되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 내용이다. 미래엔컬처그룹 등 5種 교과서가 모두 이승만의 3·1 운동 직전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요청’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었다. 법문사刊 교과서만이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부 내 지도자들 사이에 대립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비상교육刊 교과서는 <활동>이라는 코너를 통해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요청’이 담겨진 청원서와 ‘반대파’들이 제출한 ‘이승만 불신임안 주문’ 내용 일부를 수록한 후 ‘이승만이 생각하는 독립의 방향을 말해보자’라고 질문을 던진다(p.236). ‘불신임안 주문’에는 “현임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 사업을 빙자하고, 미주에서 동포가 정부 상납하는 재정을 모아서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며 외교비 모집을 계속하여서 그 재정으로 자기의 지지자를 매수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에는 탐구활동에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이승만의 (   )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임시 정부의 (   )노선을 비판하고 해체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p.237)라는 괄호안 넣기 문제가 등장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과 李承晩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파리강화회의를 소집한다. 재미 한인사회는 이 회의를 이용해 한국의 독립을 얻는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이승만, 정한경 등을 평화회의 대표로 선출했지만, 이들은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결국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이승만과 정한경은 서재필 등과 의논한 결과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차선책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청원을 내는 것이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한 것으로 봤다. 2월25일자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완전독립을 담보로 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청원을 보냈으며, 실제 제출된 날짜는 3월3일이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이승만이 반대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것이 된다. 3·1 운동이 일어났는데도 위임통치를 요청했다는 것은 독립 의지를 버린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대로 추대된 사실을 5월 하순경에야 알게 되었는데, 한성정부는 정통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진다. 다양한 노선이 함께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나로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안창호였다. 6월28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미주의 이승만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통합이 어렵다고 생각해 양자의 중재에 나선다. 안창호는 7월20일 이승만에게 전보를 통해, 한국인들이 지지하고 있으며 위임통치 청원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상하이로 와 줄 것을 요청했다.

 

‘지나간 일’인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국무총리 이동휘였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 1921년 1월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첫날부터 위임통치청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승만은 위임통치는 3·1 운동 이전의 일이고 독립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맞섰다. 이동휘는 제2차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에게 대통령이 상하이에 없을 때 행정의 결재권을 국무총리, 즉 자신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이 대미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거부하자, 이동휘는 1월26일 국무총리를 사직한다고 선언했다. (이동휘는 이후 고려공산당 창당에 나선다)

 

이어 다른 간부들이 사표를 던지게 되면서 여론은 악화되어 갔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반대파는 주로 러시아 일대에 근거지를 둔 무장투쟁론파였는데, 이들은 한, 중, 러 3국이 협력해 독립전쟁을 치를 것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사관계 기관은 노령이나 만주로 옮길 것을 내세웠다. 그동안 외교노선에 큰 성과가 없었다는 점, 미국에서 건너온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으로서는 이들을 제압하거나 설득할 만한 특별한 명분이 없었고, 이런 식으로 상해 임시정부는 계속 사분오열되어 갔다. 이러한 임시정부에 희망을 찾지 못한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결국 대통령에서는 탄핵되었으나,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존중하면서 임시정부의 미주 지역 활동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듯 무장투쟁론파 등 反이승만파가 이승만 비난을 위해 이용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제안’ 건을 5種의 교과서에서 크게 다룬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그 문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이승만이 그의 비판자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는 구실이 되었을 뿐이다. 사실 그 문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지지조차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와 <신한민보>가 그 내용을 싣고, 그것을 상해에 전달함으로써 이승만을 비난한 수단으로 이용됐다”고 평가한다.

 

<1920년 12월28일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식. 이승만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하와이에서 네덜란드 선적의 화물선에 실린 관 속에 숨어 상해로 왔다. 당시 이승만은 일본 당국에 의해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사진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출처: 이승만과 그의 시대>

 

 

 그나마 이승만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는 교과서는 삼화출판사와 법문사 발간 교과서였다. 법문사刊 교과서는 ‘미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부분에서 이승만의 활동 내역을 소개했다.
 “1930년대 미주 지역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하였다. 1931년의 만주 사변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멀어지자, 이를 기회로 삼아 이승만은 외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먼저 그는 1933년에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삶을 추적한 저서를 제출하여 국제 연맹의 회원국들이 한국인의 인권 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럽의 여러 신문에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고발하는 글을 기고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하였다. 또, 이승만은 일본의 미국 공격이 있기 직전인 1941년에 일본의 미국 침공 가능성을 다룬 책(《일본, 그 가면의 실체》, 원저 JAPAN INSIDE OUT)을 출간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p.283)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에는 6·25 전쟁 이후 단원에서 <인물탐구: 이승만과 한국 근・현대사>라는 코너로 이승만의 일생을 요약하여 소개했다.
 “이승만(1875~1965)은 배재 학당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개화사상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독립 협회 활동을 하면서 만민 공동회 연사로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고종의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한성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인들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면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구미 위원부 대표로서 국제 연맹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김구, 김규식 등과 주도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946년 북한이 공산화되어 간다고 판단한 그는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남한만의 총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일생을 마쳤다.”(p.326)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다닐 당시 서재필의 제자였다는 것, 그 유명한 ‘독립협회’의 열성 회원이었다는 것, ‘만민공동회’의 인기 연사였다는 것, 1898년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했다는 것,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의 옥살이를 한 것, 그의 첫 도미(渡美)는 대한제국의 독립 지지를 미국에 요청하는 고종 황제의 밀사 자격(민영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한인고등교육 기관을 세우고 양성했다는 것,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버드, 프린스턴 등에서 수학해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점, 유학 당시 일본에 호의적인 분위기였던 미국 내에서 어렵게 독립운동을 벌여나간 것, 미국시민권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의 불편과 위험을 겪으며 독립운동 여행을 다닌 것, 독립운동 시절에도 좌우합작 등으로 치열했던 이념전 속에서 반공(反共)을 지킨 점, 미국조차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당당하고 깐깐했던 독립운동가이자 反共주의자였던 점 등이 제대로만 알려진다면 일부의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이승만’이라는 오해는 풀릴 수 있지 않을까. 

 

 

 

[ 2011-06-09, 15: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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