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빠져있는 現代史 장면들 ②
주요 對南(대남)도발 사건, 북한의 진실, 북한 정권 주도의 범죄

정리/金秀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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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對南(대남)도발 사건>
  
  17. 휴전 이후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연평균 8.2회: 북한의 화해 제스처와는 별도로, 북한의 대남도발은 꾸준히 있어왔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이후 2010년까지 북한은 요인 암살, 항공기 테러, 육상과 해상 도발, 대량살상무기 발사 등 무려 42만5000 여 차례나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이중 무력도발은 470여 건으로, 휴전 이후 북한의 큰 도발이 없었던 해는 1954년, 1956년, 1972년, 1988년, 1989년으로 단 5년에 불과하다. 연 평균 8.2회 꼴이며 이로 인해 군경, 민간인 합쳐 4119명이 납치되거나 사망했다. 연대별 주요 도발 건수를 보면 50년대 10건, 60년대 78건, 70년대 35건, 80년대 18건, 90년대 45건, 2000년대 35건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사이버 테러 등의 신종 대남도발도 발생하고 있다.
  
  18. 북한의 和戰兩面(화전양면) 전술: 앞에선 웃고, 뒤에선 도발을 꾀하는 북한의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은 계속되어 왔다. 1960년대에는 연방제 제의 후 1·21 무장공비 및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는 7·4 남북 공동성명 후 땅굴을 굴착하는 한편 8·18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3자회담 제의 후 미얀마에서 아웅산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민족단합 5개항’ 발표 후 얼마 안 있어 KAL 858기 폭파가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정주영 씨의 소떼 방북과 차관급 회담 제의 직후 동해안 잠수정침투사건이 일어났다. 2002년의 서해교전이 있었던 날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4강전이 있었던 날이었으며,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중 일어났다.
  
  19. 1.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아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세검정고개를 통과하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 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졌다. 군·경은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이 사건으로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했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한국으로 귀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20.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 승무원 83명을 태우고 북한 해안 40km 거리의 동해 공해상에서 업무수행 중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된 사건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행위를 비난하고 푸에블로호 및 그 승무원의 즉각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號)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출동시켰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학대·고문하여 그들이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였음을 시인·사과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해 미국이 불법 및 침략적 도발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쳤다. 사건발생 11개월 후인 1968년 12월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으며, 푸에블로호 함정과 함정에 설치된 비밀전자장치는 몰수했다.
  
  21. 美 EC-121기 피격사건(1969): 일본의 아쓰기 해군 비행장을 출발한 美 해군 소속 EC-121 워닝스타 조기경보기가 1969년 4월15일 14시경(한국시각) 동해상에서 북한 공군 소속 미그21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해상으로 추락한 사건이다. 탑승한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22. 이승복 어린이 사건(1969): 이승복은 강원도 평창군에서 태어나 1967년 3월2일에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 1968년 11월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 무단침입한 북한의 무장간첩에 의해 12월9일 밤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승복의 형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공비가 가족을 몰아넣고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라고 묻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해 공비들이 이승복의 입을 찢고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23. 8.15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1974):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이 대통령 朴正熙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이다. 총탄이 빗나가 대통령은 연설대 뒤에 몸을 피하여 무사했으나, 이어 발사한 탄이 단상에 앉아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머리에 명중했다. 육영수는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어 5시간 이상의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사망했다.
  
  24.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 1983년 10월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북한 테러분자의 폭파암살로 사상(死傷)한 사건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였던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행사를 위해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 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었다.
  
  25. KAL기 폭탄 테러사건(1987):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 김승일, 김현희에 의하여 공중폭파된 사건이다. 이들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이들은 기내에 시한폭탄과 액체폭발물을 두고 내렸다. 사건의 진상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미국은 즉각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하여 각종 제재를 가하였고, 일본도 북한공무원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88년 2월에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많은 국가가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했다.
  
  26. 제1연평해전(1999):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함정간의 해전을 가리킨다.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한국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한국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이 교전에서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하였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되었으며, 나머지 경비정 4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한국의 고속정과 초계함 등 2척도 북한 어뢰정이 발사한 함포를 맞아 선체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사자는 없으며,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수십 년 동안 남북한이 한반도 동서 해상의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인정해 왔던 북방한계선을 무시하고, 12해리 영해를 주장함으로써 영해문제를 다시금 부각시키려는 북한의 전술적 의도가 드러났다.
  
  27. 제2연평해전(2002): 제17회 월드컵 축구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25분경 제1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만에 같은 지역인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함정 사이의 해전으로,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다. 이 교전으로 해군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하였다. 북한 측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 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28. 금강산 피살 사건(2008): 2008년 7월11일 새벽, 북한 금강산 관광 지구에서 대한민국 국적의 여성 관광객 박왕자 씨(피격 당시 만 53세)가 북한의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북한군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이다.
  
  29. 대청해전(2009): 2009년 11월10일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대청도 동쪽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간에 일어난 전투를 가리킨다. 이날 북한의 상해급 경비정인 등산곶 383호가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고 남측의 경고 통신을 무시하고 2.2㎞를 계속 남하했다. 이에 대해 남측 해군의 고속정이 경고사격을 가하고 북측이 남측에 대해 조준사격을 해 옴으로써 비상사태를 발령한 후 대응사격을 가했다. 11시40분 북측의 경비정 등산곶 383호가 함포와 기관포의 파괴로 퇴각하자 남측은 사격을 중지했다.
  
  30. 천안함 폭침사건(2010): 2010년 3월26일 오후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2함대 소속 천안함(초계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해 침몰되었으며, 승조원 총 104명 중 46명이 전사했다.
  
  31. 연평도 포격사건(2010): 2010년 11월23일 북한이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사건이다. 이에 해병대 연평부대는 포격 직후 80여 발의 대응사격을 실시하였으며 도발직후 서해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북한의 도발임이 명확해지자 대한민국 국군은 전군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인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다. 남북간 교전 중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6·25전쟁 이후 처음이다. 중국을 제외한 각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했으나, 북한은 대한민국에 책임을 넘기며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진실>
  
  32.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투쟁: 1956년 2월에 열린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그동안 절대적 위치에 있던 스탈린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당 지도자의 우상화 작업을 중단하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북한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당내의 반발이 있었다. 1956년 8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 등이 주도해 김일성 우상화를 비판하고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집단화 정책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8월종파사건). 그러나 김일성 세력이 다수를 점하였던 탓에 전원회의 직후 이들은 중국이나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숙청되었다. 그 이후 ‘반종파투쟁’의 이름으로 8월종파사건에 연루된 반대파 세력의 주변 인물은 물론, 6.25 전쟁 당시에 월남한 사람의 가족, 전쟁 직후 숙청된 남로당의 잔존세력까지 이 시기에 모두 숙청되었다. 이후 북한의 지도부에는 거의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 세력만 남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1인 독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33. 금수산 기념궁전: 1994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일성의 시신은 영구보존 처리되어 금수산 의사당에 안치되었다. 김정일은 금수산 의사당에 화강석 70만 개를 깔고 주요시설을 순금으로 치장하는 데 9억 달러를 투입했다. 이는 당시 북한 주민 대부분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큰 액수의 돈이었다. 북한 전역에 우상화 작업으로 세워진 3만5000여개의 김일성 동상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4. 제1, 2차 북핵 실험: 1959년 舊(구)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한 북한은 1964년 영변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1985년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한 후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원자력 설비시설의 감찰에 관한 특별조약 체결을 맺는다. 1994년 북한은 미국과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을 맺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 포기 약속함에 따라 석유 및 경수로를 제공받지만, 2002년 북한은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공식 인정하고 2003년 NPT 재탈퇴를 선언한다. 2004년 6개국(대한민국, 북한,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과의 핵무기 분쟁 회담인 6자회담이 시작되지만,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 10월9일에 제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9년에는 4월 장거리 로켓 발사에 이어 5월25일 제2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35. 북한 인권문제: 1990년대 심각한 식량난으로 많은 북한 주민들이 餓死(아사)하면서, 목숨을 걸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96~7년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재중 탈북자는 20만~30만 명에 달했다. 북한 당국은 탈북자를 심하게 고문하고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는 등 가혹하게 처벌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 식량 위기가 완화되었지만, 낙후되고 억압적인 북한 독재체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이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으로 탈출한 여성 탈북자의 경우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데, 인신매매범들은 북한이나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의 처지를 악용하고 있어 심각한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다. 탈북자들은 치외법권 지역인 중국 주재 외교공관에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동남아시아나 몽골 등을 거쳐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36. 북한 정치범수용소: ‘정치적 죄’를 범한 자와 그의 가족을 수용하여 가혹하게 처벌하는 사회와 격리된 수용소를 의미한다. 북한에서는 관리소, 완전통제구역, 닫힌 구역, ‘0000부대’ 등으로 불린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 후반 남한을 도운 치안대나 적대계급을 몰아넣어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1970년대부터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반대파를 체계적으로 학살하고 공포정치로 사회를 통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소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설과 이전, 폐쇄, 통합 과정을 거쳐서 현재는 6곳이 운영 중이며, 약 20만 명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용소는 수감되면 출소할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일정기간 동안 강제노동을 한 후 수형 기간이 종료되면 석방되는 혁명화 구역(15호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 18호 북창수용소)으로 구분된다.
   죄명은 정치적 발언, 탈북과 한국행, 반정부행위, 김일성부자에 대한 비판, 연좌제 등이다. 그러나 당사자 외에 대부분의 수감자는 수감 사유와 죄명을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조부모, 부모, 친척의 잘못 때문에 수감된 것으로 알고 있다.
  
  37. 황장엽(黃長燁) 망명: 함북 주을 출생. 일본 주오대, 김일성종합대를 거쳐 모스크바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2년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고, 1964년 김일성을 보좌하는 내각 참사관으로 일했다. 1965년 43세의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수행하며 최고위층에 올랐다.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한때 북한 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김정일 및 북한 독재체제로 인한 갈등으로 망명을 결심했고,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하여 북한의 체제와 권력을 비판했다.
  
  
  <북한 정권 주도의 범죄>
  
  38. 북한의 마약 생산 및 판매: 북한에서는 국가가 마약을 만들어 몰래 해외에 팔고 있다. 마약의 생산과 판매는 1970년대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졌는데, 1992년 김정일이 ‘백도라지 사업’이라고 명명하고 국가 공식 사업으로 부각시키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마약을 100만 달러 이상 판매하는 사람에게 ‘백도라지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북한은 마약을 수출하기 위해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의 범죄 조직과 손을 잡기도 했다.
  
  39. 위조지폐 제작 및 유통: 1989년 필리핀에서 북한 외교관의 외교 행낭으로부터 북한산으로 보이는 위조지폐가 처음 발견되었다. 1994년 이후는 거의 매년 북한 지도부가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위조지폐가 적발되었다. 1996년 3월에는 일본 적군파 출신으로 북한에 망명한 사람이 북한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동남아에서 위조지폐 300만 달러를 유통시킨 혐의로 체포되었다. 2005년 미국은 중국계 범죄 조직을 단속하면서 북한산 100달러짜리 위조지폐 400만 달러 상당을 압수했다. 2006년 미국 의회의 연구소는 북한이 매년 약 1500만~2500만 달러에 이르는 위조지폐를 찍고 있으며, 지금까지 적어도 4500만 달러 이상의 위조 달러가 적발되었다고 보고했다.
  
  40. 북한에 의한 납치: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로는 6·25전쟁 당시 납북자 8만2641명, 전쟁 이후 납북자 514명, 10여 개국의 외국인 납북자 286명 등이 있다. 6·25전쟁 당시에는 ‘남조선의 인테리를 데려오라’는 김일성의 지령으로 정치인, 공무원, 학자, 교육자, 의료인, 법조인 등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납치됐다. 전후에는 KAL기 및 어선 납치 등을 통해 많은 민간인들이 납치되었다.
   북한은 납치 사실에 대해 ‘자진월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500여 명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에 대해서도 생사확인 요청도 거부하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외국인 납치의 경우 김정일이 1976년 외국인 납치를 지시한 이후 납치 행위가 대거 일어났다. 일본인 납치자 17명 등을 포함해 중국·프랑스·이탈리아·레바논·네덜란드·루마니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요르단·태국 등에서 납치 피해가 발생했다. 2002년에 있었던 고이즈미-김정일의 회담에서 김정일은 납치를 시인하고 5명의 일본인 납치자들을 돌려보낸 바 있으나, 그 이후로 납치 문제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41. 김정일의 비자금: 북한은 심각한 외화난으로 허덕이고 있다. 1990년 초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초래된 경제난으로 인해 전례 없는 외화고갈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와중에도 군비를 끊임없이 유지하고, 해마다 김정일의 비자금은 중단 없이 충전돼왔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에 따르면 김정일이 매년 600~7000만 달러의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관리되는 김정일의 비자금은 20~40억 달러에 이른다. 김정일이 비자금을 벌어들이는 주요 통로는 ①파키스탄, 리비아, 이란, 이라크 등 제3세계 나라들에 미사일과 핵물질, 핵무기 기술 수출 등을 통한 외화 획득 ② 양귀비 등의 재배 및 타국의 범죄 조직과 공모한 마약밀매 ③ 외화난을 타계하기 위한 초정밀 위조달러(일명 슈퍼 노트) 제작 및 해외 불법 유통 ④ 헌납금, 생일 충성자금 등 북한 주민들의 ‘충성의 외화벌이’를 통한 비축 ⑤ 조총련, 남한을 통한 외화 유입 등을 들 수 있다.
  
  
  
[ 2011-06-20, 09: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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